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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s Life2012/05/13 02:02

 

Coffee

 

커피에 관련된 자료를 찾던 중 좋은 두개의 링크를 올린다.

 

1. 커피통 :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과거 기사가 뜬다.

http://www.cafetong.com/board/board.php?task=view&db=virtualMenu&no=219&page=5&search=&searchKey=&category=11&pageID=ID12058249811

 

2. OCW 바리스타 자료

http://www.kocw.net/home/search/kemView.do?kemId=326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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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16)



1. 서언: 너무 빨리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사람들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 있다. 기술도 있고, 체력도 있고,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나이가 57이라는 이유로 하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정년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인가 열심히 일 해온 사람에 대한 존경과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 일할 수 있음에도 쫒겨 나가는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57인 그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잘하던 일은 못하게 되고, 익숙하지 못한 일을 저렴한 임금을 받으며 비고용직이 되어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은행에 충분히 돈을 저금해 두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80세가 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사는 것이 고통이요, 걱정인 삶을 살게 된다.

의료기술의 발달과 나아진 의식주의 개선으로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늘어났다. 1970년에는 62세에 불과했던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2008년도에는 83세로, 20년 이상 수명이 늘어났다. 하지만 IMF를 맞이하며 시작된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해고와 그것만이 기업을 살리고 나아가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는 애국심에 호소하는 잘못된 논리는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똑똑하고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는 재벌기업과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CEO들의 입에서 여전히 등장하는 허언이기도 하다.

한때 정년을 연장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그것을 법제화하여 근로자들에게 불이익이 없게 하자는 논의가 진척되적도 있지만 기업들은 그러한 정년연장을 법제화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왔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인권을 초월하고 사람을 넘어서는 가치가 되어 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노년에 고통 받는 것을 당연시 여겨야하는 그런 억지를 수용하고 있다.


2. 이상한 포도원 주인

본문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 새벽같이 인력시장을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루치 임금 1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하도록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3시, 6시, 9시, 11시에 장터에서 여전히 일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한 모두에게 하루치 일한 값으로 1데나리온을 지불한다.

임금을 일의 능률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일한 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으로도 포도원주인의 임금지불 방식은 이해될 수 없다. 그는 모두에게 합당하거나 혹은 그보다 과한 댓가를 지불하였다.

3. 일하기 원하는 사람 VS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

왜 포도원 주인은 아침일찍부터 일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을까? 11시, 지금의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포도원주인은 가서 말한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그들은 놀고 싶어서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일을 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거기 그 자리에 그저 머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고, 자신들도 그렇게 일하고 싶었지만 이미 저녁이 되어가는 그 시점에 더 이상 자기들을 고용하고 일을 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일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차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했다.

오후 5시, 곧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래도 그 잠간이라도 일을 하고 약간의 품이라도 팔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시장의 한 모퉁이에 서 있다. 그런 그들에게 포도원주인은 일을 맡긴다. 일하기 원하는 사람과 그들에게 일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들의 만남은 하늘의 축복이요, 운명이다.


4. 선한 것과 악한 것

나중 온 사람들이 1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처음 온 사람들은 내심 기대를 했다. 자기들은 더 오래 일했으니 더 많은 댓가를 받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주인은 처음 온 사람들에게도 처음에 약속한 1데나리온을 준다. 처음 온 사람들은 주인에게 원망하며 화를 낸다. 한시간 일한 사람들과 하루종일 일한 자신들을 동일하게 취급했다고 주인을 악하다고 평가한다.

왜 주인은 악하다는 평가를 들어야했는가?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었다면 그들보다 몇배 더 일한 자신들에게는 더 나은 보상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들의 논리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은 주인과 약속을 하였고, 주인의 그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다만 주인이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크게 보이는 호의를 타인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전에는 공평했던 것이 악하진다고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1데나리온은 공평한 것이고, 그들은 그것을 받았다. 또한 주인은 하루종일 일이 없어 가슴졸이며 시장 한 구석에서 쩔쩔매던 이들에게 일을 시키고 1데나리온을 준 것도 선한 일이다. 그 선한 일이 이전에 한 공평한 일을 악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5.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

이 비유는 천국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사람들이 천국을 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는 말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일하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의 무책임과 게으름을 경계하는 말이다.

