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명 중에 첫째 (2010-03-B)

2010. 3. 13. 23:02Life/Christian

모든 계명 중에 첫째 (2010-03-B)

(막 12:28-34)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 우선순위의 문제로 고민함

서기관 중 한 사람의 관심은 분명했다. 그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관해서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율법사들이 예수께 와서 비난할 꺼리를 찾기 위해 논쟁을 했던 반면 이 한 사람은 자신의 고민거리를 정직하게 가지고 와서 그것을 묻는다.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간다. 많은 정치인들에게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동기나 하고픈 소망은 정당에 소속되는 순간 사라진다. 한 정치인의 색깔은 그가 품고 있는 이상이나 하고픈 열정에 있지 않다. 정치인의 색깔은 그가 속한 정당에 의해 결정된다. 기업에 들어가기 전 사람들은 그 기업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업에 들어가는 순간 많은 이들은 그 입에서 더 이상 건설적인 비판조차도 나오지 못한다.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따르고 거기에 불순응 할 경우 발생될 불이익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처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그의 앞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교회라는 실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서서히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한다. 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너도 아무말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서로에게 행사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이런 교회의 모습이 정말 부패한 로마카톨릭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노력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의 모습인가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로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때때로 그 역겨움에 코를 틀어막게도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전을 크게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일까? 때로는 그 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더 좋은 신앙교육을 위해서, 더 많은 이들과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는 더 큰 건축물과 넓은 장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크게, 더 화려하게 건물을 높이는 것,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겠다는 마음이 주가 되고, 그것을 교회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제대로 돌볼 수 없을 정도의 대형교회가 더 큰 교회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교회는 점차 기업의 모양을 닮아간다. 그리고 더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미 기업들이 버리기로 결정한 그 초대형 공룡의 몸집이 좋다고 닮아가려고 한다.


2. 무엇이 첫째인가?

다시 서기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서기관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 마음속에 담긴 질문을 예수께 가지고 왔다. 당시 서기관들 사이에서 율법에 있는 ‘하라’는 명령 248가지와 ‘하지 말라’는 명령 365가지, 총 613가지 조항 중 더 중하고 큰 것에 대한 논쟁이 많았다. 서기관은 그 중 우선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서기관의 질문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에 따른 예수의 대답은 모든 계명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613가지의 조항의 우선순위를 매기고 싶어 했다.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 그중 더 중요한 것을 지키고자 함이었다. 반면 예수는 그 질문에 대해 모든 율법의 근원적인 정신에 대해 말한다. 율법 중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대신, 모든 율법의 근원적인 정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이 다를 때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그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갇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통합시키지 못한다. 왜 그리스도인은 기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고통받는가? 욥의 고통과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잃고서 여전히 여호와 때문에 기뻐한다는 선지자 하박국의 찬양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슬프거나 혹은 기뻐한다. 슬프면서 동시에 기쁠 수 없는 그런 한계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예수는 이 모든 것이 통합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내려왔다. 그러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이 통합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갈 하나님의 나라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나라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그 마음에 세상의 고통을 보며 슬퍼함이 있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그 두 가지가 충돌되지 않고 하나로 잘 통합된 그런 세상, 그것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세상의 질서 속에서 가지고 있는 율법 중 첫 번째 것을 묻는 서기관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예수의 대답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듯 해보이지만, 질문에서 물었던 것은 하나였기에 이 둘의 우선순위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무시하거나 월등히 탁월한 명령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비중을 가지고 실천해야 하는 율법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의 율법조항을 원하는 질문에 모든 율법이 통합된 대답이 주어졌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왔고, 그 완성은 오늘 우선순위가 정해지지 않은 두 개의 대답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 이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


3. 그의 문제는 무엇이며,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큰 오류를 범한다. 타인의 문제를 아는 듯 쉽게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지진으로 딸을 잃은 한 여인의 통곡하는 절규를 본 적이 있다. 아이티의 지진으로 어린 딸을 잃은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하늘을 원망했다. 하나님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을 반복하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말한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리 스트로벨의 책을 보면 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모습이 나온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증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면서 인간 사회의 수많은 고통들을 내버려 두시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고통중에 내버려 두시는가? 왜 악인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게 두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에 빠져 여러 신학자들을 만나며 그 대답을 듣던 중에 이웃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이웃집에 사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자신이 예전에 실수로 자기 딸 아이를 차에 치어 죽게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주차하는 것을 보아주고 있었고, 차를 후진하던 중 거기에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딸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는 차에 치였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부부는 큰 충격에 쌓였다. 도저히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부부는 오히려 그 슬픔과 고통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정작 문제에 빠진 이들을 보며 그들이 그 문제를 이겨낼 수 없으리라고 말한다. 정작 고통을 당했던 많은 이들이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의 고통을 이유로 들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회피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들을 보며, 그러한 제자를 보며 이런 말은 한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2010.3. GBS 2 단상 - 모든 계명 중에 첫째 (2010-0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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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10.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