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인터넷 문화 만들기 - 악플빼기

2007. 9. 10. 19:55Eye

제목 : 바른 인터넷 문화 만들기
부제 : 악플과 인신 공격 없애기


경찰청의 사이버 테러대응센터라는 곳에 가 보았다. ( http://www.cybercrime.go.kr )

간 이유는 악플, 악플 하는 인터넷의 악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어느 선까지가 표현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너무 방만하게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반성도 포함되어 있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잘못에 동참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편가르기에 치중한 나머지 잘못을 잘못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한쪽 편에 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선과 악의 대응 구도로 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서로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하면 마치 사회에서 도태되는 듯한 그런 상황을 스스로 연출했다. 황우석 논문을 둘러싸고 대중과의 대결구도가 그러했고, 아프간 사태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네티즌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디워를 통해 평론가와 또 다른 네티즌들이 그러했다. 이 외에도 찾고자 하면 더 많은 대결구도가 나올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결구도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리를 매겨가고 있다. 결국 스스로를 전사로 투영하며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전사적 기질을 발휘해야만 하는 자로 스스로를 평가하기에 이르른다. 여기에 인터넷의 발달과 블로그등의 도입, 그리고 기사들에 대한 댓글의 지원은 그러한 이들의 만족감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런 구도속에서 바른 토론문화나 글쓰기등의 정신이 홰손된채 감정적 공격만이 난무하는 공간으로 인터넷 공간이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 분명히 아닌 것 하나 : 양비론

혹시나 하는 우려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필자는 여기서 양비론을 주장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 분명히 대립적인 의견을 분명히 밝혀 무엇인 문제인지를 모두가 알게 하고, 나아가서 그것에 공감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대결구도가 아니라 대화를 통한 대안의 형성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서 어쩌면 어느 한편에 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것은 양비론을 더 멀리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필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어느 한편에 서되, 그래서 분명한 주장을 하되,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다 옳다. 둘다 그르다는 식의 양비론적 접근은 어떤 문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결과와 심화시킨다는 악점이 오히려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양비론은 결국 힘있는 자의 편에 서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은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주장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좋다.


2. 역시 아닌 것 하나 : 인신 공격과 비방

종종 글을 쓰다보면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댓글은 주로 이런 식이다.

공감합니다. VS 너 재수없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댓글은 글쓴이의 주장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감정적으로 호응하는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은 곧 바로 [재수없다]는 식의 감정적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인신 공격은 글의 논리에는 전혀 공격을 하지 못하지만 그 댓글을 보는 다른 이들에게는 동질감을 형성하게 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댓글이 댓글을 낳고, 결국은 기사가 아닌 댓글 자체로 무언가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들까지 있게 된다.

이건 바른 글쓰는 자세가 아니다. 적어도 아무리 댓글 정도의 작은 글이라고는 하지만 그 글은 자신의 인격과 얼굴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써야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인 경우, 그것을 말할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글쓴이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인신공격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이미 자신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상대는 자신의 생각이나 글의 내용이 아닌 인격을 무시하고 공격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글의 내용에 대한 토론이 아닌 역시 편가르기와 비방으로 흐르게 된다.

이것은 단지 비방이다라는 말 정도로 그치기에는 이미 심한 폭력성을 띄게 되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인터넷 댓글의 두려움 때문에 자살까지 했다는 뉴스보도들이 있었다. 그것을 단지 [그들이 연약했기 때문]이라고 폄하한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그 말은 돌려 말하면 대한민국은 감정적으로 연약한 사람은 살만한 곳이 못되는 곳이고, 그것을 바꾸려는 시도조차도 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라로 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감정적 유약함을 인정하더라도 거기에 더해서 그 유약한 감성을 지닌 이들도 호흡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피튀기며 유혈이 낭자한 뒷골목을 보이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3. 해야 할 것 하나 : 분명한 주제

토론을 치열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자도 예상하는 바이고, 그에 따라서 얼마든지 토론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치졸해지는 순간 필자는 거기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동시에 주제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다루고자 하는 순간 필자는 더 이상 거기에 함께 할 마음이 없어진다.
A 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 문제는 시급하고, 때로는 중요하다. 그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을 하다보니 B 라는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B도 급해보인다. 그러다보니 B 라는 주제를 가지고 또 토론이 길어진다. 결국 C, D, E 까지 나왔다. 이대로라면 F, G, 그리고 Z 까지 이후 AA 이후 무한대로 길어지는 토론이 벌어질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토론에서는 그것을 지양해야 한다. 주제를 분명히 하고, 그 주제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물론 A 를 말하기 위해서 B, C 가 이야기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B 와 C 가 주된 주제로 대치되어서는 안된다.

