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준비하는 자의 길

2007. 10. 12. 10:52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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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준비하는 자의 길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4 As is written in the book of the words of Isaiah the prophet: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5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in, every mountain and hill made low. The crooked roads shall become straight, the rough ways smooth.
6 And all mankind will see God's salvation.' "
(눅 3:4-6)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의 모습이 나온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부모를 둔 엘리트 귀족 출신이라는 특별한 배경을 가진 존재였다. 사갸랴와 엘리사벳은 지금으로 따지면 특별한 상층에 속한 귀족 계급 같은 존재였다. 지금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사역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이사야 40장 초반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에서의 인용은 요즈음의 논문식 인용이나 신문 기사식 인용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한글자라도 틀리게 쓰지 않는다. 정확히 한 글자도 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인용의 특징이라면 오히려 신약성경의 구약성경 인용방식은 글자 자체나 문장 자체의 복사가 아닌 내용과 신약의 배경에서 해석된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인용방법은 지금도 학술적 논문이 아닌 경우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인용방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여기서는 이사야 40장 3-5절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구절에 대한 약간의 해석이 드러나고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40:3-5)


길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길을 곧게 하는 것 이 두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일이다. 이사야 40장 3절도 이 두 구문, 즉,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것이다. 하나의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두번 반복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강조는 무엇을 말하는가? 왜 강조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단지 세례 요한의 사역이 이사야에 미리 예언된 그 사역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 뿐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음을 본다. 여전히 지구 한쪽에서는 그 이름조차 듣지 못한채, 혹은 그이름의 의미를 왜곡되게 전달한 자들로 인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음을 본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 미리 그가 올 것을 안 사람들에게 맡겨진 책임이 있다. 그것이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단지 [기다]리는 것만이 아닌,...


1. 준비하는 자가 있어야 할 곳 - 광야와 사막

준비하는 자가 있어야 할 곳은 광야와 사막이다. 넓고 안락한 귀족형 주거공간인 호텔의 스위트룸이 아니라, 사시사철 난방걱정 없는 잘 지어진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파트의 넓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라, 먼지가 일고 밤이슬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광야요, 먹을것과 마실물이 없어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하는 사막이다. 광야와 사막은 [세상]의 다른 말이다. 보다 진실된 세상의 본 모습을 이른 것이 바로 광야와 사막이다. 세상은 살기좋은 안락한 아파트와 같은 곳이 아니다. 휴양지에 지어진 멋진 별장과 같은 곳이 아니다. 세상은 전쟁이 있는 곳이고, 마실물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세상은 누워 잘 곳이 없는 사람들의 광야와 같은 곳이며, 거기서 몸을 한없이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는 난민의 기거할 공간인 것이다. 준비하는 자는 거기 있어야 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에 있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내가 있는 곳은 단지 내가 있고 싶어하는 곳은 아닌가? 나는 광야와 사막대신 유토피아와 휴양지를 찾아 헤메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준비하는 자가 아니다. 준비하는 자는 광야와 사막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광야와 사막은 준비하는 자에게 5성급 호텔의 화려한 전경이 보는 스위트룸보다 더 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그 곳을 찾지 못한채, 억지로 광야와 사막을 피해 방황하고 있다면, 그때 나는 준비하는 자의 책무를 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준비하는 자는 [광야]와 [사막]을 사랑해야 한다.


2. 준비하는 자의 역할 - 곧게 하라 그리고...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눅 3:5)

4절과 5절의 내용은 다르지 않다. 5절은 4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자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는 일을 할 것이다.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더 있다.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in, every mountain and hill made low. The crooked roads shall become straight, the rough ways smooth. And all mankind will see God's salvation.' "


영어로 보다 보다 분명히 보인다. 여기엔 하나님의 의지가 보인다. 광야에서 외치는 선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무책임하게 구경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직접 그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한다.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in,...


여기서 shall 이라는 단어는 내가 그렇게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수용하고 있다. 준비하는 자는 광야와 사막을 사랑한다. 그리고 준비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한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자는 하나님의 의지를 목격한다.

그는 축복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아무 힘도 없지만 모든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그는 빈손으로 산을 깍고, 골을 메우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있는 곳이 광야와 사막이라면 그때 우리는 준비하는 자로 불러준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해야 한다. 다른 곳이 아닌 사막과 광야기에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 철저하게 보게 된다. 사막과 광야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볼수 있는 장소이다. 모든 곳에 계시되, 그 능력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장소는 바로 준비된 자들이 서 있는 광야와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준비하는 자들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준비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야 한다. 광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거라사의 광인의 짓꺼리다. 그것은 광야의 선지자의 외침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한국 교회의 잘못된 것 중의 하나는 이 선지자의 외침을 광인의 소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광인은 자기 말을 하지 않는다. 광인은 자기에게 속삭이는 어떤 존재의 말을 대신 한다. 그러기에 광인도 종종 사막에 속한다. 때로 광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말 그래도 광인의 언어는 그 자체로 파괴적이고, 그 자체로 혐오감을 들게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모든 소리가 준비된 자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 자신의 경험과 혹은 세상의 지식과, 혹은 속삭이는 유혹의 영에 속은 광인의 포장된 언어유희가 더 많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이러한 광인의 헛소리로 들리게 해서는 안된다. 이미 많은 실수가 있었다. 죄가 있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그런 잘못을 범해왔다. 자신의 소리를, 자신의 이득을 위해 포장된 하나님의 선지자의 외침이라고 하는 엄청난 죄를 범해왔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준비된 자의 외침대신 광인의 소음만을 견뎌오셨다. 이제 한국 교회는 바른 선지자의 외침을 세상에 듣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선지자의 소리를 분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의지의 장이 보여질 것이다.

