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2007. 10. 20. 19:55Life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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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


## 모든 종교는 진리의 단서를 가진다!! ##


여기서는 우선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외에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어떤 종교라고 해도 그 안에 진리에 관한 단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어떤 종교든 모든 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종교안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종교를 볼 때 그 종교가 어떤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는 진리의 단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이 모든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단서들을 부정해야만 하는 더 큰 믿음과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신론자일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많은 무신론자들은 그 이성적인 사고로 인해 유신론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자신들의 무신론적 신념을 끝까지 유지하는 경우는 오히려 소수였을 뿐이다.


현대사회가 기계화, 문명화된다는 것이 종교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고, 종교를 가진다는 것을 원시적인 것으로 퇴행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어리석음을 견제하고자 한다. 오히려 현대사회는 모더니즘 이후에 더 이상 이성에 대한 분명한 입장조차 믿을 수 없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해체주의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이 종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이 아닌,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 ##


여전히 이 땅 위에는 많은 유신론자들이 존재한다. 기독교인과 회교도들, 흰두교도들과 불교도들, 그리고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철학자들 중에 유신론적 신관을 가진 많은 철학자들이 있고, 그 사상은 여전히 인정받으며 연구되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가치체계속에 자리잡고 있다. 반면에 무신론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현대 서구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유물론자들을 포함하여 오히려 일부의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일부라고 불리는 무신론자들 중에서도 스스로 무신론이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현 체제에 반발하기 위한 도구로 반대되는 경향을 스스로 발산하기 위해 택한 일종의 정략적 수단으로서의 무신론자들이 많은 것도 현대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와 선악을 넘어선 존재 ##


유신론은 선한 절대자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와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 범신론적 신관을 가진 종교로 분리할 수 있다. 헤겔이나 흰두교, 또 흰두교에서 파생된 불교등은 범신론적 신관을 가진다. 이 범신론적 신관은 우주 자체를 절대자와 동일시하게 된다. 이러한 신관에서 선과 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러한 범신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영화나 책들도 다수 나와 있다. 한 악인이 등장한다. 악인의 끔찍한 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모두가 손가락질을 할 때, 그 죄인이 그러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유와 환경을 설명한다. 그러면 많은 이들은 그 죄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 다음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그 일로 말미암은 또 다른 행복을 연출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선과 악의 개념이 없어지게 된다. 적어도 영화나 소설속에서의 악인의 악은 더 이상 악이 아닌 것이 된다.


이런 범신론적 신관을 가진 사람은 종종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선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왜 이렇게 악이 가득한거지요?] 선한 존재와 그에 상반되는 악한 존재, 그 사이의 갈등에 대해 범신론은 그 모든 것이 절대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주가 신인 것이다. 그 안에는 선과 악은 없다.


물론 기독교적 신관은 범신론과는 다르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은 절대적 선의 존재이며, 악은 선의 변질된 형태로 설명한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세포의 분화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이지 못한 세포 분열을 일으키는 세포를 암세포라고 부르고, 이 암세포는 변질된 세포로 이해한다. 즉, 선한 것이 있고, 그 선한 것이 변질된 것이 있다. 이 변질된 것은 원래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인체의 정상조직의 세포는 성장은 인간의 생존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여러 조절인자에 의해 조절된다. 하지만 어떤 세포는 분열을 중지할 시기를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열을 가속화시킨다. 이것을 암세포라고 부른다. 범신론적 신관에서는 암세포조차도 악한 것이 아니므로 암에 걸린 인간은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은 이미 모든 것을 허용한 듯하지만 동시에 어떤 것도 보호받지 못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는 잭 리퍼같은 희대의 살인범과 테레사 수녀같은 평생을 약자를 위해 산 사람 모두 동일한 비중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인권의 면에서 둘은 같은 비중을 두어야 하겠지만, 그 삶의 무게나 가치, 그리고 가치관의 모델면에서 둘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말하는 것이다.


우선 여기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왜 악한 세상을 창조했느냐? 혹은 왜 악한 세상을 방치하느냐? 는 질문에 앞서 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세상은 악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이 악하다는 것과 그것이 선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동등하게 여기며 그것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것이다. 아둔함의 표현일 뿐이다. 종종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깊이 있는 교리조차도 아닌 아주 기초적인 교리조차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모순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한다. 차라리 더 깊이 머릿속으로 풀려고 노력한다면 오히려 많은 이들은 그 논리적 모순 때문에라도 종교의 심오함을 한번 더 경외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악함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이전의 글에서 세상의 악함에 대한 글을 썼고, 또 이 부분은 스스로 그렇게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필자가 세상이 악하다고 말해도 스스로 세상을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의마가 없는 것이다. 세상이 낙원이요, 천국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구원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국에서 끌어내려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상을 보며 이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그 잘못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로 잡을 수 없는 절망임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기서 구원의 필요성을 찾게 된다.