최근 아프간 피랍에 관한 무수한 말과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중, [공격적 선교]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격적 선교]라는 말의 분명한 정의가 아무곳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공격적 선교]라는 말이 없는 말이 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선교학 교재를 살펴본다면 이 말의 정의와 뜻이 나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정의된 단어로서의 [공격적 선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일상화된 언어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공격]과 일부 개신교도들의 6살짜리 아이들에게나 먹힐 함량 미달의 종교적 행태로서의 [선교]를 받아들임으로서 결국은 토론의 기초를 갖지도 못한채 서로간에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격적 선교라 함은 Defence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선교를 의미한다. 즉, Defence 를 변증법에 의지하여 누군가가 자신의 신앙인 기독교를 공격하고자 할때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을 갖추어 혼자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에 반대되는 것은 내가 누리는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 그들에게도 행복을 누릴 기회를 부여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칼을 들고 가서 예수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이나,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니 잘 해보라는 식의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이것을 잘못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 그럴것이 이번에 우연히 처음 공격적 선교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기 때문이다(이에 관해서 더 많은 할 말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싶다. 이 문제로 다시 이 글의 주제가 호도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글을 지속하지 못하기에 결국 문제는 촛점이 없이 이 주제 저 주제를 떠돌아 다니다 결국은 온갖 형태의 루머들로 난무한 쓰레기같은 인터넷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4. 역시 해야 할 것 : 상대의 인격에 대한 존중

필자 역시도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가끔 스스로를 반성하는 부분이 이 부분이기도 하다. 상대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상대의 말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낼수 있다. 때로는 그 부분을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인격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항상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비록 나와 의견이 다르고, 때로는 말이 안통할 것 같은 대상일 지라도 상대방은 인격을 지닌 존재임을 항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해야 할 말의 자리를 가리기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건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이는 없다. 그렇다고 상가집에 가서 상주 앞에 자리 잡고 고인의 잘못을 적은 목록을 들어 하나 하나 짚는 이를 지혜롭다 칭찬하는 이는 없다. 이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장소가 있고, 때로는 그 싸움을 피해야 할 장소도 있다. 적어도 이번 인터넷에서 벌어진 디워논쟁을 보며 안타까웠던 것은 네티즌이라고 불리는 일부의 사람들은 시공간의 제약없는 싸움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평론가의 공간은 분명히 그들의 평론을 올리는 공간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의 평론에 피드백을 위해 댓글을 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그리고 평론가들도 동감할 정도로 [전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디워가 수준이하라고 말했다. 또 많은 블로거들이 디워는 좋다고 평을 했고,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도 좋다는 평을 했다. 그것이 나의 의견과 맞고 그렇지 않고는 둘째고 우선 우리는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예의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 역시 내 생각과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인격체이며 존중해야하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서로간의 다른 생각을 토로하는 것의 치열함을 격감시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격렬한 토론의 와중에도 서로간에 대한 인격이라는 고리의 끈 만큼은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5. 사회적 대응 : 사이버 테러 대응 센터의 글 몇개

Q : 사이버 명예훼손이란 무엇인가요 ?