천국은 게으르고 가기도 귀찮아하는 사람을 억지로 들여보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열심히 일한 댓가로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도 아니다. 공의와 사람이 공존하는 곳, 그렇기에 천국은 진정한 복지가 구현되는 복지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포도원주인이 만났던 사람들은 일하기 원해서 그때까지 참고 기다린 사람들인 것을 기억해야한다. 영약한 머리를 굴려서 하루종일 놀다가 해질 무렵 장터에 나가 거기서 포도원주인이 오는 것을 기다린 사람은 아마도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래서 그 둘은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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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한마리 양의 중요함을 말한다. 생명과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그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 가치있는 것도 없으며 그만큼 기쁜 것도 없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10-20)

1.
(칼럼으로 대체)
[칼럼] 한마리 양, 밀양 노인네, 여성비하

2.
본문에서 잃어버린다는 것은 망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개역개정에서는 ‘잃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곧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어렵게 설명하기보다는 조금 쉽게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뜻이 정하고, 반드시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 그런데,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자신이 반드시 하겠다는 표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찌될까? 어쩌면 이 영역에서 인간의 자유의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지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꺽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양이 돌아오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사실 본문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긴하다. 하지만 이전에 본 구절들에서 실족케 하는 일을 한 사람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지는게 낫다고까지 한 사람, 그는 작은자를 실족케 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아흔 아홉 마리를 위해 한 마리 양을 기꺼이 버린 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양이 길을 잃은 것은 단순하게도 가서 찾아오면 끝이지만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는 그보다 복잡해진다. 본문에서는 바로 죄의 문제를 언급한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7:18)’ 한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죄를 지은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온다. 이 두 사람이 등장인물이며 주인공이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둘은 다시 형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첫째,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 할 것, 그 말은 용서를 담고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빌 방법이 없을테니까. 둘째,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말뿐인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까지도 이야기가 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그 둘은 다시 한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는 복잡해지고, 최악의 경우 그 죄를 지은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서 출교명령을 받게 된다. 더 이상 그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게 된다. 나는 이것이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용서의 마음을 품고 다시 찾아가서 말하고, 또 다시 몇 명이 찾아가서 말하고, 그래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인정하고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노력한 것을 하나님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 아마도 18절에 나오는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말의 뜻이 아닐까?

3.
그러기에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중요하다. 19절에 나오는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최소단위라고 보통 해석된다. 하지만 조금은 특별하게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을 의미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19)’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종종 ‘무슨 일’을 아무런 제한 조건이 없는 일로 보려고 들 한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돈이 필요하거나 기타 등등 성공을 위한 제한 없는 간구로 종종 착각하게 된다. 두 사람이 모여서 돈을 벌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위 구절에 맞는걸까? 두 사람을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또 다른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그 두 사람이 합심해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더 큰 돈을 벌기 원할까? 조금 이해하기 쉽게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부모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자식을 고아원에 버렸다. 그리고 그 일을 잊지 못하고 나중에 다시 자식을 찾아다니다 간신히 만난다. 어찌어찌해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간신히 마음이 전달되었다. 자식은 이제 부모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때 그 둘 사이에 합심하여 구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일까? 로또 1등 같은 행운을 구할까? 아니다. 주는 쪽, 하나님편에서는 제한없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만 받는 쪽에서는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된다. 그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그를 용서하고 다시 예전처럼 가족으로 편안히 대할 수 있는 사랑,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사랑, 그런 사랑을 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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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드러난 첫 번째 이야기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이 이야기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가는 개인의 모습과 대조해보면 천국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현실은 이렇다. 양 한 마리가 겪는 공포나 두려움보다 양 아흔아홉 마리가 누려야 할 권리가 우선시 된다. 밀양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던 70대 노인이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들여다보면 송전탑을 건설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신고리에 있는 원자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송전탑을 거쳐야만 영남지역에 공급될 수 있다. 결국 누군가의 땅 위에 송전탑이 세워져야하고, 그것이 재수없게 밀양에 있는 주민들의 땅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송전탑이 세워지는 부근의 땅을 구입해서 거기에 송전탑을 세우려고 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 땅의 책정가격이 지나치게 낮다는 것과 주변에 있는 다른 땅들도 송전탑의 영향 때문에 이제는 팔리지도 않는 그런 땅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밀양 주민들의 불평을 잠재우려면 지금 시행하고 있는 것보다 높은 가격으로, 현 실정에 맞추어 땅 가격을 지불하면 된다. 또 주변 땅들에 대해서도 국가가 땅의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면 된다. 문제는 그만한 돈을 지급하려면 그만큼의 세금을 더 걷어 들여야 한다는데 있다.

