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지성에서 영성으로 -2] 고뇌하는 선지자의 각성

2010. 4. 10. 22:24서평/[서평] 기독교

천천히 읽었다. 나는 사고를 당해서 병원 침대에 꼭 붙어있어야만 하는 처지였고, 또 이어령이라는 사람을 나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조금은 읽었지만, 그를 안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 그러기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편견과 섭입관이 내게도 자리하고 있었다. 결코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으리라 여겨졌었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성경을 하나의 문헌, 그 이상으로 보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상당수의 인문학자들은 목사들보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 언어학적인 부분과 역사적 배경,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인문학자들의 지적은 상당히 날카롭다. 이어령씨 역시 그런 날카로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성경에 대한 내용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성경은 고대 여러 문헌중의 하나였고, 그러기에 그의 지성은 오히려 성경을 통해 말하시는 하나님을 알수 없게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딸, 민아가 있었고, 그 딸로 인해 그의 영혼의 갈증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의 고백처럼 그의 심각했던 저항은 결국 좋아하기에,아니 떠날 수 없기에 까탈을 부렸던 그래서 이제 그 앞에 와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아이같은 연약한 무신론자의 기도와 같은 것이었다.

책은 그의 일상을 하나씩 들추어내며 그의 지성이 포기되지 않으면서도 지성을 뛰어넘는 영성의 영역을 조금씩 비추어준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영성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 문지방의 단계에 와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되는 것은 자신의 영성을 강조하는 그 어느 목사들 보다도 그의 영성은 문지방을 더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할수 있는 것과 할수 없는 것, 알수 있는 것과 알수 없는 것, 그 사이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갈등을 해왔던 그이기에 자신의 지성을 뛰어넘고자하는 그의 모습은 더 체감적으로 다가온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상세보기
이어령 지음 | 열림원 펴냄
사랑하는 내 딸아, 너의 기도가 높은 문지방을 넘게 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은 시대의 지성 이어령이 전하는...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 하고 지성에서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1.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쓰레기가 쌓여가는 내 방을 빛과 향기를 채우기 위해서. (p.25)


그의 영성을 향한 여정을 보자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구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속에서 나은 무엇을 얻기위한 종교적 술수대신,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어깨에 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자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어느새 가득찬 방을 보며 그 방을 또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대신 비우기위해 그는 영원의 갈구를 하고 있었다.

2.

메멘토 Memento 는 라틴말로 기억하다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리 Mori 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은 죽음을 생각하라 죽는다는 걸 생각하며 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혼자서 대낮 보리밭 길을 굴렁쇠를 굴리며 지나가다가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싸운 것도 아니고 돌부리에 채인 것도 아닙니다. 귀가 멍멍하도록 고요한 대낮, 새하얀 햇빛 한 복판에 서서 아무 이유 없이 뺨을 타고 내리던 눈물방울을 느꼈지요. (p.35)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말끝마다 좋아죽겠다고 하고 슬퍼죽겠다고 하고 우스워죽겠다고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파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에는 배불러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었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라는 것을 알았지요.
살기죽기라고 하지 않고 죽기살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To be or not to be 햄릿 대사도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라고 번역하는 사람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한국인이야말로 메멘토 모리의 철학적 종교적 민족이 아니겠는가.
다만 라틴어로 말하면 의미 심각한 철학적 말이요 종교적 잠언으로 들리고 한국말로 좋아죽겠다고 하면 속된 생각, 부정적 의미로 생각해 온 것이 우리의 과오였던 것이지요.
...감동적인 순간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순간. 한숫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인다 죽여준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때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짜리의 종교적 충동을(p.37)



메멘토 모리, 그 철학적 단어를 한민족의 시장언어속에서 찾아내고 모두가 꺼려왔던 그 말을 한국의 종교성으로 설명하는 그의 설명에 무릎을 치게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죽는다, 죽겠다는 말은 단순히 써서 안되는, 저잣거리에서나 사용되어야 할 듣기 싫은 말이 아닌 한국인의 종교성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여섯살, 대낮에 굴렁쇠를 굴리다 멈춰서서 눈물을 흘렸던 자신의 경험을 죽겠다는 말이 풍부했던 한국말의 종교적 영향으로 해석하는 그의 글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영성에 발을 들이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 한국말에 있는 죽겠다 즉 메멘토 모리의 철학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3.