A : 형법 제307조는 명예훼손에 대한 일반규정으로서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摘示)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를 말하며,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제61조에서는 형법상의 명예훼손죄에 대한 특칙으로 정보통신망에서의 명예훼손 관련 규정을 두고 있으며, 형법이나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 모두 피해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으며 관련 법률에 따라 해당내용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예'외부적 명예, 즉 사람의 인격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말하는 것이며, 명예의 주체에는 자연인, 법인뿐만 아니라, 기타 단체도 포함됩니다. 또한 '공연히'라 함은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훼손'반드시 현실로 명예를 침해함을 요하지 아니하고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위험상태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판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명예의 개념은 사람의 인격에 대해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명성이나 사회적 평가(외적 명예), 사람의 고유한 내면적 인격가치(내적 명예), 자신에 대한 주관적 평가(명예감정)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이버명예훼손의 보호대상은 외적명예를 말합니다.(통설, 대법원판례).
이렇게 자기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 즉 명예의식 또는 명예감정을 침해하는 행위(욕설, 비하하는 내용)는 모욕(侮辱)이라고 하여 별도로 모욕죄로 의율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위와 같은 피해를 당한 경우에는 관련 사이트 관리자에게 접속기록 보존토록 조치하고 관련 게시글이 삭제되기 전에 반드시 화면갈무리하여 증빙자료로 제출하셔야 하며, 특히 게시자에 대한 인증절차 없이 누구나 게시글을 작성할 수 있고 접속기록도 남기지 않는 경우에는 추적수사에 한계가 있습니다.


Q : 누군가가 이메일로 저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나요

A : E-메일을 이용한 협박도 일반적인 협박과 마찬가지로 형법 제283조 협박죄를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으며 피해자의 명시한 의사에 반하여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입니다.
협박죄는 공포심을 일으키게 할 목적으로 해악(害惡)을 가할 것을 통고하는 일체의 행위로서 해악의 통고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상대방에게 알릴 필요가 없고 또한 상대방은 통고자가 누구인지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해악의 내용은 제한된 바가 없으므로
생명·신체·자유·명예·재산, 그 밖의 모든 것이 포함될 수 있고 길흉화복을 통고하는 것은 단순한 미신에 속하므로 협박이 되지 않고 단순한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따라서, 형법상 협박죄의 성립요건과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협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먼저 서비스업체에 연락하여 접속기록 보존유무 확인 후 관련 접속기록 보존 및 관련 E-mail 내용 보존 등 피해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여 가까운 경찰관서 민원실을 방문·상담을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Q : 특정단체에 대해 인터넷 게시판에 비방·허위사실을 유포하면 명예훼손으로 처벌이 가능한가요?

A : 명예훼손죄에 있어서 명예의 주체에는 자연인과 법인이 모두 포함되므로 특정단체에 대한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도 처벌이 가능합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인과 사자(死者)
모든 자연인은 명예의 주체가 됩니다(태아는 제외됩니다) 그리고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죄 성립도 가능한데 형법에서는 제308조에서 ‘사자(死者)의 명예훼손죄’ 규정을 따로 두고 있으며, 위 범죄는 친고죄이므로 ‘사자의 가족 또는 자손’의 고소가 있어야만 합니다.

◦ 법인 기타 단체
법인의 경우에는 설립 후 청산 종료시까지 명예의 주체가 됩니다. 법인격 없는 단체는 통일된 의사를 가지고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명예의 주체가 됩니다 (사교단체, 가족 등은 명예의 주체가 되지 않습니다)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에관한법률 제61조에는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연히 사실 또는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으며 해당내용의 삭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위와 같은 피해를 당한 경우에는 관련 사이트 관리자에게 접속기록 보존토록 조치하고 관련 게시글이 삭제되기 전에 반드시 화면갈무리하여 증빙자료로 제출하셔야 하며 특히 게시자에 대한 인증절차 없이 누구나 게시글을 작성할 수 있고 접속기록도 남기지 않는 경우에는 추적수사에 한계가 있습니다.


6. 사이버공간 문제의 해결 : 실명제?

위에서 사이버 테러 대응을 위한 수사기관이 가진 법 항목의 일부를 본다. 필자가 법에 대해서는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 - 대학 초년시절 법학 개론이 전부다 - 법 항목에 대한 해석이나 의미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만한 능력도 없다. 하지만 위 법 항목들이 아직 사이버 테러에 대응하기에는 미비한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에 해당되는 인력이 태부족이라는 것 역시 법률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이야기되는 점이기도 하다.

