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조건 (2) - 이국운

2008. 6. 20. 19:57Life

공존의 의미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셨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과연 무엇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분을 찬미하게 했을까요? 그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런 상황에서도 찬미하려고 하셨을까요?

우리의 찬양이 4박자의 춤이 된다고 하여도 그것이 단지 껍데기로만 우리의 찬양이 구색을 맞추게 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찬양은 무엇인가? 왜 우리가 찬양을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직면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찬양은 무엇이며 찬양을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을 인정하고 그를 높여드리며 우리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어떠하심과 그 능력의 어떠하심을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찬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좋은 곡에 맞춘 건전한 노래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의 우리와 같이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분이 영광을 얻으심이 당연할 만큼의 그가 당한 능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몫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찬양을 해야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찬양해야 할 주체로 지음을 입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찬양은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찬양하셨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통하여 우리에게 찬양을 가르쳐 주십니까?

예수께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주시려고 우리와 함께 되셔서 우리에게 참된 우리의 존재 형태인 찬양하는 모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르셨습니다. 영문 밖에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찬미의 제사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능욕을 지고 그에게로 나아감을 통하여 우리의 입술의 찬미가 진실임을 보이고 그것으로 많은 다른 사람들을 같은 찬양의 자리에 불러모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좇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찬양이 참으로 찬양인지 건전한 노래인지를 구분해 볼 수 있는 다림줄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찬양하고 있습니까?"
몇만 명의 죄인이 모여 떠들어대는 기도가 아니라 한사람 의인의 상한 심령을 귀히 보시는 여호와께 대하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소리로 불러 제치는 노래들보다, 누군가를 위해 그분께서 행하신 낮아짐과 능욕당함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때 우리 입술에 맺히는 열매가 바로 찬양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찬양인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이, 그 모임에 무의식적으로라도 배제되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를 위하여 주께서 능욕당하셨음을 상기하고 그를 위하여 그와 함께 됨으로 찬양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만이 찬양인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함께 있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개혁을 위하여

시로써, 4박자의 춤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의미로써 우리 찬양이 규정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 현실적으로 몇가지 제언을 해보아야 할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먼저는 많은 모임에 찬양인도자들에 대한 특별한 말씀입니다. 예수운동가적인 시각을 가지십시오. 찬양이 그저 예배를 위한 도구로 생각되었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해서 여기서 안주해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요 동시에 세상과 싸우는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전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세상의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하십시오. 주께서 당하신 능욕을 발굴해내는 일을 우리의 찬양이 할 수 있도록 진정한 Realist가 되십시오. 그리고 또 우리의 찬양이 발전되기 위하여 몇 말씀 드립니다. 지속적인 실험 정신을 가지고 탐구하십시오. 묵상과 간구를 통해 그분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그것을 찬양의 여러 형식들 안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도록 주어진 틀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히 사고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여러분을 위치 지우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합리화 하십시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려진 대화의 광장으로 나아 오십시오. 아니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가십시오. 한 사람의 과오가 지적되고 고쳐지므로 공동체는 선을 얻고 우리들 모두는 사랑으로 봉사하는 생명의 만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우리의 찬양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찬양집들마다 가득한 외국 사람들, 특히 서양인들의 찬양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보다 창조적인 우리의 찬양을 위해 애써야겠습니다. 척박한 현실이나 박약한 전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러가지 모순들이 혼재해 있는 혼란스런 분단 조국의 현실은 그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우리가 서양인들의 음악이 알지 못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한 개의 반가운 증거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지금 가장 민족적인 것을 통하여 가장 세계적인 것을 관통할 수 있는 치열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는 한 개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찬양이 참으로 약한 자에의 위로와 강한 자에의 정의가 될 수 있고, 그것을 위한 탐구와 실천이 쌓여지며, 나아가 기독교 문화운동이라는 총체성 속에서 여러 다른 흐름들을 연결하여 집합시킬 수 있는, 동지애가 나누어지는 공간 말입니다. 참으로 민족의 현실을 위한 구체적인 헌신이 계획되고 실행되기 위하여 작은 잡지와 같은 지적 공간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일이 이루어져야만 하겠습니다.

찬양의 조건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통하여 우리는 찬양에 대한 몇가지 안타까운 인상을 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무엇을 해야겠다고도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해 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여전히 한가지 가장 본질적인 실천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입을 열어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처럼 우리도 스스로 제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줄 아십니까? 구약시대 에봇을 입은 대제사장들이 그 이마에 붙였던 말씀, "여호와께 성결", 그것이 바로 마지막 남은 찬양의 조건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