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희년을 선포한 하나님, 자유를 누리는 우리

2007. 10. 23. 01:32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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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6-19]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의 사역으로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은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전에 세례요한과 만나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갈릴리에서 능력을 보이셨고,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말이 나온다. 16절에서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면서 어떤 말씀을 가르치셨는지가 나온다. 아마도 예수의 입에서 맨 처음으로 나온 말은 아니겠지만,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여러 설교 중 맨 처음으로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이 내용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사야61장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가르쳤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1-2]


이사야 61장에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불리는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종의 역할이 드러난다. 여호와의 종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 아름다운 소식, 가난으로 말미암아 삶의 아무런 의욕도 없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포로의 소유권은 이 세상의 주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눈먼자를 다시 보게하고 눌린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역,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그렇게 고대해왔던 메시야의 회복의 사역인 것이다.


그 메시야가 이제 이 세상에 등장했다. 예수는 사람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면서 사역을 시작한다. 나는 바로 그 메시야다!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그 구세주다! 내가 하는 말이 복음이고, 나를 통해서만 너희들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그 죄와 어두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제 내가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번째는 이사야 61:2 에서 말하는 것과 눅 4:19 에서 말하는 내용에 대해 약간은 틀린 것 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우선 이사야에서는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동시에 선포된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은혜의 해만 선포가 된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9]


이 차이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두 곳에서 의미하는 것은 같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을 인용할때는 지금처럼 문자를 그대로 가져다가 한글자도 틀리게 논문을 적듯이 그렇게 인용하지는 않는다. 내용이 충분히 전달 된다면, 그것으로 신약의 구약인용은 충분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에 기록되었다. 문화적이유도 있었겠고, 지금같이 종이가 귀한 시절에 지면을 절약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어쨌건 기본적으로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리고 또 이 구절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미]와 [아직]으로 이해되는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에 이사야서만을 보았던 이들은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한꺼번에 올 것으로 여겼다. 이사야 61장 2절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한다고 말한다. 즉,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구원의 날과 심판의 날이 한꺼번에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은혜의 해, 즉 구원의 날만을 전한 것이다. 아직 보복의 날, 심판의 때는 기다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다가올 것이고, 반드시 닥치게 될 사건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 모든 사람들은 감히 그 얼굴을 들지 못하며 자신의 죄의 부끄러움을 처절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모든 슬픔을 당한 자들은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위로는 사랑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죄와 불의를 끔찍하게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에 의한 심판의 모습으로도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심판의 시간을 겁내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날은 슬픈자를 위로하는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완벽하게 성취되는 날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이 모든 이의 눈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바로 예수의 재림의 때이고, 모든 것은 분명해지는 때이다.


예수는 이 땅에 와서 그 일을 시작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자신이 왜 왔는지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왔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 포로된 자를 자유케하고, 눈먼자를 다시 보게 하며,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그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내가 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일수밖에 없다.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는 회당에서 여러 사람을 모아두고 자신을 신의 대리자도 아닌 하나님으로 소개한 세계 최고의 정신병자요 사기꾼일 수 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자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선택이 주어진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보통 성인이라고 불리워지는 그런 사람의 대열에 끼일수는 없는 존재이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겠다고 단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희년이라는 것을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희년은 7년째의 안식년이 7번지난 바로 다음해를 말한다. 시간적으로는 7년, 14년, 21년, 28년, 35년, 42년, 49년이 안식년이되고, 그 다음 50년째되는 해를 희년이라 하여 보통의 안식년보다 더 큰 의미를 주게된다.


성경에서 희년은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다. 희년이 되면 이전에 팔수밖에 없었던 땅을 되돌려 받게 된다. 희년이 되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남의 집에 팔려서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이 새롭게 자유인이 된다. 자유를 얻고, 그리고 자신들의 기업을 되돌려 받게 되는 해가 바로 희년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지금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년을 선포한다. 예수는 지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 의해 고된 율법의 멍에를 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한다. 지금 예수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권세로 모든 악하고,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고 그리고 거기에 참된 자유를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설교중 처음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리에겐 두가지 선택이 있다. 첫번째로 이 말을 한 이를 정신병동에 가두는 것과 아니면 그의 말을 믿고 나에게 희년의 해방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다. 굳이 그들에게 억지로 믿음을 주입시킬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 분하고 미운마음보다 오히려 안타까움이 먼저든다.
예수를 믿는 자는 자유를 누리는 자다. 예수를 믿는 자는 멀리 보는 자다. 그는 은혜의 해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본 사람이다. 이 말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팔과 다리에 끊지 못할 쇠사슬이라도 걸친 듯이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는 멀리 볼수 있는 시각을 가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고작 70여년의 인생이 인생의 전부인양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지독한 이기심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살아간다. 멀리 본다는 것은 70년의 인생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그 이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이 제한되고 비뚤어진 사회속에서 누군가를 눌러 이기기만을 바라는 왜곡된 성취주의에 물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멀리 보는 시야를 가지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진정한 자유를 누려라. 세상의 매이는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져라. 똑같은 욕을 하지 않으면 왕따를 당할 것 같은가? 함께 모여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할때 거기 끼이지 않으면 뭔가 찜찜한가? 누구나 다 보는 TV드라마를 봐야만하고, 모두가 듣는 음악을 들어야만 하고, 모두가 아는 은어를 사용해야만 하고, 그렇게 사람들의 비위만을 맞추며 사는 70 인생은 이후 영원의 시간속에서 후회할 안타까움이 될수 있다.


진정한 자유자가 되라. 세상의 눈에 속박받지 않으며 오히려 더 먼곳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바라볼 수 있을때 그때 우리는 이 땅에서 희년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묵상] 희년을 선포한 하나님, 자유를 누리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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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 [2007.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