인터넷이 실명제가 된다면 어떨까?
필자는 그 생각이 정말 하기 싫다. 실명제가 되면 아마도 악플은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내가 쓰는 글에 달리는 눈쌀 찌푸리는 글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을 가진 소수자들의 인권은 무시될 것이다. 예전이라면 여기 저기 달리는 소수자들의 인권옹호를 위한 글들이 실명제라는 이름하에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공무원 중 그래도 소신을 가진 이들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이들의 글은 더 이상 쓸곳이 없어질 것이다. 내 블로그에 달리는 악플을 없애는 것과 소수자의 인권을 위협하는 실명제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필자는 기꺼이 악플의 홍수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실명제는 답이 아니다!!

적어도 필자는 악플 몇개 달리는 것으로 인생을 최종장을 찍을 만큼 약하지는 않기 때문이고, 오히려 그 악플들을 보며 기꺼이 비웃어 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웃는 다는 말에 마음에 상처 받는 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아마도 필자는 필자의 블로그에 달리는 악플을 스냅샷을 찍어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 개인에 대한 비방 정도라면 기꺼이 그 비방을 가볍게 흘려 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글에 달린 댓글에 필자가 아닌 누군가를 타겟으로 하는 글을 썼다면 가급적 그 글을 지워줄 것을 권면하는 바이다. 그 글은 필자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볼 것이고, 그것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중에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는 빌미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 법 조항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쨌든 법 조항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자신의 글이 문제가 되는 순간, 어쩌면 상당한 불이익을 감당하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의 요청 때문에 필자는 악플들을 지우지도 않았다.


7. 제안 하나 : 상식을 지닌 친구 만들기

하지만 필자 역시 필자의 블로그에 달리는 악플을 싫어한다. 악플이 달리는 것 보다는 비록 필자와 견해가 틀리더라도 좋은 글이 달리기를 원한다. 시비조의 글이나 모독조의 글이 달리는 것 보다는 정갈하게 다듬어진 글을 기대한다. 만약 트랙백으로 필자와 다른 견해의 글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달려 있다면, 필자는 그의 종교와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고 기꺼이 친구로 지낼 것이다. 만약 그가 [기독교인] 친구를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필자가 그에게 기독교로의 개종을 권유할 수도 있다(친구이기에 이런 말도 가능할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가능할 것이고,). 하지만 그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를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택을 내가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사회적인 만행이나 저지르는 악당들(목사들의 불륜과 부정, 단군상 문제, 승려 머리 안수, 기타 등등)이고, 비기독교인은 악플이나 달고 다니는 무개념(유투브 동영상, 탈레반 메일, 비난 일색의 악플, 기타 등등)이라는 식의 대립된 구도속에서 서로를 비난하기에 혈안이 되어 가는 구도속에서 상식이 기초한 다원주의 사회의 구도를 되새김질 해 보는 것은 무리일까? 사실 우리 사회가 이런 양대 구도 속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었지 않나?

아무리해도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단면속에서 부적응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고, 아무리해도 감정에 치우쳐 기사의 댓글에 욕설로 도배하는 인간들이 완전히 사라지리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정당화시켜가며 편싸움하듯이 이끌어가는 모습 또한 이 사회가 지속해서는 안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그것만큼이라도 받아 들여줄 수는 없을까? 어쩌면 이 양자의 모습 또한 기독교와 안티의 모습이라서가 아니라 한국인이기에 가지는 특유의 성질이라고 이해해 볼수는 없는 것일까? (왜 한국기독교인만 그러느냐는 말에는 기독교인이라는 말에 포인트를 줄수도 있지만, 한국이라는 말에 촛점을 맞출수도 있다.)


8. 덧붙여지는 이야기들

주변에 선교사가 되겠다며 열을 내는 사람이 있다. 내가 보기에 이 친구는 선교사가 되면 정말 절에 가서 승려의 머리에 손을 얹을 만한 녀석이다. 그만큼 신앙이 깊어서가 아니라 약간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그래서 이 녀석을 볼때마다 안스럽기도 하다. 무언가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자신이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꾸만 교회에 와서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그래도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어주니 말이다. 그 시도자체는 선하다고 할수 있지만, 정작 이 녀석은 신학교라도 들어가면 정말 문제를 일으킬 것만 같다. 그래서 만날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넌 절대 선교사가 되면 안돼!". 이 녀석은 내게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조금 싫어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만날 때마다 차라리 그 열심을 가지고 소년 소녀 가장을 돕거나 다른 봉사활동을 할것을 종용했다. 이제 이 녀석은 더 이상 선교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행이다. 그가 선교사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제대로 할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다행인 것이다.

