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단상] 마음을 추스리며 ...

2007. 9. 4. 14:49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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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단상 - 01



*. 마음을 추스리며...

한참을 글을 쓰다가 글을 지운다. 글을 쓰다보니 또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꼭지가 돌아도 해야 할 말고 때로는 절제해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한번 스스로에게 절제의 미덕이 부족함을 경질하며 글을 쓰게 한다.

우선 이 글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변론이 아님을 밝힌다. 왜? 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어쩌면 이전의 글들에서도 밝히듯 나는 기독교를 변론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 기독교회에 들어와 있는 무신론자들에 대해서 커밍아웃 할 것을 권고하는 사람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인구숫자만 늘려주는 사람을 통계상 기독 인구로 집어넣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실상 이런 사람들만큼 교회에 대해서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낫다.

이제 쓰는 글은 예수를 믿는 다는 전제하에 쓰는 글이 될 것이다. 혹, 아니더라도 예수를 제대로 믿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쓰는 것임을 밝힌다. 당연히 여기엔 무신론자들을 위한 토론의 공간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예의를 갖추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필자 역시 최대의 예의로 응답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 의미전달을 위한 기초작업

우선 우리들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분명한 용어의 정의를 가져야 한다.

A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말은 결혼할 사람에게만 써야 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반면에 B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룻밤 즐기는 육체적 쾌락의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사랑은 정말 귀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상대가 자신이 정의한 용어로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은 서로가 정의한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결혼을 하고 지고지순함을 염두에 둔 정의로서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그저 즐거운 한 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사랑으로 이해한 것이다. 둘은 같은 언어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결국 둘의 말은 한국어와 미국어로 말하는 것 이상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믿음, 기독교, 사랑, 선교, ... 기타 이런 말들을 할때 이 말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을 탈피해야 한다. 그것이 고착화되었으면 더욱 주의해야 한다. 어느틈엔가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혹은 잘못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편할대로 수정된 단어의 정의를 가지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필자 역시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항상 바른 정의를 되새기며 그 바른 정의에 비추어 오용하는 것은 없는지를 항시 살펴야 한다.

물론 이 짧은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낼수도 없다. 또 이곳에서 그렇게 할만큼 필자는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과 꼭 해야 할 것을 하나 하나 부족하더라도 짚어나가기 원한다. 어디까지 할수 있을지 필자도 짐작이 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 하나 짚어가며 최소한 잘못된 것에 속지 않을 수 있을 정도까지는 해내야 하지 않을까고 생각할 따름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