이야기속의 양 한 마리는 그저 산 위에서 슬피울며 자기를 찾아줄 목자만 기다리면 되었지만 현실속에서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아흔아홉마리의 양들이 자기들의 일정한 이익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목자는 과감히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목소리를 접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픔이 있다.

최근 나는꼼수다 팀의 발언 중 여성비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한 여성이 비키니 차림의 사진을 올리며 정봉주 석방 시위를 했다. 그걸 보고 많은 남성들과 나꼼수팀에서 재미있어했다. 시위로만 보았으면 별 문제는 없었겠지만, 주변에서 보던 다른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할 때 오히려 “가슴도 적은 것들이”, “열폭”, “알바냐?” 등으로 비아냥거렸다. 문제는 점점 커졌다. 조금씩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겉돈다. 핵심을 피하며 이제는 더 큰 문제가 있으니 그만하고 접어라는 식의 대응이 시작된다. 나꼼수는 대한민국 진보를 위해 상처받아서는 안되니 사과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으며, 이런 여성문제는 극히 작은 것이니 나중에 선거 다 끝나고 해도 된다는 발언들이 시작된다. 역시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고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과 능률을 최고의 덕목으로 무의식중에 교육받은 사람들이라면 비록 그가 진보를 외치고 있다고 해도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산중에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거나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마리의 양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의 생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한 마리의 양의 목숨과 아흔 아홉 마리 양의 불편을 저울에 달아 보라는 것이다. 양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는 목자는 당연히 한 마리 양을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의 불편을 감내한다. 아버지는 한 자식을 위해 나머지 자식들의 불편을 감내한다. 하지만 경영을 목적으로 하면 달라진다. 기꺼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사람들을 잘라낸다. 그들이 당장 먹고 살 것이 없거나, 당장 길로 쫓겨나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회사는 더 큰 이익을 가질 수 있고, 남은 사람들은 더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굳이 쫒아내지 않아도, 조금 불편을 함께 감수하면 모두 다 살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모두들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선진 경영기법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해야만 나머지 사람들이 살수 있다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양을 찾아라. 한 마리의 양을 찾아라. 그것이 양을 맡긴 주인의 명령이다. 목자는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잘 돌봐서 좋은 털과 고기를 얻는 것보다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모두를 데려오는 것이 주인의 뜻이다. 주인의 자본주의자는 아니다.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잘 돌보아서 각각 1%씩만 털이 더 나오게 하고, 더 살찌게 한다면 한 마리는 있거나 없거나 상관이 없는 시스템이 자본주의 구조다. 10% 증진시킬 수 있다면 100마리 중 10마리를 사육하다가 죽여도 상관없는 게 자본주의다. 하지만 목자는 양을 가축으로 보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 반려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목자는 양을 가족으로 본다. 그러기에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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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10)


1. 누가 큰 자인가

본문은 두 가지 논쟁에 대해서 들려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논쟁이다.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논쟁은 누가 예수의 수석 제자인가 하는 자리싸움의 양상을 가지고 벌어진다.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예수는 곧 커다란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때 누가 예수의 최측근으로 드러나게 될 것인가를 가지고 제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 암암리에 일어났던 이 갈등이 결국은 예수의 앞에서 드러나게 된다.

2. 큰 자가 없는 곳

기독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다.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산속에서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나 그들만의 공동체안에서 신비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성이 짙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는 현실이라는 세상 속에서 말을 드러내고 행위를 드러낸다. 선지자들은 산위에서 말하는 대신 궁정에서 왕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그래서 종종 현실적인 기독교의 현실성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어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성공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종종 이루어지는 미국의 성전, Holy War 는 극단적인 전쟁마저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덮어서 정당화하는 지극히 위험하고도 적그리스도적인 행위다.

천국에서 큰 자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세상에서 작은 아이 하나를 세운다.  천국은 이런 아이와 같이 되는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대답한다.

