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천 개의 찬란한 태양] 아프간, 거긴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이야. 그런데 ...

2008. 5. 16. 19:43서평/[서평] 인문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상세보기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 현대문학 펴냄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피워낸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인간드라마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여성들의 삶.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작품으로,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피워낸 두 여자가 만들어내는 인간드라마를 탄탄한 구성과 흡입력 강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전란의 소용돌이에 남겨진 두 여자, 마리암과 라일라. 한 남자의 아내들로 만나게 된 두 여자는, 어쩌면 불가능할 듯도 싶은 연대를 만들어

"아내엔 부르카 입히고 남편들 포르노잡지 읽었다"


한 신문에서 이 책을 소개하며 머릿글로 쓴 글이다. 그 신문은 워낙 싫어해서 인용하기도 싫지만 그래도 이 말이 참 와 닿는다.

대학시절 터어키를 여행하던 때였다. 그때 이스탄불의 한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혼자서 작은 배낭을 매고 여행자티나는 모자에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친한척 다가오며 말을 건다. 짧은 영어로 우리는 약간의 대화를 했다. 한참 대화를 하던 중 공원을 지나가는 일련의 사람들을 보며 "저기 남편과 아내들이 간다"고 알려준다. 비록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고 해도 어느 이슬람국가든 여러명의 처를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능력이요, 자랑거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조차도 돈이 많으면 처 외에 첩을 두지 않던가? 물론 그러다 걸리면 개쪽을 당하는 일이 왕왕있지만 대부분의 이슬람국가에서는 그런 경우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

남편은 여닐곱정도 되는 아내들을 거느리고 공원에 산책을 나왔다. 아내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차도르를 쓴 여인들은 남편을 따라가고 있었고, 남편은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그들이 지나간 뒤 터어키인은 내게 친구처럼 대했다. 그가 나를 친하게 대함이 나로서도 반가왔다. 덕분에 공원이 밤이 되면 동성애자들이 모여 매일 파티를 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의 가방에 가득 든 도색잡지도 구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 이 책은 아마존에서 2007년, 해리포터 최종본을 누르고 1위의 자리에 등극했다. 24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를 장식했다. 호세이니는 막연하게 아프간을 동화의 나라로 포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미국이나 다른 외세가 아프간의 구세주가 될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 책을 통해 아프간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삶과 그 주변인들의 그늘진 삶을 보여줌으로 우리로 생각하게 만든다.

1959년부터 2003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끔찍했던 현대사를 관통해 온 두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가끔 나타나는 아빠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마다 철모르고 좋아하기만 했던 하라미(사생아) 마리암은 자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그에게는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있었고, 자신은 그가 그 집 가정부와 혼외정사로 낳은 하라미였다. 마리암이 아빠와 함께 살겠다며 집을 나간 날, 엄마는 목을 멘다. 아빠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와 엄마의 주검을 목격하는 마리암, 15세가 되던 어느 날, 그녀는 아빠에 의해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구두 수선공 라시드와 억지로 결혼해 고향을 떠나 카불로 간다.

라시드는 마리암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두 번째 부인 라일라를 맞이한다. 마리암은 가난하게 자랐고 얼굴도 못생긴 자신과 달리, 교육을 강조하는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고 얼굴도 예쁜 라일라를 질투한다. 작가는 두 여인의 삶을 한 남자의 집에 겹쳐 놓음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덮친 비극의 덫을 드러내 보인다. 마리암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의 라일라는 집안에 날아든 로켓포에 부모를 잃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뱃속엔 내전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달아나버린 남자친구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꽃다운 15세 소녀 라일라는 장차 태어날 아기에게 집을 주기 위해 환갑을 넘긴 노인 라시드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리암은 질투 대신 라일라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지애를 갖게 된다.

소설은 아프간 역사의 커다란 흐름을 문화적 배경과 함께 능란하게 토해 낸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마리암조차 시를 흥얼거릴 만큼 이 나라는 시인들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왕정붕괴와 소련의 침공, 공산화와 탈레반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아프간은 점점 낯선 곳으로 변해간다.

