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물고기 153마리에 대한 소고

2011. 12. 28. 23:07Life/Christian


: 기호론에 입각한 암호풀이식 성경해석의 문제, 대안으로서의 내러티브

어떤 청년에게 질문을 받았다. 아마도 153 에 크게 은혜(?)를 받은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모양이다. 153 에 대한 해석이 예전에 내가 했던 설교와 딴판이었으니 의아하기도 했을거다. 혹시나 필요로 하는 다른 분들이 있을까하여 블로그에 전문을 싣는다.

153이란 숫자는 볼펜에 붙여진 이름으로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하기 좋아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볼펜에 붙은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신앙적 이유든 혹은 다른 이유든 사실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153 이라는 숫자를 마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때 사용하듯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일부 목회자들에게는 모나미볼펜에 153이라는 숫자를 붙여준 그의 신앙적 모범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때로는 좋은 것을 주어도 변질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지, 변질될 것을 우려해 좋은 것을 아예 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낙원에 주어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와 같이 말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153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경을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대신 마치 전쟁터에서 쪽지에 쓰여진 암호문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단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단의 전후 관계를 살핀다. 그 글이 쓰여진 시간과 문화적 배경도 살핀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오빠는 바보야."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정말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연인 사이에서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투정인지는 그 문장 하나만으로 알아낼 수 없다. 다시말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의 전후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굳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굳이 국문학이나 문학, 언어학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 더해서 그 글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과 지금과는 다른 관점들을 알기 위해서이고, 성경에 쓰여진 언어와 그 언어에 더해진 의미와 상징에 대해서 알기 위함이 기본적인 것이다.

153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구아닌 연구가 있어왔다.

1. 알렉산드리아의 "퀼리로스(Cyril) (혹은 시릴)"는 153이라는 숫자는 세 가지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Cyril은 10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말하고, 목자의 완전한 양떼의 숫자, 씨앗의 완전한 열매도 100이라고 했다. Cyril에 의하면 100이라는 숫자는 장차 이방인들이 가득 차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50이라는 숫자는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을 말한다. 3이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를 나타낸다.

2. 게바(베드로)의 알파벳을 숫자로 계산하면 153이 된다. 튜빙겐학파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3. 또 하나는 자연계의 물고기의 종류가 153가지 이므로 잡힌 물고기 153마리는 세상 모든 종족을 의미한다고 제롬이 말했다.

4. 어거스틴(Augustine)은 "10은 율법의 숫자이다. 10계명이기 때문이다. 7은 은혜의 숫자이다. 성령의 은사가 7배이기 때문이다. 7+10=17이다. 그리고 153은 1에서 17까지 더한 수의 합계(=1+2+3+...+17)이다. 그러므로 153은 율법과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모든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 외에도 여러 주장들이 있겠지만 위의 주장들이 과연 타당성이 있고 납득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을 가져보아야 한다. (참고, 위의 설에 대해서는 자세히 찾아본 것이 아니므로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성경은 암호로 가득한 책인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그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수수께기 같은 퍼즐을 풀어내야만 하는 책인가?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쉽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 153과 같은 암호를 사용해서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늘의 뜻을 알도록 하셨는가?

초창기의 신학이 중세기를 지나면서 신학은 오히려 일반사람들과 동떨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채 멍청히 시간만 보내고는 자신의 신앙적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죄부나 사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독이 필요한 암호문을 던져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우리가 알아들을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해 주셨다. 하늘의 방언이 아닌 인간의 언어로 말이다.

그것이 내러티브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속에 들어와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가 하늘의 창고에 들어가 숨겨진 이상한 주문이 적힌 책을 훔쳐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친히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인간의 문화속에서, 인간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왜 수수께끼로 받아들이는가?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의 부활이 기록된다. 베드로는 비어있는 무덤을 보았고(20:6), 그 후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20:19).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는 기뻐했다(20:20).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도마 뿐이었다(20:24).

그리고 21장의 사건이 기록된다. 21장에 기록된 사건은 앞에 기록된 사건과 관련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로 해석해야 하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물고기 153 마리에 집중해서 내러티브를 놓치고, 이야기의 흐름조차 놓쳐버려서는 곤란하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은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날이 새어갈 무렵, 배에서 멀리 떨어진 뭍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말한다. 고기를 잡았느냐고. 그들은 고기를 못잡았다고 대답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멀어서 그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물을 던졌다. 고기가 잡혔다. 많은 고기가 그물에 걸렸다. 어디선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사건이다. 맞다. 요한은 깨닫는다. 아, 예전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날 때 그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을(눅5:6).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에게 말한다. 주님이라고...

