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지성] 사도행전1장으로 본 복음지성과 야권지도자

2011. 1. 19. 10:57Life/Christian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 [행1]

성경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후 그 이후에 예수의 승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초기 예수의 제자들의 움직임, 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의 승천소식을 전한다. 모든 제자들이 보는 중에 부활한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고 제자들만 남게 된다. 제자들에게 있어 첫번째 문제는 비어있는 유다의 자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초기 예수의 제자들에게 남겨진 이 과제를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풀어나갔는지 살피는 것은 기독공동체, 예수공동체의 정체성을 살피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12제자 중 빈 유다의 자리를 어떻게 채울것인가? 신비주의에 속하는 이들이라면 모든것을 단절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하늘의 표적만을 구할것이고, 예수의 기적과 성경의 기적을 신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필요성에 따라 투표를 하든지, 혹은 기능에 따라 필요한 사람을 선별할 청문회를 열든지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두 측면은 현대의 기독교회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양상이 되어있다.

대형교회들을 대거 포함한 보수진영의 교회들은 복음주의를 말하면서 근본주의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 거기에 세대주의와 신비주의가 결합된 족보없는 신학이 한국교회를 지배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실천영역에서는 하나님이 없는듯 인간의 지식과 정서가 판을 친다. 심리학은 이미 영성과 거듭남을 넘어서서 인간을 가늠하는 척도로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말만 번지르르한 상담, 내적치유라는 말로 포장되었을 뿐 정작 교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근본적 치유대신 인간적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나는 심리학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설로 시작된 다양한 심리학적 견해보다 확실한 진리의 말씀에 기반해 있는 교회가 그런 심리학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 씁쓸한 뿐이다. 반면,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로 이야기되는 민중신학, 해방신학, 혹은 그러한 부류의 기독교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곳은 기독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껄끄러운 곳이다.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가 얼마나 사회에 공헌하였는지의 여부로 그 단체의 종교편입을 결정하는게 아니라면 그곳은 사회운동을 하는 곳일 뿐이다. 때로는 사회운동을 위해 성경과 불경과 기타 여러 현인들의 어록을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어야 하지만 성경 한구절을 사용하였다고 그곳이 기독교 단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복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곳이 복음주의적 운동을 하는가는 얼마나 사회에 공헌을 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복음주의를 알고 그것을 구현하고자 고민하는가가 핵심이 된다.

이제 초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그들의 모습에는 주목할 점이 몇가지 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 [행1]

우선, 그들은 잘 모르는 일을 함부로 결정하지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적격, 부적격 심사를 하지 않았다.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 즉 잘 알고 있는 사람중에 유다를 대체할 사람을 찾았다. 누군가가 좋다고 추천해준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름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만나고, 항상 만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

