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길과 발코니 (2012.01.15)

2012. 1. 14. 16:21Life/Christian

앨리스터 맥그레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책은 일반인들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여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복잡하고 어려운 용어와 수사로 가득찬 다른 어떤 책보다 알찼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학사상을 쉽게 풀어 써 준 책이었다. 그래서 그 책을 통해 앨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쉽게 말하고, 쉽게 쓰지만 중요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최근에 그의 책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라는 책을 손에 들었다. 책의 뒷장에 이렇게 쓰여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우리에게서 고난을 거두지 못하실까?"
그러나 기독교는 고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에 정면으로 맞선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께서 직접 고난을 당하셨다. 이 놀라운 진술을 시작으로, 신비한 고난의 패러독스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과연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셨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몇권의 책을 읽고, 몇분의 사색에 잠겨 보았지만 아직 그 대답을 분명히 찾지 못한 나로서는 맥그래스가 이 책을 통해 내게 답을 주었으면 좋겠다. 왜 용산에서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는지, 왜 한 가정의 가장들이 목숨을 끊는지, 왜 학생들이 자살을 하는지 그에 대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참으로 어렵다. C.S.루이스도 고난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그 스스로도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겠노라 고백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책의 서두에는 답을 제시하는 대신 맥그레스는 발코니와 길에 대해서 읽었던 책을 말한다. 발코니는 구경하는 곳이고 관찰하는 곳이라면 길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발코니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있다면 길에는 참여자들로 북적댄다. 진리는 길에서 시작된다. 기독교 신앙이 진정 있어야 할 자리는 길이다. 길 위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직면하며, 실제적인 문제로 고민한다.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은 저 모퉁이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다. 어둠속에서 혼자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반면 발코니에는 그러한 현실감은 없다. 두려움도 없다. 그저 멀리서 관찰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발코니의 관점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필요하다. 아주 중요하다. 항해를 떠나는 배에 지도가 필요하듯 발코니에 펼쳐진 사색과 논쟁의 테이블은 우리에게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하지만 그 지도에는 고난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무심한 발코니의 관점은 종종 길위의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거인의 어깨에 앉은 난쟁이, 그것이 발코니를 설명해준다. 발코니에 있는 사람은 길위에 있는 사람들의 고난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발코니에서 내려와 길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시작한다면 그는 길위에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수도 있다.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발코니통신은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많은 교회들은 복음을 말한다. 발코니 위에서 저 멀리 있는 희망의 나라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길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들이 길 위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고,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난에 신경조차 쓰지 않기 때문이고, 단지 자신들만의 리그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길 위로 내려서지 않기에 보이는 그곳에 가지 않는다. 길 위에 있는 이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기에 고난의 크레타 미궁을 방황하게 된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 를 질문하지 않는다. 고통을 주고 잊어버린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제 발코니는 게토가 된다.

한국교회는 발코니에서 바른 논쟁을 하는 대신 어이없는 기득권 싸움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길위에 있는 이들이 이제 발코니에 있는 이들을 가르친다. 그따위로 살면서 교회라고 하다니, 그따위로 말하면서 목사라고 하다니... 쯧쯧...

고난의 끝을 본 사람이 다시 길로 나설때가 되었다. 머리속에 기억한 발코니의 풍경을 기억하며 그것을 지도로 삼아 이제 길 위에서 현장에 속한 고난을 함께 경험해야 할 때다. 교회는 낮아져야하고, 그래서 길 위에서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이 피할수 없는 것이며, 고난의 끝은 추억이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