낮춤으로 커진다는 답변은 커지기를 소원하는 자체로 더 이상 커질 수 없다는 답을 내포하고 있다. 큰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고, 그런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 곧 그들로 큰 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된다.

대답을 들은 제자들은 한순간 큰 혼동에 빠졌을 것이다. 큰 자가 어떤 자인지를 알면 자신들이 그 큰 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현실 속에서 예수의 수제자가 되어 큰 자의 권리를 누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또한 큰 자에 초점을 맞추는 자는 작은 것을 무시하고 경시하게 된다. 그러기에 예수는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이렇게 경고한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큰 자를 찾고, 높은 곳을 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발밑에 있는 작은 어린 아이 하나를 보라고 말한다. 그 어린 아이를 대할 때 예수를 대하듯 하라고 말한다. 만약 그러지 못해서 어린 아이 하나가 실족하게 되면 차라리 목에 맷돌을 달아 바다에 빠져 죽게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3. 작은 자를 업신여길 수 없는 곳

진정한 믿음은 항상 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원하는 믿음은 아래를 살피는 것이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곧 범죄라고까지 말한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과 그로 인해 누군가가 실족하게 된다면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 왕들에게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혹시나 그런 자신의 권리행사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음을 말하며 베드로에게 그 돈을 낼 것을 말한다(마17:24-27). 누군가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는 별다른 일은 아니다. 그러든 말든 나는 나의 자유를 가지고 타인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며 살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의 법이다. 하지만 예수의 법은 조금 다르다. 실족케 하는 일이 곧 범죄라고 말한다.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일이 범죄라고 말한다. 만약 작은 자를 보는 눈이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면, 그 눈을 빼버리라고 말한다. 손과 발이, 작은 자들을 차별대우하고 멸시한다면 차라리 그 손과 발을 찍어 내버리라고 말한다. 

아직까지도 큰 자가 누구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들의 판단이 당신이 천국에 적합한지 지옥에 적합한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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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종교인의 세금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종교인들 중 기독교(구체적으로는 개신교)의 목사들의 세금납부에 대한 것이다. 왜 교회 바깥에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우선은 개신교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가볍고 경망스럽게 보였다는게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꼬박꼬박 세금 낼 것 다 내고 사는데 왜 너희는 불노소득(교회 외부의 입장에서 보면)을 세금조차 내지 않고 꿀꺽하느냐는 일종의 반감의 표현이다.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개신교가 가볍고, 경망스럽게 보인다는 것은 왠만한 사람들은 인정할 만한 일이 되었다.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이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위치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잘못된 일이 터졌을 때 거기엔 거의 기독교인 혹은 목사나 장로가 관련되어 있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예전엔 목사나 전도사라면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존경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길에서 사람들의 돈을 빼앗던 깡패들이 가난한 전도사가 성경을 옆구리에 들고 가던 길을 막아섰지만 그가 전도사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전도사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며 전도를 했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벌써, 먼 옛날의 일이 되었다. 더 이상 목사나 전도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소명에 따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만을 기대며 하루하루 안개 속을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기득권을 가진 큰 목사님과 그의 세력이 존재하고, 그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기꺼이 큰 목사님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는 이들로 가득 차 버렸다.

기윤실의 대표적 인물인 손봉호 장로는 목회자의 세금납부문제를 끄집어내서 기독교 목사들로부터 꽤나 시끄러운 구설수에 올랐다. 사실 목사들의 세금납부는 한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유독 한국에서만 종교인들의 세금납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법적으로도 소득세법에서 목사를 포함한 성직자에 대한 비과세소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세금납부 대상이 맞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정권은 종교인들에게 소득세를 매기지 않았다. 거대한 표를 가진 종교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목사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의 세금면제 혹은 세금납부거부 운동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나 대부분 억지 주장이 난무하고, 비약과 논리가 안드로메다까지 갈 정도다.

