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혹은 신념적 병역거부에 대한 글

2012. 3. 10. 23:31Eye/시사단평

I. 들어가는 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제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만난 예수님이 제게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걸음을 따라, 모든 전쟁을 반대합니다."

병역거부선언을 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그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넘어간다.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알더라도 그들의 양심에 대한 발언에 대해 불편해하며 거부하는 이들이 많고 더러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해 그냥 지나쳐간다.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재학하던 기독교인 하동기씨는 2009년,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 관련기사 ]

II. 양심적 병역 거부를 생각함 - 고은태

최근 팀블로그 활동을 시작한 논객들의 글 중 고은태씨가 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생각함"이라는 글은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 특히 집중적으로 "양심"이라는 단어의 실천적 사용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의 양심과 나의 양심이 다를 수 있으며, 하나의 양심이 다른 양심을 적절하다거나 부적절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할수 없다는 점에서 양심의 자유와 그 양심에 따른 선택에 대해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반응이 지나치게 폭력적임을 잘 보여주는 글이기도하다.

III.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 - 기독교 케이스

우선 한국의 기독교계가 보이는 극우적인 반응과 철저한 반공정신에 기반한 모습은 한국이 겪었던 한국전쟁과 그 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참혹한 시기를 보내야했던 어르신들의 조금은 특별한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 기독교는 그런 어르신들이 전쟁의 참혹한 시기를 보내면서 형성해왔고, 그러기에 전체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주는 반응과는 조금 다른 보수적이고 안보의식이 보다 투철한 한국적 보수적 기독교가 큰 흐름속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또 기독교회사의 측면에서 병역 거부의 예들을 찾아본다면 충분히 많은 자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의 서약은 단순한 군복무의 차원을 넘어선 절대적 충성과 신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신적 권위를 부여한 복종의 서약에 동의할 수 없었고, 이는 초대 교회 당시 커다란 박해를 받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재세례파의 평화주의는 기독교의 작은 분파이기는 했지만 그 영향은 상당했다. 전쟁이나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의는 모든 문제를 폭력적인 힘으로 굴복시킴으로 해결할 수 있고, 그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종교적 신념의 표출이었다. 여전히 성경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고 읽히는 산상설교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서야한다는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또한 예수 스스로 모든 폭력적이고 부당한 요구에 대해 오히려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선택을 통해 그들의 부당함을 꺽는다는 역설을 말하고 실천했다는 점도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전쟁무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상식을 거부할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신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또한 이러한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늘에서 신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지켜주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이고 나약하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신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것도 불사했다.

IV. 억지 논리, 작은 가능성 그러나...

게임이론에서 수인의 딜레마가 있다. 두명의 죄인에게 죄를 자백하면 감형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두명의 죄인은 서로 만날수 없다. 단, 이러한 조건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자백하면 그 사람의 몫까지 두배이상의 형을 살아야한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불리한 증거는 매우 작고 그래서 둘 모두 입을 다문다면 아주 가벼운 벌을 받는 것으로 끝이난다. 최선은 두 사람 모두 끝까지 서로를 믿고 입을 다무는것이다. 그러면 둘 모두 아주 작은 처벌을 받고 끝난다. 하지만 한명이 자백하고 다른 한명이 입을 다문다면 자백한 사람은 무죄로 나올것이지만 다른 한명은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 실제로는 두명 모두 자백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 상식이 있다. 내가 그 한명의 죄인이라고 해보자. 나는 자백을 할수도 혹은 입을 다물수도 있다. 내가 입을 다물때 상대가 입을 다물면 나는 작은 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상대가 자백하면 나는 그의 죄까지 덮어쓰고 큰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면 내가 입을 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상대가 입을 열면 나와 상대는 모두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큰 형벌이다. 하지만 상대를 입을 다문다면? 나는 무죄가 되어 석방된다. 결과를 본다면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자백을 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내가 자백을 하면 상대가 자백을 하건 안하건 손해를 보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입을 열지 않으면 나는 석방이 될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물면 나는 큰 위험에 처하거나 혹은 작은 위험에 처한다. 그 선택은 상대에게 달려있다. 그러기에 가장 상식적이고 좋은 선택은 자백을 하는 것이다.

둘 모두 자백을 함으로 결과는 둘 모두가 큰 형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수인의 딜레마는 가장 최선을 선택을 했지만 그 결과는 둘 모두에게 가장 나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최근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강정마을을 홰손시키면서까지 제주에 해군기지를 만들려고 한다. 이유는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제주해군기지에 미군을 둠으로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 미국을 등에 업어야만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국방력이다. 자체적으로 중국과 군비경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보호만을 바라면서까지 중국을 자극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초보적인 질문이 나오고 그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전쟁준비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보호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신념과 비교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리라는 신념을 비교하고, 그에 대해 언제든지 국제관계속에서 서로를 버릴 수 있는 국가간 관계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과 하늘의 정의와 심판을 자신의 생명을 걸고 믿는 믿음 중에 어느 것이 더 낫다고 과연 말할수 있을까? 우리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많은 정치인들이 사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국민을 호구로 보는 집단임을 몇번이고 반복하며 보아왔다. 미국은 언제라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누구와도 친구가 될수 있고, 누구와도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그런 국가임을 이미 충분히 보여왔다. 그런 미국을 믿는 믿음과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중에 어느것이 낫고 어느것이 양심적이고 어느것이 감옥에 가야 할 정도의 잘못인지를 판단한다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누군가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군대를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은 이에 대해 국가의 징집명령을 거부하겠다고 밝혔을때 그것이 그의 신념에 따른 것이며 그의 신념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이 되겠는가?

물론 여기서 말했던 것은 다분히 억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반박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 그 믿음은 자신이 감옥에 가고 전과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믿음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 과연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또 설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념이 혹은 양심이 사회에 커다란 위협을 가져오지 않는 한 그들의 양심에 대한 행위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야한다.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개인의 양심의 영역에 대해서까지도 재단된 사상의 틀을 억지로 강요하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니다.

V. 산상설교 앞에서 작아지는 개인

산상설교를 읽고 그 내용을 곰씹으면서 과연 이것이 이땅위에서 가능한 일인지를 고민한 기독교인은 많지는 않더라도 전혀 없지도 않다. 그 고민 끝에 산상설교를 덮었다는 사람도 만났고, 거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의 모든 전쟁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이도 보았다.

덮는 것은 쉽다. 다시 상식의 세상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거기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벽위에서 한걸음을 내딛는 것 만큼이나 위태롭다. 그리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그 믿음은 어찌보면 위험한 것이고, 어찌보면 거룩한 것이다. 상식을 초월하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한걸음, 그 한걸음은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수 없는 전진이고 그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는 절대자앞에 선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것을 이해하라고 말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그런 사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그 신념이 과연 사회에 해악을 주는 것인가를 우리는 상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큰 해악이 없다면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을 인정해주고, 비록 그들의 삶이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존중되어야한다. 동시에 그 사람은 세상의 그 누구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혹은 죽을 각오가 함께 되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