즉, 아무리 가르쳐도 산에서 계시받았다며 목회자들의 말 조차도 무시하고 계시받은 신의 말을 따라야만 한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 두 편으로 나뉘어 기독교가 문제라고 지적하기보다는 사회적인, 보다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환경을 둘러싼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는 사회속에 존재한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에 관한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지만(적어도 교회가 지향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타협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교회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 점에는 모든 이들이 동감할 것이다(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비기독교인이 볼때 부정을 저지른 목사가 이상하게 보이는가? 당연하다 기독교인의 눈으로 봐도 그런 부정을 저지른 목사는 더 이상 강대상에서 가르칠 수 없도록 조처하는 것이 당연하다. 목사들의 부정에 관한 많은 기사들은 어디에서 주로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일반 신문들이 아닌 기독교 신문들에서 목사들의 부정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나온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러한 개혁과 부정에 대한 반발은 훨씬 심하게 작용해 왔다. 차이는 기독교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원하는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판결을 기대하기 보다는 교계 내부의 정화운동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적어도 기독교계에서 개혁을 원하는 이들은 헌법적인 최소한의 개혁이 아닌 성경적 기준을 가진 개혁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함을 미덕처럼 말하고 보여주기 시작했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혼전관계나 때로는 배우자 아닌 이와의 동거 정도는 별것이 아닌 것으로 그리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는 간통죄에 대해서도 폐지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한 법조인은 간통죄는 형법상 죄를 물을수 없다며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도 말하고 민법상 책임에 대해서만 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의 말은 100% 다 받는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교회에서 가져야 할 기준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간통죄가 더 이상 형법상의 문제를 갖지 않게 된다면(그렇게 될 날도 멀지 않은 듯 싶다), 목사들의 불륜도 용서될까? 적어도 기독교 신문들과 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전히 물어야 할 책임을 가진 이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9. 결어

쓰다보니 교회이야기가 많아졌다. 내가 기독교인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인터넷에서 워낙에 기독교 이야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은 교회를 옹호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자 쓴 글이다.
필자는 하이텔 이전 케텔때부터 글을 써 왔다. 게시판에 글을 쓰고 글에 대한 답을 올리고, 답에 대한 답을 올리곤 했다. 그때만해도 이렇게 수십 수백개의 댓글을 보지못했다. 한명, 두명, 기껏해서 서너명의 사람들과 글을 써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필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치열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또 많은 책을 읽기도 했다.

지금 필자는 글을 쓰고 난 다음에 달리는 댓글을 보며 예전이 그리워짐을 느낀다. 속도가 전부인 인터넷이 되다보니 커다란 그림은 순식간에 화면을 덮어버리게 되지만, 화면에 채워진 글의 편린은 눈을 통해 사람의 뇌리에 각인되기에 시간이 소요된다.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에 눈에 들어온 단편적인 글의 조각을 보고 글을 판단하고, 그 판단된 것을 통해 짧은 댓글을 쓰거나 어디서 긁어온 또 다른 글을 올린다. 댓글에 올려진 대다수는 필자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음이 보여지고, 또 거기 쓰여진 많은 글은 내 글과 별 상관이 없는 또 다른 B 혹은 C, D 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동시에 거기 달리 많은 욕설과 인신공격, 글과는 상관없는 또 다른 말과 글들... 악플들...

이것이 사이버 수사대에게 글을 쓰는 권리를 그들이 부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토론과 자신의 주장은 분명히 밝히되, 최소한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이는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 인격과의 만남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만남에는 비록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지는 못할지라도 예의라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로서 이 공간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공간이 될 것이고, 때로는 소수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때로는 불의를 드러내는 공간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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