목사들에 대해서만이 아닌 모든 종교인들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목사들 중 대형교회를 목회하면서 연봉 억을 가볍게 보는 소득을 가지신 상위 몇 분들과 거대한 사원과 산을 소유한 몇몇 스님들만 정신을 차린다면 종교인들의 세금납부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90% 이상의 목사들에게는 이것이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상당수(거의 대부분)의 부목사들이나 교육목사, 교육전도사 등은 비정규직이고, 급여는 알바수준에 못 미친다. 이런 분들은 세금을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분들 중에 목사가 세금을 내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질 듯이 분을 내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아래에 성경을 적어본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마17:24-27)


예수는 자신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말한다. 하나님이 만든 것을 인간들이 사용한다. 엄밀하게 말해 세금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내야한다. 그러니 예수는 인간들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세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예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실족에 대한 말은 바로 몇줄 아래에 다시 등장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때 그로인해 발생하는 실족이 가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차라리 목에 맷돌을 달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 그보다 낫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이쯤이면, 예수까지 포기한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러는지 정신감정을 의뢰해야 할 때가 되었다.

(본칼럼은 2012년 1월 29일 그교회 주보에 실린 칼럼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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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9-20)


 

 

1. 이미 온 엘리야

 

본문은 이전의 내용을 이어서 계속 전개된다. 산 위에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산 위에 집을 짓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예수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산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는 함무령을 예수에게서 듣는다. 제자들은 의아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특히 말라기선지자에 의해서 진노의 날, 심판의 날이 이르기전에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엘리야가 온다는 것이 당시 유대에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다는 것을 말한다면 많은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데 훨씬 쉬울것이라고 제자들은 판단한 듯 하다.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가는대로 다른 제자들에게 그리고 군중에게 산에서 있었던 일, 본 일을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죽음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기까지 비밀에 부칠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예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온 엘리야를 제대로 대우하지도 않고,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고 했다. 예수가 말한 엘리야는 산위에서 만난 그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즉 세례요한을 말한 것이었고, 제자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온 엘리야,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다. 성경해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파악 하는 데에 어느 정도까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즉, 말라기 선지자가 말했던 엘리야는 문자적 의미로 구약시대에 살았던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 즉, 엘리야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직을 임명받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사람을 의미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뛰어난 발명가를 보면서 한국의 에디슨이라고 칭찬할 때 그것이 전구의 필라멘트 실험은 수천, 수만번 반복했던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

 

당시의 제자들의 상황은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예수는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예수 자신은 그런 대중들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었고, 절대적으로 자신이 곧 고난을 받고 죽을것이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들의 이성으로 예수의 말은 이해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믿기 원했던 승리자 구세주에 대한 믿음과 예수가 말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둘 사이에서 제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직접 말을 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곧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조차 없는 제자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3.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믿음에 대해서 이 구절만큼 억지스럽고, 이상할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해석되는 구절도 없었을 것이다. 종종 겨자씨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이해되며 무슨 일이든 해 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일종의 에너지저장창고처럼 이해되곤 한다. 큰 잘못이다.

믿음은 보통사람을 수퍼맨이 되게 하는 그런 마법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아니 우리의 상식이 거부하는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만 하는 그런 일을 우리로 알게 하고, 그것이 실행되게 한다. 산을 옮기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다. 그 섭리는 인간이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지에 기반 한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당시 제자들에게 요구되었던 믿음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잘 나가는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곧 죄인이 되어 모두의 눈 앞 에서 수치스럽게 죽어갈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 이후에 일어나는 부활을 볼 수 있으며, 그런 부활을 보는 자의 믿음이 곧 무덤을 비게 하는 믿음이고,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며,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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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마17:1-17)
   

마태복음 17장은 엿새후라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엿새는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할수 있는 시간입니다. 엿새전,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존재가 아니라 이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며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피할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시도가 사단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세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얼굴이 해같이,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모세이며 엘리야인지를 알았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과 그 두명이 대화하는 것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여서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던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들이 누군지를 알게 된 베드로가 나섭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게 좋겠습니다. 말만하시면 여기에 집 세채를 짓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모두 여기서 세상과는 동떨어져서 삽시다. 굳이 고난받고 죽으려 할 이유가 있습니까? 위대한 영웅, 세분을 모시고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게 우리한테 제일 낫겠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베드로는 말을 했겠지요. 베드로의 말에는 베드로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전히 고난을 싫어하고, 길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멀리하고 싶었던 베드로는 산위에서 초막을 짓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도로는 어찌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4)".