두번째, 그들은 두 사람을 내세웠다. 즉, 항상 보아왔던, 항상 알아왔던, 항상 함께 다녔던 사람 중에 단 두 사람을 선택할 기준이 그들의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까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두 사람을 선택할 때 기준이 있었고, 그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 둘이었음을 알려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둘중 누가 유다의 자리를 대체하든지 상관이 없었다. 둘 모두 기준에 적합했고, 둘 모두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이 둘을 결정하는 지성, 그것이 복음주의에 필요한 지성의 한면이다. 많은 경우, 대형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자신을 철저하게 숨긴다. 만들어진 가면뒤에 숨고, 대중의 뒤에 숨는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믿음이 있는 척 한다. 하지만 정작 그들중 상당수는 고객확보를 위해 대형교회에 등록했고, 상사에게 아부하기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 정치인으로 표를 원하는 이들도 작은 교회보다는 대형교회를 이용한다. 대형교회는 이미 이런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람은 많지만 항상 함께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웃으면 악수하며 인사를 하지만 정작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를 원할 뿐이다. win-win 의 게임은 차라리 신사적이다. 종종 zero-sum 게임이 교회 안, 성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복음의 지성을 포기하고, 관찰이라는 첫단계마저 불가능하게 된 현대교회의 메마른 현실은 더 큰 갈증을 성도들에게 일으키게하고 마치 마약이 부족한 중독자처럼 교회를 이용하게 한다. 그리고 이 악순환은 반복되고, 어느순간 더 이상 자신을 만족시킬 마약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 중독자처럼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하며 떠난다. 그들이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만족시킬 환각제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지성을 포기했기에 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두 사람을 선별할 지성, 그것이 복음주의 교회에 필요하다. 그것을 복음지성의 한 단면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 복음지성은 교회안에서만 발휘되지 않는다. 이 사회에 관해서도 발휘되어야 한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교회에 나오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그것으로 고민하고, 그래서 철저히 자신을 희생해서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복음지성은 냉정하고, 철저해야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제비를 뽑았다. 복음지성을 활용해 많은 사람중 둘로 그 범위를 정했다. 여기까지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누가 유다의 자리를 차지하든 그는 만족할 만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결정은 하나님께 맡긴다.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해도 마지막결정을 내릴때 빈틈이 있을 수 있다. 그 빈틈을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차이는 크다. 어떤 정치인들은 자신의 결정이 최선이며 그 이상의 좋은 대안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아 말한다. 대부분 그런 말을 하는 정치인의 결정은 편향적이며, 그 편향성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다. 이런 사회에서 살다보니 어느사이 교회에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이런 편향성을 지니게 된다. 절대선을 위해 대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악한 현실에 저항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한번 더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종종 우리가 절대선이라 주장하는 것은 여러 선택이 가능한 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더 좋아해서 그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남은 상황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의 논의는 이전의 말을 되풀이할 뿐임을 알았을 것이다. 둘 모두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선택은 자신들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기로 한다. 제비뽑기. 현대 사회에서 대통령을 제비로 뽑는다면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제비뽑기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통령선거에 나가는 야당들의 대표를 단일화하는 것은 다음번 대선에서 큰 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뻔한 문제가 눈에 보인다. 어떤식으로든 대표가 되지 못한 이들의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불합리한 사전선거 제도의 어떤 규칙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이다. 이런 원망은 다시 야권의 세력을 분산시키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 대선에서의 정권교체는 어려워지게 될 것이 뻔하다. 오죽했으면 아예 이런 일을 원천봉쇄하겠다고 야당단일화를 내세우는 세력까지 만들어졌겠는가. 어쨌거나 이런 원망을 최소화하려는 시도, 그것을 야권연대가 만들어가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단 한명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일까? 종종 대선후보자들의 말을 듣자면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봐야 특별한 것이 없거나 혹은 이전 대통령보다 못한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다른 후보였으면 더 나빴을까? 그럴수도, 혹은 아닐수도 있다.

그러기에 제비뽑기는 필요해진다. 그사람만 가능하다는 절대다수의 불타는 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국민은 능력과 자질, 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여겨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한 개인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아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할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말을 듣고, 주변 참모진의 의견을 듣고, 외교적 자리에서 경청할 수 있는 사람이 발언할 때 그의 말은 더욱 설득력있게 된다. 즉, 요셉이든 맛디아든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가 여러 제자들 사이에서 이미 검증된 사람이라면 말이다. 대선 후보도 그가 검증된 사람이라면 때로는 반드시 누구여야만 한다는 그런식의 독선에서 벗어나야한다. 이미 한국사회는 한번 아픔을 겪었다. DJ 와 YS 의 결별로 인한 민주주의의 후퇴, 그것은 한국의 현대사에 있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누구에게 더 큰 잘못이 있는지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글로 정리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이정도만 언급하기로 한다. DJ 든 YS 든 누구라도 단일화되어 나오기만 했더라면 지금의 한국정치는 많이 달라졌을것이다. 제비뽑기를 거부한 그들의 결정은 지성적일수 있다. 그 이후 둘 모두 대통령을 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 모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다고들 주장한다. 각각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결정이다. 하지만 그 최선의 결정들이 모여 하찮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게임이론에선 수인의 딜레마로 설명하곤한다. 어쨌거나 둘 모두 대통령을 했지만 한국의 정치판도는 여전히 그들과 동떨어진채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복음은 지성적이어야한다. 두명의 후보를 얻을 때까지 심사숙고하며 철저히 관찰하고 검증해야만 한다. 또한 복음지성은 지성이후의 선택에 대해서는 기꺼이 승복할 수도 있어야한다. 지성을 사용해 만들어낸 결과를 존중하고 그것을 강하게 주장해야한다. 그리고 지성의 선택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는 단계에서 발생한 초월적 선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승복해야한다. 이 두가지 주장은 언뜻보면 모순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동시적인 것이 아닌 시차를 두고 발생하는 시계열임을 인식한다면 복음지성은 복음이 땅에 전파되는 과정에 필수적인 것임을 알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인간이 하는 일을 나누어본다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복음지성이다. 복음지성은 복음주의교회가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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