굽은 것을 곧게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는 먼저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분별해야 한다. 오히려 굽은 것을 더 굽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전에 곧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굽은 것은 안다. 하지만 곧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러기에 많은 목소리는 굽은 것의 잘못을 외치면서 오히려 더 굽게 만들고 만다. 마치 형제의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물속에 빠뜨리는 어리석음 처럼 말이다.

세상은 굽어 있다. 그 사실을 안다. 문제는 곧은 것이 무언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많은 소리들은 그 굽은 것을 지적하고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때로는 더 굽은 것을 제시하며 예전의 것이 잘못이었으니 이것이 대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단지 광인의 거짓일 뿐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낸 많은 소리들도 이 광인의 거짓에 치우쳐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바른 소리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더 메마른 광야와 사막이 펼쳐져 있게 되었다.


3. 보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눅3:6)


모든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정하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선택의 자신들의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보면 난쟁이들은 그 특성상 나니아 왕국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가 되는 곳이라면 아슬란의 왕국이건 마녀의 왕국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여 주류가 되는 사회를 선택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더라도 그것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인정하되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안타깝다. 하지만 보되 받아들이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나는 개독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아마도 그 소망은 실현될 것이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소망은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진 후에, 과연 스스로 그 결과에 만족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준비하는 이들은 모두가 언젠가 이 완성된 그림을 보게 될 것을 안다. 그리고 준비하는 자들은 이 완성된 그림을 먼저 보는 사람이다. 이 완성된 후의 청사진이 있기에 준비하는 자들은 그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청사진을 품고 건물을 짓는 사람은 작업의 진척도를 보며 완성의 모습이 점차 드러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광야가 더 이상 광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보고 기뻐하는 사람과 둘 사이에 당신은 어디에 속해있는가?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무리와 어울리면 70평생을 모든 것으로 즐기는 것으로 허비하며 그저 이 하나님의 최종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는가? 아니면 그의 청사진을 품고 그 한 부분에 함께 참여하며 그 완성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준비하는 자로 광야의 삶을 살겠는가? 70 평생은 고달플지 몰라도, 영원한 기쁨에 동참하는 것은 더 멋진 일이다.


P.S. 옥에 갇힌 준비하는 자

준비하는 자, 선지자로 그 삶을 산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며 굽은 것을 바르게 하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 메시지를 받은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굽은 것을 바르게 하며 살고자 노력했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굽은 것을 지적하는 세례요한을 오히려 질시하여 그를 옥에 가두기까지 한다. (눅3:20)

준비하는 자의 메시지는 굽은 것을 곧게 하라는 것이다. 그는 메시지의 전달자이지 스스로 그들을 곧게 만들수는 없다. 굽은 곳을 곧게 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자, 하나님의 영역이다. 준비하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굽고 곧음을 분별하여 그것을 전달하고, 굽은 것이 드러나며 곧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결과가 자신을 옥에 갇히게 만드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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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gIcon 리지엔2007.10.12 21:38

    저는 강요는 커녕 말도 잘 안꺼내죠. 해봐야 순전한 기독교 책을 던져(?)주는 정도일까요..
    저 스스로 25년간 믿지 않았고 그 중 거의 7여년?은 손가락질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마음이 감화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논리적인 말도, 그 어떤 호소도 안된다는 것을...
    또, 어쩌면 겁이 난다는 걸수도 있겠구요. 내가 했던 손가락질을 내가 받아야 하는 구나..

    중간에 "아마도 그 소망은 실현될 것이다.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 소망은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진 후에, 과연 스스로 그 결과에 만족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라는 부분이 더 심장을 찌르네요..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귀찮아했던 사람들의 기도가 모아져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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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gIcon JelicleLim2007.10.13 21:23 신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요.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메시지의 전달이자,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킬것에 대한 기대 뿐이겠지요... ^^
      기도는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이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시도록 그 길을 곧게 하고 준비해야 할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
      님의 기도가 하나님의 역사중에 한 부분이 될 것을 또한 기대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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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gIcon truelygifted2007.10.13 19:23 신고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