이미 예수님은 엿새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밝혔습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사단의 것으로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만류합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조금 더 교묘해졌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겸손과 공손을 가장한 이러한 불신앙은 한국 교회에 이미 널리 퍼져있습니다. 거친 말과 무례한 말에 발끈하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포장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하는 불신앙적인 말들이 얼마나 교회를 홰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목사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젊잖게 믿음없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무례하지만 정당한 이유를 대며 자신의 신앙을 공격하는 이들을 악인으로 낙인찍습니다.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겸손으로 포장된 사악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좋아합니다. 직접 고난의 길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서 영화보듯이, 영화속에서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길 위로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이미 하나님이 알려주셨지만 우리는 고난을 피할 길만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셨음으도 우리는 계속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단서조항을 끌어냅니다. 믿음은 사라지고 변명과 하지 못할 이유만이 덕지덕지 들어붙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길 위에 있는 예수

베드로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빛이 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명령이고, 이것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지금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말을 해 주었음으도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엿새전 이미 들려준 말을 그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길에서 산위에 초막셋을 짓고 거기 눌러앉을 발코니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야만 했습니다.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그들이 다시 길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지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소리였습니다.


3. 인간의 두려움

하늘의 소리 앞에서 제자들은 땅에 널부러집니다. "심히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때문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땅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을 피하려하는 행위는 비신앙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2:20)"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혹은 타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일본 원전 주변 후쿠시마에 살던 사람들은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들의 잘못때문에? 아닙니다. 인간의 교만함으로 자연마저 누르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도자들과 그들에 동조하여 물질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은피해야 합니다. 아니 이런 고난은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폭탄을 돌리며 돈을 벌어들였던 미국의 경제는 그 폭탄이 터질때 폭탄을 들고 있던 사람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고난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예수가 우리를 부를때 예수는 우리를 고난의 길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마저 위협받는, 아니 분명히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런 길에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요. 초막 셋과 고난의 길을 바꿀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릴때 제자들의 더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담긴 그 두려움앞에 제자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


4. 하나님의 위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땅위에 엎어진 제자들을 보며 그들에게 손을 대고 일으켜 주시며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길 위에서 예수와 함께 맞이 하는 고난이 암흑속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두려움속에 엎드러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그 고난의 무게는 우리 혼자 감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말하면서 그 멍에를 우리에게만 지우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멍에를 자신이 매고 우리가 거기 따라갈 수 있도록 걸음을 맞추어 주십니다. 시작하는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맞아야 할 고난에서 피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려하면 진정한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낙망의 두려움, 그 두려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바닥보다 더 낮은 곳에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고난에 초대하면서 동시에 그 고난의 길을 우리가 혼자 가게 두지 않습니다. 위로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에 처할지라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끄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길 위에 설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그 고난의 끝에 존재하는 희망을 보게 되고, 그 희망의 끝에서 고난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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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터 맥그레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책은 일반인들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여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와 수사로 가득찬 다른 어떤 책보다 알찼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학사상을 쉽게 풀어 써 준 책이었다. 그래서 그 책을 통해 앨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쉽게 말하고, 쉽게 쓰지만 중요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최근에 그의 책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라는 책을 손에 들었다. 책의 뒷장에 이렇게 쓰여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우리에게서 고난을 거두지 못하실까?"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에 정면으로 맞선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고난을 당하셨다. 이 놀라운 진술을 시작으로, 신비한 고난의 패러독스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과연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몇권의 책을 읽고, 몇분의 사색에 잠겨 보았지만 아직 그 대답을 분명히 찾지 못한 나로서는 맥그래스가 이 책을 통해 내게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왜 용산에서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왜 한 가정의 가장들이 목숨을 끊는지, 왜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지 그에 대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참으로 어렵다. C.S.루이스도 고난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그 스스로도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겠노라 고백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책의 서두에는 답을 제시하는 대신 맥그레스는 발코니와 길에 대해서 읽었던 책을 말한다. 발코니는 구경하는 곳이고 관찰하는 곳이라면 길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발코니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있다면 길에는 참여자들로 북적댄다. 진리는 길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이 진정 있어야 할 자리는 길이다. 길 위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직면하며, 실제적인 문제로 고민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저 모퉁이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다. 어둠속에서 혼자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반면 발코니에는 그러한 현실감은 없다. 두려움도 없다. 그저 멀리서 관찰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발코니의 관점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필요하다. 아주 중요하다. 항해를 떠나는 배에 지도가 필요하듯 발코니에 펼쳐진 사색과 논쟁의 테이블은 우리에게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그 지도에는 고난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무심한 발코니의 관점은 종종 길위의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 그것이 발코니를 설명해준다. 발코니에 있는 사람은 길위에 있는 사람들의 고난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발코니에서 내려와 길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는 길위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수도 있다.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발코니통신은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많은 교회들은 복음을 말한다. 발코니 위에서 저 멀리 있는 희망의 나라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길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들이 길 위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고,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난에 신경조차 쓰지 않기 때문이고, 단지 자신들만의 리그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길 위로 내려서지 않기에 보이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길 위에 있는 이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기에 고난의 크레타 미궁을 방황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 를 질문하지 않는다. 고통을 주고 잊어버린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제 발코니는 게토가 된다.

