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구절]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

2007. 9. 20. 11:21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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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0)
Bu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moth and rust do not destroy,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and steal. (Matthew 6:20)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은 구름 너머 저편 화성에 있는 은행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단어는 아마도 보물과 하늘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보물은 무엇인가? 대체 그 보물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그리고 하늘이라는 곳은 무엇인가? 대체 하늘에 보물을 두라는 말은 어떻게하라는 말인가?


이 구절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이 구절의 앞과 뒤의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구절의 앞에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그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책망하는 부분이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구제를 은밀히 할 것이며, 기도도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할 것을 말한다. 심지어 금식을 하면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하여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로 모르게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보물을 땅에 쌓는 것과 하늘에 쌓는 것의 차이임을 말하고 있다(6:20). 종교적 열심을 가진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거리에서 기도를 했다.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당시의 유대상황과 지금 한국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한국은 오히려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상황이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적 맥락에서 유대와 한국의 상황에서 다르게 적용해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하는 모든 것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기에 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내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가? 어쩌면 그것이 바로 보물을 땅에 쌓는 모습일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주변 사람들의 눈은 아랑곳하지 말고 함부로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 삶의 모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그것에 한정되어 살아간다면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의 원하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매초 간격으로 누군가의 리모트 컨트롤을 기다리고 있는 원격조정인조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은 환호한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잊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대중은 손에 돌을 들고 있다. 비단 예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예수가 왔을때 세례요한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예수의 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갈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그 다음순간, 사람들은 그 손에 돌을 들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렸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이 사건을 예견하고 말하였지만 제자들은 그럴줄 미처 몰랐다. 그래서 제자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베드로는 이 사건 앞에서 그를 모른다면 부인하고 떠났다. 다른 제자들 역시 그랬다.


사람들의 인정을 원하는 것, 사람들이 나를, 혹은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알아줄 거라고 기대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보물을 땅에 쌓는 것, 혹은 땅에 버리는 것이리라.

보물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곳에 맡겨야 한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인식하는 이들과 공유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이다. 진정한 기도는 골방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나만의 대면의 시간은 골방에서 이루어진다. 진정한 금식은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과 나만의 경건과 거룩속에서 진행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늘의 비밀에 참여하고 그 비밀스런 하늘의 장소에 그와 나만이 아는 보물을 간직하고, 그 보물의 찬란함을 엿볼수 있다.


20절 이후의 본문에서 보물은 마음의 거처로 표현된다. 보물이 있는 그곳이 바로 내 마음이 있는 곳이다.

보물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24절에서는 두 주인(two masters)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두 주인은 바로 하나님과 재물이다. 교회에서 종종 들리는 말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재물의 복]이라는 말이다. 천민자본주의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묘하게 기독교의 사상과 결부되면서 재복이라는 말이 퍼졌다. 예수를 따르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자에게 재물의 복이란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아니 땅에 버려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축복 사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이기적 인간의 합리적 선택]을 정당화 하는 아주 못된 습성에의 퇴행이다.


나의 보물은 무엇인가?


시간적 분배가 아닌 가치로서의 기준이 되어 있는 것을 마음에 새겨보라. 내가 공부를 하면서 무엇에 가치를 두는가?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성경을 읽는가? 내가 일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건 스스로가 바보라고 여기는 것 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이 땅에 그의 정의가 드러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무엇인가를 하면서 이 땅에 그의 정의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쇼를 하는 것 보다 훨씬 하늘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이 가 있는 곳은 무엇인가? 만약 내 마음에 부동산에 가 있다면, 내 마음에 주식에 가 있다면, 내 마음이 컴퓨터 게임에 가 있다면, 내 마음이 장학금을 받는 것에 온통 집중하고 있다면, 그때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보물이고,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당신의 주인(Maste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