보수적인 파슈툰족 출신의 남편은 그녀에게 부르카를 입으라고 명령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내 고향에서는 눈길 한 번 잘못 던져도,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칼부림이 나.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때릴 때마다 엄마가 죽기 전 했던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소련군을 몰아낸 뒤 적이 없어진 무자히딘은 과녁을 알 수 없는 총부리를 겨누면서 내전에 돌입한다. 소련과의 지하드(성전)에 아들 둘의 목숨을 바친 라일라의 엄마는 "무자히딘이 승리하여 카불로 돌아오는 날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바로 그 무자히딘이 쏜 로켓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내전을 끝내고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 치하의 카불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근본주의 국가의 허위에 찬 일상을 고발한다. 탈레반 병사들은 "남자는 수염을 길러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뒤 도요타 트럭을 타고 다니며 면도한 사람을 찾아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든다. 아내에게 부르카를 입혀놓고 남자들은 금발의 여자들이 나체로 등장하는 도색잡지를 읽었다. 진통을 시작한 라일라가 남자병원과 여자병원을 분리한 탈레반 때문에 양수가 터진 배를 부여잡고 여자병원을 찾아 도시를 헤맨다. 마취제도 없이 그녀의 배를 가르는 산부인과 의사는 부르카를 뒤집어 쓴 채 수술칼을 들도록 강요 받는다.

호세이니는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전달한다.

"타리크,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카람에서 그렇게 실수를 하고도? 죄 없는 사람이 백명이나 죽었어! 직접 죽은 사람들을 봤을 거 아냐."
"당신 말이 맞아.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줘. 내 말은 어쩌면 이번 전쟁이 끝나면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였어. 그리고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라일라는 자신이 그를 몰아붙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에게 한 말은 부당하다. 전쟁 때문에 그의 부모도 죽지 않았던가? 그녀의 마음속에 타올랐던 것이 무엇이었든 이미 부드러워지고 있다.......그녀가 그가 맞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안다. 어쩌면 이것은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부시의 폭탄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게 되면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호세이니가 아프간을 바라보며 품는 그의 복잡한 심정은 라일라의 말과 그의 마음을 통해 보여진다. 아프간에 평화가 임해야 한다. 그 땅은 더 이상 전쟁으로 얼룩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지금 아프간에 있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악이다. 그 악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악을 허용해야할지 모른다. 미국, 부시의 악함은 아프간에 존재하는 악을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더 심한 공포를 생산할 것인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현재의 암울함과 미래의 공포를 동시에 표현한다. 희망이 있다가 아니라 있을지도 모르는, 아니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 하는 아프간의 내일, 거기 있는 것은 현재의 암울함과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언제라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의 포화뿐이다.

테러, 탈레반, 파병, 먼곳에 떨어져 있기에 한국은 아프간을 전혀 모른채 그 땅의 모든 것을 아는 냥 쉽사리 판단을 한다. 쉽사리 맡을 토해내고, 그 말은 눈덩이가 되어 고통중에 있는 이들을 다시 한번 상처입힌다. 또 다시 파병은 논의되고, 거기에 아프간의 사람들의 아픔은 사라지고, 다시한번 미국과의 관계증진과 빌어먹은 우방논의가 진행된다. 부시는 어떻게 해서든 많은 이들을 동참시켜 자신들만 독박쓰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정작 모든 것을 거둬가는 것은 자신들이면서 모든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전 세계를 향해 거짓말을 토해내는 그를 보면서 라일라는 그 거짓말장이로 인해 혹시나 찾아올 아프간의 내일을 한번 더 기대해보는 것이다.

천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이름은 17세기 아프간에 살았던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의 카불을 노래한 시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

거기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거기엔 세상을 향해 쏟아내야 할 말을 가진 이들의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말이 세계에 던져졌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닫혀버린 그 땅을 바라보며 또 누군가가 거기서 나와서 말을 던져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직접 들어가야한다. 하지만 불법을 감행하고라도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며, 한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며, 한국의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니 그냥 두고보기만 해야 한다는 말을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서평:천 개의 찬란한 태양] 아프간, 거긴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이야. 그런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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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08.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