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적절한 균형, 사실을 사실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의 로힌턴 미스트리

2009. 12. 9. 16:31서평/[서평] 인문

처음 책을 손에 들고 그 두꺼운 두께에 질렸다. 소설은 조금 두꺼워도 읽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은 최근 들어서 손에 든 책 중 가장 두꺼웠다. 시리즈물이 아닌 단권의 책으로 이만한 양의 책을 읽어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두꺼운 책을 잘 읽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소설을 그다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좋은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전염시키는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읽은 다음 한동안 열병처럼 계속 꿈속에 나오는 무엇이 있다. 적절한 균형은 지금 내겐 꿈꾸게 하는 주제가 되었다. 이 책에는 지금껏 읽었던 다른 많은 소설들과 구별되는 무엇이 있다. 이 소설은 왠지 소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억지로 희생과 소망과 인내와 존엄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책의 제목에서 보이듯, 그 모든 것은 [균형]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 모든 것은 적절한 균형일까? 그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적절한 균형 상세보기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 아시아 펴냄
『적절한 균형』은 대학에 진학했으나 무리를 지어 괴롭히는 대학 선배들 때문에 기숙사 생활에 회의를...삶을 통해 인도인의 현실을 그려낸 이 작품의 “적절한 균형(A Fine Balance)”이란 절망 속에서도...

책은 우리에게 답을 제시하는 대신 아주 담담하게,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이 그 자리를 사진을 찍어 보이듯 그렇게 독자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거기서 낭만적이 아닌, 마술적이지 않은 현실을 그대로 대면하게 된다.

디나는 친오빠에게 성적인 굴욕감을 당할 때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디나는 균형을 찾는다. 결코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을 선택 당하게 되고 그것을 울면서 따른다. 거기엔 옳기에 긍정하는 어떤 이유가 없다. 단지 그것은 주어진 것을 따라야만 한다는 지금까지 내려져왔던 바로 인도의 정신이었다.

“우리들 모두는 같은 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불가촉천민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방울의 비소가 우유에 독이 되듯이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이 힌두교를 타락시킨다는 간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군중은 간디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아시라프와 둑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따르리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간디의 연설은 그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예쁜 포장지에 불과했다. 간디 역시도 카스트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배반할 수 없었던 ‘균형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간디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1975년에서 1977년까지의 시간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학생 운동가의 의문의 죽음, 지참금 문제로 자살하는 소녀들, 카스트에 항거하는 불가촉천민들, 구걸시키기 위해 아이들에게 장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 밖의 너무나 많으면서도 눈을 돌릴 수 없는 현실이 우리의 눈을 끌게 한다.

인도라는 나라는 서양인들에게 명상과 신비라는 독특한 끌림을 가지게 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지나칠 정도로 희화된다. 포장된다. 그래서 미화된다. 거기에 현실이 빠져버린다. 동양의 신비로운 향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리듬의 음악과 묘한 분위기에 춤 속에서 인도의 오늘이라는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아침에 이슬만 먹고도 수 천 년을 살 수 있는 선인처럼 여겨져 왔다. 이것이 인도를 동경하기를 인도를 바로 볼 수 없는 이들의 시각이다.

또한 인도에 속해있기에 인도를 바로 볼 수 없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인도 안에 있기에 그것을 볼 수 없다. 카스트를, 힌두교를, 불가촉천민을, 테러와 그들이 미워하는 대상을 그들은 바로 보지 못한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디아스포라이기에 인도라는 땅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아니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본 인도, 그가 본 그 땅의 현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을 일부러 아프게, 혹은 감동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한번더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더 아프다.

마지막으로, 이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과 병행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무도 원치 않은 폭력과 살인과 불평등과 박해와 살인과 부패의 근원은 어디일까? 선거에 참여하려 했다는 이유로 불에 타 죽는 불가촉천민들의 가족에게 책임 있는 자는 누구인가? 불길을 부추기는 건조한 바람을 자비로 받아들일 정도의 상황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 자리에서의 균형은 그럴 수 있다. 말을 안 듣는 동생의 옷을 벗기고, 찬 물을 쏟아부으며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처벌이 거기, 그곳에서는 적절한 균형을 지닌 처벌이었다. 카스트라는 계급제도로 질서 잡힌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이 선거를 통해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을 막고, 죽이고, 결코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 거기, 그곳에서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한 밤중에 몰래 과일을 따러 간 곳에서 과일을 따는 대가를 몸으로 지불하는 것이 거기, 그곳에서의 균형이었다. 모든 것은 적절했고, 모든 것은 균형잡혔는데 왜 인도의 모습은 나아보이지 않을까? 책의 표지의 사진처럼 왜 이 모든 것은 긴 장대 끝에 올라있는 한 어린 아이의 위태로운 모습처럼 보일까? 이 균형은 과연 온전한 균형일까?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그런 균형의 끝이 아니었을까?

이 균형을 자랑하고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차라리 무너뜨리고 다시 기초부터 다지는 것이 옳은가? 너무 많은 것이 걸려있기에 우리는 겁이 나서 유지하기 위해 겁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T.S. 엘리엇은 “우리는 너무 많은 진실을 견디어 낼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지금, 여기서만 무너지지 않기를 소망하며 그 장대위의 소녀에게 더 큰 짐을 지우는 서커스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평] 적절한 균형, 사실을 사실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의 로힌턴 미스트리
http://jeliclelim.tistory.com/366
JelicleLim(2009.12.9.)

P.S.1. 많은 서평에서 Fine Balance 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혹은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책을 발로(?) 읽은 사람들이다. 적절한 균형이란 말은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표현으로 쓰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