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체험이다

2008. 5. 31. 04:44서평/[서평] 기독교

예배는 체험이다(의지 감정 지성 오감) 상세보기
밥 로글리엔 지음 | 예수전도단 펴냄
하나님을 체험하는 네 가지 통로로 안내하다! 마음, 영혼, 생각, 그리고 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밥 로글리엔 목사가 안내하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네 가지 통로, 『예배는 체험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예배를 갈망한다. 그리고 '왜 우리 교회에서의 예배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을까?'라는 의문도 갖고 있을 것이다. 총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신약성경 '마가복음' 12장 30절을 바탕

이 책의 첫장을 넘기면 표지를 넘어간 아래 빈 공간에 레너드 스위트의 이런 글이 실려있다.

서구의 기독교는 이성과 관찰이라는 우상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에서 잠들고 말았다.
이제 서구 기독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계시와 체험에 대한 갈망에 눈뜨기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논하는 것과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레너드 스위트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근현대를 대처하는 21세기의 신사조로 이해하고 그것이 과거의 철학적 기반에 비해 더 나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어찌보면 이성주의시대에 시작된 신학의 자유화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말이 일면 맞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포스트 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모든 것의 절대화를 부정하는 것은 성경과 진리만이 아닌 그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서 정작 기독교를 가나안과 애굽의 모든 우상과 같은 자리로 자리매김하는 시대 사조임을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모두가 그렇게 물흐르듯 흘러갈때 그 흐름에 역행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렇게 한 댓가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한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이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책은 체험적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단정하며 시작한다. 문제는 무엇에 대한 체험을 말하는 것인가? 책의 추천사를 쓴 샐리 모건샐러는 개신교를 "책의 영성"으로 불리는 것으로 부터 벗어나 그 이상의 무엇(그것을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체험이라는 말로 사용한다)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책의 영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책(Bible)"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책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에겐 텍스트가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없기에 경험과 체험에 의지해야만 하는 종교와는 틀린, 계시된 진리를 주장하고, 그것이 진리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로서의 텍스트가 주어진 종교로 기독교는 존재한다. 이 텍스트를 일부 성직자의 전유물로 남겨두지 않고 모든 신도에게 읽을 수 있게 한 것이 종교개혁이었다. 라틴어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주문외듯 읽었던 텍스트가 모국어로 번역되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들려지게 한 것이다. 텍스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성직자들을 통해 들려준 한번 이상 굴곡된 표현과 그 상황속에서의 체험이었다면 텍스트가 모든 신도에게 주어지게 된 사건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그리고 이 텍스트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준다. "책"을 통한 경험은 그 어떤 매머드한 찬양 집회와 그 어떤 카리스마 넘치는 인도자라도 전달해 줄 수 없는 그런 경험과 체험을 의미한다. "책"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한다.

책에 대한 소감을 씀에 있어 먼저 다른 소리를 한다. 이유는 이 책은 다분히 내가 공감하기 어려운, 정확하게는 딴지를 걸고 넘어가고 싶은 내용을 군데군데 심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더니즘까지의 반기독교적 문화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친기독교적 문화로 탈바꿈하는 듯한 인상이라든가, 혹은 전통적 예배에 대해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정작 "체험적 예배는 선택사항이 아니다"라는 식의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체험예배라는 하나의 장르를 구축하고 그것을 차별화 하려는 듯한 뉘앙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책에 쓰여있는 많은 다른 책들의 인용구들과 성경구절의 오용과 남발된 해석의 부적확성이다.

책의 부족한 부분을 짚기에 앞서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예배는 책의 제목대로 체험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일수가 없다. 이를 위해서 의지와 감정과 지성과 오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예배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책의 맨 뒷부분에 나온 예배 기획에 대한 글들은 이러한 예배를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이다.

이 책을 보며 아쉽게 여기는 부분들을 조금 짚어 본다.
책의 34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다.

... 릭 워렌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에서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는, 하나님이 아닌 체험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진정한 예배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릭 워렌은 옳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예배에 관한 부분적인 이해만을 제공할 뿐이다....

책의 저자에 따르면 릭 워렌은 예배에 관한 부분적인 이해만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책의 뒷 부분 8장, 변화에 따르는 장애물 극복하기 편을 보면 이런 글이 있다.

...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특정 유형이나 형식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집착을 "나는 예배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해", 또는 "진정한 예배란 언제나 무엇이어야 해"라는 가치 평가적인 말로 표현한다. 예배의 성경적 원리나 영적인 본질을 설명하기보다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했던 것을 강조한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대신 예배의 외적인 표현에 초점을 두는 미묘한 우상숭배에 빠진다....

