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 를 보고

2009. 9. 23. 19:31Life


이제 슬슬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비교하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고 남겨진 시간을 아까와해야 할 때가 된듯하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그렇고 그렇게 지나간 평범한 하루, 24시간이었다.

바쁘게 해야 하는 일들과 남겨진 숙제들, 그리고 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주변사람들의 크지 않은 기대와 그 속에서 여전히 남겨진 작은 시간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낸다. 나는 내 시간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지만 또 내 시간을 나를 위해 제대로 투자하지도 못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개인적, 이기적 쾌락을 위해 쓰지도 않는다. 거기에 나의 문제가 있다.

어제 큰 마음을 먹고 영화를 한편 봤다. 물론 공짜로... 핸드폰 요금제 중에 한달에 영화를 한편 볼수 있는 것이 있어 이걸 사용해보았다. 영화 제목은 마이시스터즈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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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소설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충분히 괜찮은 영화다. 아주 흥미있는 주제를 던지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바로 나는 내 언니를 치료하기 위해 맞춤형 인간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백혈병(혈액암으로 특정한 병명보다는 이 말이 정확하지는 않아도 쉽게 이해될 듯 하다)에 걸린 언니를 살리기 위해 부부는 다른 아이를 계획한다. 그 아이는 정상적인, 아니 일반적이지 않은 시험관아이로 태어난다. 태어나기전부터 아이는 언니에게 필요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지 먼저 검사받으며 그 요건을 충족되도록 맞춤형으로 태어난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언니를 위해 피를 뽑고, 골수를 뽑고, 줄기세포를 뽑고, 그것들이 몸에서 잘 성장하도록 촉진제 주사와 약을 먹으며 자란다. 아이는 어느날 변호사를 고용하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고소한다. 자기 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다.

아프면서 자기의 병이 가족 전체를 고통스럽게하고 가족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천성은 밝고 활발한 언니, 언니를 사랑하지만 고통스러운 치료와 강요된 장기기증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 여동생, 관심받아야 할 나이에 관심받지 못해서 난독증에 걸려버린 아들, 변호사직을 내려놓고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 가정적이면서 용감한 소방수 아빠, 한 가정의 모습이다. 여기서 딸이 자신의 몸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소송이 들어가면서 모든 것은 숨가쁘게 흘러간다.

영화는 등장인물 하나 하나의 시각과 말을 전달하기위해 노력한다. 이제껃 카메룬디아즈가 나왔던 영화를 모두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는 그 영화들과 전혀 다른 차원의 영화가 된다. 영화는 차분히 하나하나의 말을 모두 실으려한다. 그래서 따분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이미 초두에 던져둔 폭탄은 2시간 정도의 효력은 충분히 발휘한다. 2시간 동안 관객은 그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으려 한다. 왜? 동생은 언니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엄마가 지금까지 한 것은 무엇이지? 왜? 지금 병든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왜? 아빠는 무얼하고 있는거지?

영화의 결말은 소설과 달랐다. 그래서 그 결말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직접 읽거나 보는 것을 강력히 권한다. 물론 여기 조금 쓸것이다. 이 글 이후는 영화나 소설의 내용이 포함된다.

영화는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처음 기대감과 두근거리는 심정을 품었던 것이 급작스레 식는 것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지금 뭐하는거야? 나 가지고 논거야? 하는 마음마저 들게한다.

씨네21 에 20평을 쓴 황진미라는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윤리적 화두를 던져놓고 눈물로 봉합하네'라는 말로 평했다. 어떤 많은 글과 사진보다 이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어쩌면 대중적인 영화의 속성상 윤리적 화두를 더 깊이 건드리는 것 보다는 눈물로 아름답게 맺는것이 훨씬 나은 흥행의 조건이 되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겠지만 이런 화두를 꺼내놓고는 서둘러 눈물로 끝맺음하는 것을 보면 나같은 인간의 다분히 본전 생각이 나게 된다. 들어간 돈, 콜라값, 차비, 그리고 내 아까운 시간....
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별 상세보기
조디 피콜트 지음 | 이레 펴냄
중요한 윤리적 논쟁들을 제기하는 조디 피콜트의 소설『마이 시스터즈 키퍼: 쌍둥이별』. 백혈병에 걸린 언니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소녀 안나가 자신의 권리와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장기 기증,...

소설은 오히려 영화와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소설을 그대로 따라서 만드는 것도 원작에 충실할 수는 있겠지만 글로 된 것과 영상으로 된 것의 차이는 스토리와 플롯,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원작에 충실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원작의 스토리를 버리고 대신 선택한 신파조의 결론은 원작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했고 중요한 문제를 오히려 더 깊은 안개속에 잠기게 하고 말았다.

꼭 그래야 했을까, 그러지 않고 조금 더 이 문제를 들춰낼 수는 없었을까? 많은 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눈물과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까지 이런식으로 적당히 덮어서 희석시켰어야 했을까. 아직도 난 그 점에 석연치 않다.

영화와 소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그것을 읽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사고에 있다.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불쌍한 가족 구성원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어쨌거나 좋은 일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뜻을 점철시키기 위해 노력해도 괜찮은가? 또 스스로에게 물을수도 있겠다. 과연 나는 나의 행복과 이웃의 생명 중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혹시나 동생에게 이기적이라며 눈쌀을 찌푸릴지도 모를 이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두고 싶다. 어린아이들이 살기위해 돌맹이를 부수고, 살기위해 나무를 지어나른다. 살기위해 쓰레기장을 뒤지고, 살기위해 노역을 자처하다 손이 잘리고 더이상 걷지 못하게 된다. 하지는 나는 조금 더 맛있는 밥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친구들과 누가 쏠것인지를 내기한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내 언니의 불행에 대해 자신의 몸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녀와 인류의 불행에 대해 눈감고 자신의 이기적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고민은 같은 무게를 가지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소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비록 소설 속 원작 속 소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소녀의 손을 들어주는 하나이고 싶다. 물론 소녀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언니를 살리는 길을 걸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소녀가 선택할 길이다.



[영화] '마이 시스터즈 키퍼' 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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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09.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