...아버지가 기도를 하실 때면 사람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지만 나는 그 기도를 들으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기도는 언제나 우리와 가장 먼 나라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셨던 것이지요. 신문이나 방송에서 들으신 외신 뉴스가운데 보스니아처럼 전쟁을 하거나 아프리카처럼 기근으로 굶어죽어가는 어린이들이나 우리는 관심조차 갖지 않은 지역에서 일어난 태풍이나 홍수로 가족을 잃은 난민들을 보살펴 주시라는 기도였던 것이지요.
그 긴 기도의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국과 우리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셨는데 그것도 아주 작고 멋쩍은 소리로 혹시 남은 복이 있으시면 우리 식구들, 어린 손자들에게도 좀 나눠 줍시사라고 끝을 맺으십니다.(p.41)


딸 민아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어리숙하지만 정도를 지킨 기도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바른 영성에 대해 단초를 제공했을 것이다. 종종 우리는 나와 그리고 나와 관련된 이들을 위한 기도에 열을 낸다.특히, 목사는 더욱 그렇다. 저 먼곳의 전쟁소식이나, 기근의 피폐함보다는 당장 시험을 앞둔 성도의 자식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수험생을 위한 특별 작정 새벽 기도회는 넘쳐나지만, 보스니아 사태에 관해서, 아프간의 여성들에 대해서, 지진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해서는 단회성 헌금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기도제목으로 삼고 특별 기도회를 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교회는 폐쇄적인 사교집단화 되어왔고 그 위험에 대해 모두는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수능철이 되면 자기 자식들을 위한 특별 새벽기도의 플랭카드가 넘쳐나는 한국에서 그 옛날 멋쩍은 아버지의 기도를 떠올린 이어령은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잊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4.

딸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기적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셔도 언젠가는 누구나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진짜 기적은 단 하나, 부활과 영원한 생명입니다.(p.151)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p.152)


영성을 위해 지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넘어서는 영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종종 영성을 지성과 이성에 관계없는 신비체험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건 영성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때로는 신비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방식을 따라 유사 체험을 얻으려 노력한다. 그것도 의미없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모두에게 달리 나타난다. 그것은 심지어 지성으로 가득 차 도저히 영적인 체험과는 멀게 느껴지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그러기에 그 영성은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골방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이다. 딸의 눈을 고친 것과 완쾌될 수 없는 암을 낫게 한 것도, 또 ADHD로 도저히 학습불능이었던 아이가 낫게 된 것도 이어령의 믿음을 돕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의 기도 속에서, 고통중에 있는 딸이 신앙으로 웃는것을 보며, 어린 시절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의 눈물을 기억해 낸 것이다. 진정한 기적은 암이 나은 것이 아니라, 눈이 뜬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그의 고백은 장사치로 전락해가는 교회에 가슴 아픈 깨우침을 준다.


5.

요즘 이솝우화는 이렇습니다. 목마른 여우가 포도를 따먹다보니 진짜 신포도였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안 따먹어야 되는데, 옆에 있는 여우들이 부러워하고 침을 흘리니까 우쭐해서 신포도라고 말을 못하는 겁니다. 아, 달다고 하고, 옆에서 박수치면 또 따먹고... 속으로는 울면서도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고 따먹어요.
교회 바깥에 나가보면 이런 여우들이 많습니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기름진 얼굴을 하고, 행복한 가정인 것처럼 하고 있는데, 속으로 울고 있어요. 그 사장 자리가, 그 장관 자리가, 세상이 이런 줄 알았으면 누가 했겠냐. 그런데 아무개 아들이 회장, 장관 아들이라 그러니까 참는거죠. 그렇게 계속 맛있는 것처럼신포도를 따먹고 속은 위궤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 현대인의 이솝 우화지요.(p.236)


현대인의 이솝우화, 현대인은 지성도 영성도 안닌 습성의 덫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다 가는 길이기에 그리 간다. 누구나 다 부러워 하는 길이기에 벗어나지도 못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모두가 실패라고 부르기에 사람들은 속을 상하게 하는 신포도를 먹으면서 중단하지 못한다. 거기서 단절을 경험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신앙이라는 첫번째 문턱을 넘는 것이리라, 지성을 넘어 영성을 바라 보아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습성의 덫조차 벗어나지 못했다면, 정말 위궤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서평: 지성에서 영성으로] 고뇌하는 선지자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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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1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