베드로는 기쁜마음에 배가 뭍에 닿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 내린다. 아니 어쩌면 배는 아직도 많은 물고기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건져 올려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물에 가득 든 물고기 153마리, 그리고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이 신기한 일이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다. 거기에 굳이 그 이상의 신비를 첨부하지 않아도 이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신기한 일이다. 그물에 담긴 153마리의 물고기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물고기에 대해서 굳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 물고기들이 "서로 다른"물고기라고 언급하지도 않는다. 디베랴 바다에 사는 물고기 종류를 언급하지도 않고, 전 세계 어종의 숫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요한은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에 대해서 말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질문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 요한은 이것이 부활 후 세번째로 제자들 앞에 나타난 사건이라고 기록한다(21:14). 그 사이에 있는 길지 않은 공백의 시간, 부활한 주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기뻤지만 그 기쁨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만나고자 갈망하고 있었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직 배가 뭍에 닿지도 않았는데 물에 뛰어드는 그 성급함 속에서 잘 드러난다. 수영을 해야 하는데 벗은 몸에 주님을 볼수는 없어 겉옷만 걸치고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과연 제대로 수영을 하기나 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많은 물고기로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두고 혼자 헤엄쳐 주님을 만나러 갔다. 정작 주님은 보고 그 다음에 아마도 베드로는 아차했던것 같다. 많은 물고기때문에 고생하는 동료를 그냥 두고 혼자서 헤엄쳐 왔으니... 배는 고기를 싣지 못한채 그물에 담긴 고기를 그대로 끌고 뭍으로 왔다. 미안해진 베드로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슬슬 배에 돌아가 아직 물속에 있는 그물과 거기 담긴 고기들을 뭍으로 꺼내는 일을 도왔던 것 같다(20:11). 물론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위해 기꺼이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보내셨다(21:10).

조금 다르게 볼수도 있다. 물에 뛰어든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헤엄을 쳐가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배를 빨리 뭍에 대기 위해 물에 뛰어들어 배를 끌고 가려는 모습일 수도 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만났다. 생선을 가져오라는 스승의 말에 가장 먼저 달려가 그물에 담긴 생선을 꺼냈다.

어쨌건 이 모든 것은 예수의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알려준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 바로 조금 전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뛰어들었던 베드로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있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5)". 방금 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는 대답이다. 그런데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세번째 반복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 질문이 심상치 않은 질문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21:17)". 그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로는 근심했고, 그 베드로의 근심의 이유는 예수의 질문에 담긴 무게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는 베드로에게 어떻게 베드로가 죽을 것인지를 말한다. 기쁘고, 장난스럽고, 즐거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만남이었고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거기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숫자나 상징으로 숨겨진 암호를 풀겠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면 정작 우리의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쓰여졌다.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어린아이라도 알수 있지만, 어른이라도 속을 수 있다. 성경은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쉬운 논리로, 가장 평이한 일상의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자에게 성경은 하늘의 비밀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서 알려준다. 성경은 암호가 아니다. 쉽게 풀어서 쓴 이야기다.

153 마리의 물고기를 말할때 성경에서 사용된 한 단어가 ιχθυs(익두스)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기호이자 암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153 과 ιχθυs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시릴이나 튀빙겐, 제롬, 어거스틴 등이 말한 것들은 일종의 성경신학적 해석으로서의 가치보다는 교회사적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다. 그것을 현대로 가져와 마치 그러한 기호론(기호학)에 입각한 해석이 정해인양 이야기되어서는 안된다. (꼭 공부하랄 때 공부안하고 나중에 이상한 주석책 보면서 이런거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볼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틀림없이 나온다. 영어로 된 소설책을 읽어도 사전을 몇번씩 찾아봐야 한다. 수능준비를 한다면 지문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뒤적이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성경사전, 기왕이면 제대로 된 것으로 하나나 둘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 성경사전을 몇번만 들추어보고, 최소한의 상식적인 맥락으로 이해를 하려는 수고를 한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중세시절, 라틴어를 쓰는 성직자에게 모든 권위를 위임하는 어리석음을 이미 벗어버릴수 있는 환경은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물고기 153마리에 대한 소고
: 기호론에 입각한 암호풀이식 성경해석의 문제, 대안으로서의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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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 (201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