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물고기안에 담긴 정치와 과학

2010. 12. 21. 10:06Eye


[정치와 종교]

초기 기독교는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정치인들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일종의 종교적 제의를 사용한다. 초기 기독교의 태생때 이미 정치권력과 결합된 종교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 부분은 성경을 읽어봐도 드러난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며 받았던 상당수의 어려움은 당시 그 사회에 있던 종교적 지도자들과 그 종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정치인들이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고소당하고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로마의 정치인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예수의 제자들의 삶도 유사했다. 시간이 흘러 기독교는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물론 이때까지 기독교는 여전히 탄압을 받는 종교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정치인들이 다수를 형성한 기독교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국가의 시각이 변화되었음을 드러낸다. 사실 그의 선제 갈레리우스 때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은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시작되었고, 콘스탄티누스를 시점으로 큰 변화가 드러난 것이다.

이때를 정치가 종교에 추파를 던진때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에 대해 비굴해지는 저자세를 취하게 된다. 굳이 종교성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조폭세계에서는 보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정치인들도 매년 본능적으로 높은 사람을 찾아가는  회귀본능을 보인다. 국민들이 다 손가락질을 해도 그 앞에 가서 새해 복 받으라고 큰절하는 대통령후보들을 너무도 쉽게 만나니 말이다. 사람이 힘이되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모인 종교단체를 무시할 미련한 정치인은 없다. 교회에 가서 악수를 하고 절에 가서 합장을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치인이 종교에 추파를 던지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반대로 종교인이 정치에 추파를 던지는 모습도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종교인들에게는 정치에 대한 두가지 관점이 있는 듯 하다. 첫째는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원로종교인들의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이 좌파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판단이 추상적이고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 여긴다. 그러다보니 좌파에 반대하는 우파정권이 나라를 지키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주변환경을 이렇게 만든 모든 것에 작용해 버린 것이다. 성경적 믿음과 현실적 타협을 분간하지 못한채 모든 것을 믿음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에 제대로 된 신학공부를 하지 못한채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시대상황속에서 이렇게 흘러온 것이기도 하다. 둘째는 그들에게 배웠던 이들이 이제는 믿음 자체보다는 현실 정치와 타협할 때 받는 떡고물에 더 마음을 준 것이다. 내가 만났던 정말 나이가 드신 분들은 북한과 전쟁에 대해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반공정신과 그래서 조금이라도 친북의 경향을 보이는 사람과 사상에 대해 가지는 우려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이가 되지 않는 이들의 반공과 친우파성 경향, 친정부적 경향성은 힘있는 자에게 빌붙기 위한 수단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을 가르친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떡고물을 얻는 방법임을 깨닫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마치 종소리만 들리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더 이상 밥을 먹을 시간을 알리는 때가 되면 종이 울린다는 사실을 잊고, 그저 종소리 자체에만 반응하는 학습을 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이 굳이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정치인들은 종교인들의 이러한 반응을 좋아한다. 서로의 힘이 결부될 때 더 많은 통제력을 얻게 된다. 종교인들은 정치인들로부터 현실적 안정감과 그 집단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어서 좋고, 정치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은 지지를 얻고 그것을 힘으로 비축할 수 있게 되어 좋다. 일종의 윈-윈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수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소수의 권리와 행복이 침해당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과는 달리 세상의 돈은 한정되어 있다. 이 한정된 돈은 정치인과 종교인의 결탁으로 말미암아 분배의 비율이 결정된다. 결국 양자는 서로의 집단의 이익을 최고로 하는 선택을 한다. Zero-Sum 게임에서 제외된 소수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채 그저 승자의 아량에 목을 빼고 처분을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혹자는 이걸 "예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소수가 예의를 갖춘다면 먹을것을 얻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그들은 죽어도 마땅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칼은 힘있는 자들이 쥐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래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주장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이루어내지 못한 이상일 뿐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가장 혐오스런 모습을 보이며 정교분리는 말해져왔다. 물론 우리나라는 형식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나라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인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 은밀한 결탁을 이루어낸다. 조찬기도회와 법회 등 많은 종교활동이 정치와 종교가 여전히 부적절한 관계성을 여전히 끝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무현도 검찰과의 팩스라인은 끊었어도 정치인들과의 관계성을 끊지는 못했다.


