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족으로서의 한 마리 양 (마18:10-20)

2012. 2. 4. 13:03Life/Christian

Abstract : 한마리 양의 중요함을 말한다. 생명과 대체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그 생명을 살리는 것만큼 가치있는 것도 없으며 그만큼 기쁜 것도 없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10-20)

1.
(칼럼으로 대체)
[칼럼] 한마리 양, 밀양 노인네, 여성비하

2.
본문에서 잃어버린다는 것은 망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고, 개역개정에서는 ‘잃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곧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어렵게 설명하기보다는 조금 쉽게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뜻이 정하고, 반드시 하시겠다고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 그런데,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자신이 반드시 하겠다는 표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찌될까? 어쩌면 이 영역에서 인간의 자유의지,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지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꺽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양이 돌아오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사실 본문에서 목자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목자가 양을 찾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긴하다. 하지만 이전에 본 구절들에서 실족케 하는 일을 한 사람을 언급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지는게 낫다고까지 한 사람, 그는 작은자를 실족케 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거나 아니면 아흔 아홉 마리를 위해 한 마리 양을 기꺼이 버린 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양이 길을 잃은 것은 단순하게도 가서 찾아오면 끝이지만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는 그보다 복잡해진다. 본문에서는 바로 죄의 문제를 언급한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7:18)’ 한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죄를 지은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온다. 이 두 사람이 등장인물이며 주인공이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서 단 둘이 이야기를 한다. 만약 죄를 지은 사람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둘은 다시 형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첫째,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말 할 것, 그 말은 용서를 담고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를 빌 방법이 없을테니까. 둘째,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말뿐인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까지도 이야기가 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그 둘은 다시 한 공동체 안에서 가족이 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문제는 복잡해지고, 최악의 경우 그 죄를 지은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서 출교명령을 받게 된다. 더 이상 그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게 된다. 나는 이것이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죄를 지은 사람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 용서의 마음을 품고 다시 찾아가서 말하고, 또 다시 몇 명이 찾아가서 말하고, 그래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인정하고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노력한 것을 하나님도 인정하시겠다는 것이 아마도 18절에 나오는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말의 뜻이 아닐까?

3.
그러기에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중요하다. 19절에 나오는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최소단위라고 보통 해석된다. 하지만 조금은 특별하게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을 의미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19)’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종종 ‘무슨 일’을 아무런 제한 조건이 없는 일로 보려고 들 한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돈이 필요하거나 기타 등등 성공을 위한 제한 없는 간구로 종종 착각하게 된다. 두 사람이 모여서 돈을 벌기 위해 기도하는 것도 위 구절에 맞는걸까? 두 사람을 한 사람과 그에게 죄를 지은 또 다른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그 두 사람이 합심해서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이 더 큰 돈을 벌기 원할까? 조금 이해하기 쉽게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부모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자식을 고아원에 버렸다. 그리고 그 일을 잊지 못하고 나중에 다시 자식을 찾아다니다 간신히 만난다. 어찌어찌해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간신히 마음이 전달되었다. 자식은 이제 부모를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때 그 둘 사이에 합심하여 구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일까? 로또 1등 같은 행운을 구할까? 아니다. 주는 쪽, 하나님편에서는 제한없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만 받는 쪽에서는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하게 된다. 그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랑, 그를 용서하고 다시 예전처럼 가족으로 편안히 대할 수 있는 사랑,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사랑, 그런 사랑을 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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