이런 한계성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은 어떤 종교든, 거기에서 구원을 길을 찾고자 열망하게 된다. 그 중 어떤 이들은 범신론적 신관에 매료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이원론적 신관에 매료될 것이다. 많은 종교들 중에 그 안에 구원이 있기를 소망하며 사람들은 다가갈 것이다. 그중 진리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이원론과 기독교 ##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면 이원론에 빠진 종교로 보기도 한다. 이원론(Dualism)은 기독교 교리와 상당부분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원론적 신관을 가지고 그것을 믿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무척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원론은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다. 그것은 이원론이 진리에 많은 단서를 포함한 사상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와 유사할 뿐이지, 기독교는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것이다.


이원론적 관점에서는 세계는 선과 악의 두 대립되는 힘의 대결로 본다. 선한 신이 있고, 또 그에 반대되는 악한 신이 있다. 두 신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애를 쓴다. 때로는 악한 신이 힘을 얻으면 세상은 더 힘들어지게 보여진다. 선한 신이 힘을 얻으면 살기 편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선과 악이라고 불리는 두 힘의 개념은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은 완전한 선이 아니고, 악 또한 완전한 악이 아니다. 악이 악인 것은 선의 편에 있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이 악이라고 정의하는 어떠한 기준도 없다. 즉, 선과 악의 이러한 근거 없는 이원론적 분립은 단지, 내 마음에 드는 축과 그 반대 축의 의미이상은 아닌 것이다. 악을 악이라고 정의할 세 번째 그 선과 악의 판별을 가능하게 할 근원적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선악 이원론적 세계관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결국 이러한 관점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설명해 주는 듯 보이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과는 달리 성경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에서는 악은 선의 변질된 모습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했다. 절대 충성하는 무뇌 로봇을 프로그램하는 대신 - 현재 이러한 일은 인간도 가능하다 - 스스로의 의지로 충성, 혹은 배반까지 할 수 있는 인격체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의지적 존재는 단순히 인간만은 아니었다. 천사들도 자신의 의지로 창조주와의 질서있는 관계를 맺을수 있는 반면, 배반할 수도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과 함께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죄의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완성된 창조세계에 대한 부분이 희석되고 만다.



## 악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 ##


성경은 사들의 타락, 혹은 변질된 천사들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호칭이 사탄, 마귀, 악마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천사들 역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목적에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변질되었을 때, 그들은 어그러진 다른 목적을 스스로 성취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이 만든 완전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한 예로 종종 들려지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은 완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차원의 한계에 갇힌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완전한 세상에 대한 창조와 완성은 아직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리에서 세상의 끝은 완성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것은 현재로 보이는 불안전한 부분이 수정되는 정도가 아닌, 완벽한 것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완성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변질된 악은 비록 그것이 세상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여질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세상의 선의 완벽한 모습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쓰여질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변질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보통 악이라고 하면 선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악, 혹은 죄, 혹은 잘못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완전한 것, 선한 것, 좋은 것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악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은 없다. 이 말은 그 악을 통해 자신에게 어떤 좋은 것, 선한 것이 추구되기 때문에 악하다는 뜻이다. 길거리에 떨어진 지갑을 주워서 단지 선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상금을 받지 않고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길거리를 지나는 행인의 지갑을 빼앗는 사람은 그 돈을 써서 자신의 본능을 만족시킬 좋은 것[그것이 쾌락이라고 할 지라도]을 얻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그 악을 행하게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악을 행하는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 악을 행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 조차도 그 악을 행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얻는 유익[개인의 쾌락]이 있기 때문에 그 악을 행하는 것이다. 개인이 얻는 쾌락은 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한 방법, 정당한 절차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그리고 누려야 할 당연한 즐거움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이 변질된 어떤 것일 때, 그것을 우리는 악, 또는 죄라는 말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자. 성을 통한 쾌락은 인간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정당한 부부관계를 통한 성의 즐거움과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자, 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 길가는 아무 사람이나 폭력을 동원해 자신의 쾌락의 도구로 삼을 때 그것은 악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성이라는 본능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얻고자 하는 변질된 모습을 통해 악이 표출되는 것이다. 선한 것이 있어야 그것이 변질되어 악한 것이 되는 것이지, 선이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가 있을 때 그 진리에 반대되는 비진리가 존재하는 것이지, 진리가 존재한 적이 없는 곳에서 비진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처럼 절대선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로 말미암은 창조, 그리고 여기에서 변질된 세상과 악의 근원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이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세상의 악에 대해서 분명히 심판하는 철저하게 선한 존재인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의미없는 창조를 한 불완전한 신의 모습이 드러날 뿐인 것을 안다. 창조주는 인격을 지닌 존재를 창조하고, 그들이 창조주와 바른 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계를 지녔지만 지성과 이성을 동원하고, 거기에 계시적 메시지를 통한 깨달음을 계속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그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과 그 관계에서 변질되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도 엄청나다는 것을 먼저 밝히는 정도이다.



## 부연과 당부의 글 ##


여기까지 많은 글과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기독교의 핵심에 접근하지는 않았다. 다만 충분히 말해질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이다. 다음번 [기독단상]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말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가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핵심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을 통해 필자가 이해한 바를 드러내는 것으로 일보를 내딛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일보를 통해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기를 바랄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www.godpeople.com/cartoon/?14025 에서 가져왔습니다.


[기독단상] 지금까지 쓴 글들 입니다.

2007/09/04 - [Belief/Talk] - [기독단상] 마음을 추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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