한국교회는 발코니에서 바른 논쟁을 하는 대신 어이없는 기득권 싸움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위에 있는 이들이 이제 발코니에 있는 이들을 가르친다. 그따위로 살면서 교회라고 하다니, 그따위로 말하면서 목사라고 하다니... 쯧쯧...

고난의 끝을 본 사람이 다시 길로 나설때가 되었다. 머리속에 기억한 발코니의 풍경을 기억하며 그것을 지도로 삼아 이제 길 위에서 현장에 속한 고난을 함께 경험해야 할 때다. 교회는 낮아져야하고, 그래서 길 위에서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피할수 없는 것이며, 고난의 끝은 추억이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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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신앙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 하늘의 성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제목] 세상의 실패, 하늘의 성공
[성경] 마16:21-28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16:21-28)


1. 이때

제자들이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다음,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자들에게 하신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알려준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자신이 지상에서 해야 하는 어찌보면 가장 중요하고, 모든 일의 뼈대를 이루는 중심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들을 준비가 된 자들에게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들을 준비가 된 자들에게만 들려지고 이해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그래서 성취된 메시야의 사역은 이렇게 드러난다. 준비된 자들, 그들에 의해서 메시야의 사역은 전해지고 들려질 것이다.


2. 만류하는 제자들

그것은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세력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끝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했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예수님의 말은 당시 제자들에게 분명히 전달되기는 어려웠다. 제자들은 그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각오를 전달하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을 결의한 투사처럼 비춰졌던 것 같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붙잡고 강력히 말리기도 했다.
이런 베드로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랬을까?

인간적인 도리라면 위험한 일을 앞둔 사람을 만류하고 슬퍼하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인사로 이해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혹은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기 위해, 큰 부를 가지고 떵떵거리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그가 온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였다.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 그것을 인간적인 기분으로 막고 나선 것이 베드로였다. 막고 난 후에 베드로에게 어떤 대안이라도 있는가? 아니다. 그저 이러면 자신이 따르고 존경하는 스승이 죽고 더 이상 그를 볼수 없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위기감이 그를 감쌌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막아섰다.


3. 세상의 실패, 하늘의 성공

종종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성공하려는 모습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것을 존중받으려한다. 교회는 저 높은 고지에 올라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성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하지만 그 성공은 세상속의 성공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땅에 속한 세계에서 성공한 것이 과연 하늘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우리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힘의 요구를 거절했다. 나아가서 자신이 그 힘을 가진 사람들 때문에 죽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제자들의 얼굴은 아마도 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성공을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실패를 말하고 있었다.
세상 속에서 기꺼이 실패하고자 하는 자, 그 자에게 하늘은 영광을 보여준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자기의 목숨을 구원코자 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내어놓는 자, 그 자에게 하늘의 생명이 주어진다.


4. 신앙,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의 정치적 야욕이 좌절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신앙인은 아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이천년전 이스라엘에 있었던 대중을 이끌던 젊은이에 대해 그렇게 쓸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안타깝게 당시 정치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예수님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다. 그는 하늘의 성공을 이루어 내셨다.
하늘에 있는 성공과 땅에 있는 성공은 항상 같지는 않다. 종종 하늘의 성공은 땅에서 실패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람은 모든 시간을 바쳐 세상을 얻으려한다. 하나님은 온 천하도 자신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 실패하라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늘의 성공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세상이 조롱하는 십자가, 천대하고 멸시하는 십자가, 그의 십자가가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하늘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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