[정치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과학]

이제 종교만큼이나 크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생겼다. 그건 바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또 다른 종교다. 현대의 종교는 이전의 종교와는 달리 "모든 것을 알수 있다"는 교만한 신을 섬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알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이해할 방법이 있다고 전제한다. 더이상 종교에 맡겼던 신비와 하늘의 뜻은 사라지고,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제사장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 시작한다. 물론 약간의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종종 과학계에서도 어제까지 진리라 여겨지던 것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현미경이 발명되고, 그래서 바이러스가 발견되면서 모든 병의 근원은 바이러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쟁중에 신선한 채소를 먹지못해 누렇게 뜬 병사들에게서 아무리 병의 근원이 되는 바이러스를 찾으려해도 발견할 수 없다. 신선한 채소에만 있는 영양소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하는 병 조차도 바이러스에게서 옮겨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 실수였다. 하지만 과학의 힘은 위대했다. 바다밑은 다니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한달에 걸려 걸어가던 길을 하루만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지구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소리와 얼굴을 바로 보고 들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유토피아라는 말이 테크노피아라는 말로 치환되어 간다. 이제 천국의 이름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과학이라는 종교는 천국이라는 단어를 테크노피아라는 말로 바꿔버렸다.


[로봇물고기]

정치인들은 이런 과학계에 추파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와 달리 과학은 모든 국민이 신봉하는 종교기 때문이다. 불교계를 지지하면 기독교계가 시위를 하고, 기독교계를 지지하면 불교계가 반발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과학을 신봉하면 모두가 박수를 친다. 게다가 과학계는 아직 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과학이라는 종교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신을 신봉할 뿐, 그 신의 신봉을 위해 국가의 연구예산을 더 타내기 위해 추파를 던질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정부는 불교와 기독교 대신 과학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선택했다. 마치 콘스탄티누스가 당시 종교대신 기독교를 선택하듯이... 4대강을 포장하기 위해 로봇물고기를 주문했다. 주문하면 바로 나타나는 것이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이들의 바램이다. 말만하면 석유대신 물로 가는 자동차가 나오리라 생각한다. 주문만하면 커피 내오듯, 강을 헤엄쳐가며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로봇물고기가 나타날 줄 아는 것이다. 아니, 그런 로봇물고기가 안나와도 상관없다. 비슷한 모양만 만들면된다. 중요한 것은 로봇물고기가 무엇을 할줄 아느냐가 아니기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만능의 신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 뿐이다. 그 믿음을 대중이 잃어버리지 않는 한, 로봇물고기는 전지전능한 신의 대리인으로 4대강을 휘젓고 다닐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봉자들의 마음속에서 뿐이지만...


[정치와 과학의 이별]

정교분리를 말했던가? 이제 정치와 과학이 분리되어야할 때도 되었다. 로봇물고기는 과학자들에게 맡겨라. 어디서 007 영화보고 와서 딱정벌레만한 날아다니는 카메라 달린 도청장치를 주문하지마라. 아직 과학의 신은 우리에게 그러한 선물을 허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가만히 과학계의 제사장들의 기도를 듣기만 하라. 언젠가 더 큰 업적이 드러나겠지만 그때까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함부로 과학의 신을 능멸하지 않는 것 뿐이다. 테크노피아라는 말도 쓰지 마라. 그건 과학의 신이 우리에게 주는 천국이 아니다. 모든 기계장치로 덧입혀진 볼품없는 Mechanic-god 의 등장은 mechanic-servant 로 밝혀질 것이다. 정치인은 다루기 쉬운 존재를 원한다.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에 재를 뿌린 예수는 십자가에 달고, 말을 잘 듣는 종교지도자는 대중들 앞에 서게 한다. 돈과 권력의 힘으로 유혹하기 쉽고, 어렵지 않게 협박할 수 있는 과학계의 제사장들은 정치인들의 밥이 된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정교분리만이 아닌 정치와 과학의 결별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참고자료]
http://imnews.imbc.com/weeklyfull/weekly01/2761937_6414.html
시사매거진2580 - 로봇물고기의 굴욕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