여기서는 저자가 다시 릭 워렌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보인다. 미묘한 우상숭배, 그것은 어찌보면 예배일수도 있는 것이 된다. 과연 어떤 것이 예배고 어떤 것이 우상숭배인가? 그 판단의 유일한 근거는 무엇에 집착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예배를 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보는가이다. 예배를 예배하는 것, 그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예배를 예배하는 것, 그것은 결코 부수적인 옵션이 아니다. 알아도 좋고, 몰라도 상관없는 그저 그런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책"의 종교, 진리의 척도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예배, 이것은 타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만 하는 기독교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조지 바르나는 "주일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성인들 중 반 정도는, 지난해 예배 가운데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말했다(p.60). 그리고 계속해서 저자는 체험적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체험적 예배는 새로운 흐름이다. 그러나 단순히 유행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르는, 진정한 성경적 예배다. 그것은 바로 초대 교회에 열정의 불을 지폈던 예배다.(p.61)

체험적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을 무시하는 듯한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진정한 성경적 예배"라고 말했던 바로 그 예배의 모습이 과거의 전통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진정한 성경적 예배"는 이 땅 위에서 발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 위의 모든 예배는 저 하늘의 예배의 그림자이다. 이 그림자로서의 땅 위의 예배는 천상의 예배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 천상의 예배를 미리 맛보게 한다. 하지만 이 땅위의 예배는 천상의 예배를 100% 재현할수는 없다.

초대교회에 열정을 불을 지폈던 그 체험적 예배가 그때 잠시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 그 다음부터 지금 새로운 체험적 예배가 등장하기까지 지상명령은 교회의 창고속에 틀어박혀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전혀 예배 중에 머리드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을 통해 지상명령은 수행되어져 왔고, 그들에 의해 우리는 생명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다. 그 귀한 모든 것을 가치 없는 싸구려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인류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일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조롱하는 것이 되고 만다.

체험과 경험을 중시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실수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통한 해석이 무엇보다도 위에 놓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40 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그에 해당된다.

저자는 스스로 막12:33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두개의 중요한 테마로 잡았다. 그리고 그 두개의 테마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을 위해 마25:40을 들었다.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내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과 같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이었다.

...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지만(마25:40), 그것은 또다시 우리를 두 번째 계명으로 되돌릴 뿐이다... (p.32)

저자는 예수님의 해석과 반대되는 해석을 내 놓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작은 자를 돌보는 것은 다시 두번째 계명으로 환원되는 것이기에 여전히 첫번째 계명에 대한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찾은 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해야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우리의 오감으로, 지성으로, 감정으로, 의지로 그분과 커뮤니케이션 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이전 단계에서의 상태이다.

막12:33 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보다, 즉 예배라고 우리는 통상적으로 부르는 것보다 낫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예배는 분명히 우리가 가져야만 하는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를 보는 것은 그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선결과제로 풀려야만 하는 것이 된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예배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책임의 모든 것을 전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실수 중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고 한 것과 함께 우리의 '이웃'은 보고, 만지고, 구체적인 행위로 사랑할 수 있는 실체이기 때문에 두 번째 명령에 대한 순종은 생각하기 쉽다고 말한데 있다. 결코 내 이웃을 참고, 위로하고, 때로는 그들의 불량함을 보고도 욕하고 저주하는 대신에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계속해서 확장되어 간다. 이웃은 반경 5Km 내에 사는 사람들의 명단에 적히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웃은 옆집으로 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지구의 반대쪽에서 먹을 물이 없어 탈수증으로 죽어가는 아이들과 난민캠프에서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아프간과 이라크 사람들이 내 이웃이고, 북한과 팔레스타인에서 폭탄 테러로 죽어가는 이들이 내 이웃이다. 그들의 불행을 보고 우리는 웃으며 악수를 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수 있을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이 땅위에서 죽을때까지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도 가까이 가기조차 힘든 실천이다.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외에 모든 것을 쉬운 일로 여기는 것, 그것은 이미 예배가 예배되지 못하고 우상화되어 가고 있으며, 우리의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결코 예배 자체에 대해서 강조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들의 평소의 모습에 대해서 강한 질책이 드러날 뿐이다. 제사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징계가 아닌, 그 이전의 삶의 정황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한 공의의 결핍이 항상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수천년의 시대를 넘어 오늘 우리의 삶의 정황속에서도 여전히 문제꺼리가 된다. 이것은 계몽주의시대건, 근대사회건, 혹은 모더니즘이건 포스트모더니즘이건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고, 텍스트는 시대를 넘어선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또 글이 길어졌다. 이 책을 읽음에 있어 때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이 나올때 굳이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계속 읽어나갈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혹시 그런 압박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2008/04/04 - [JelicleLim's Eye/[서평] 인문]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책을 통해 나를 말하라

책은 읽음으로서 나의 사고를 더 넓힐 수 있다. 혹은 내 생각이 더 든든한 기반을 얻게도 한다. 때로는 저자의 생각이 틀렸음을 지적할 수도 있다. 책을 읽어서 꼭 배워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오히려 책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서평으로 불필요한 부분을 많이 언급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다만, 이 책을 읽음에 있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같은 시각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 때로는 자신이 책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또 다른 한 사람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를 바라며.... ^^ 굳이 약간의 사족을 덧붙인다면 니이버가 말한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고 본 훼퍼의 값싼 은혜에 대한 지적은 이 책에서 언급한 것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고, 잘못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별 다섯개중 2개반 이상을 받기는 어렵다.


예배는 체험이다
http://jeliclelim.tistory.com/252
JelicleLim(2008.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