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풍요로 채우심 (요 6:1-15)

2008. 1. 21. 02:55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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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풍요로 채우심

I. 분위기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표적들을 보이셨다. 예수는 자신이 일반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보일 수 있는 기적들을 보이셨다. 이 기적들은 예수가 여느 사람들과 다른 무언가를 가진 존재임을 보이는 것이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였던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던 사건, 왕의 측근인 높은 위치에 있는 신하의 아들의 병을 낫게 한 사건, 38년 된 병자 그래서 모두가 포기했던 그 병자가 낫게 하는 사건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보이셨다. 이제 예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예수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예수는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II. 제자를 시험하시는 주님

산에 오른 예수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온 이들이었다. 그때 예수는 제자에게 묻는다. “어디서 떡은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수 있는지를 예수는 빌립에게 묻는다. 이미 이 질문 속에 예수는 떡으로 이 사람들을 먹이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다. 이 사람들은 떡이 필요하다. 그 떡을 어디서 구해올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질문은 어디, where 에 대한 질문이었다.

빌립은 이러한 예수의 질문을 받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한 입씩만 먹어도 이백데나리온도 더 들 겁니다.” 빌립은 이미 예수의 의도를 무시하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떡을 제공하겠다는 마음으로 질문을 주었음에도 빌립은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계산대로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니 떡을 줄 수 없다고 예수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는 “어디서” 떡을 구할지를 물었지만, 빌립은 “떡은 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거기에 듣고 있던 안드레가 합류한다. 여기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턱도 없겠습니다. 안드레는 그래도 그 현실 앞에서 노력 했다. 안드레는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오는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현실의 문제 앞에서 좌절한다. 보리떡 다섯 개와 멸치 같이 작은 생선 두 개로는 이 아이 하나 겨우 먹기에 충분할 뿐이지 모인 많은 군중을 만족시킬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를 보는 두 가지 눈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문제는 큰 좌절을 가져온다. 커다란 문제 앞에서 인간의 스스로의 대책을 찾지 못한다. 오히려 그 문제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만다. 결국 그 문제는 사람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 태안 앞바다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가 아니다. 태안 앞바다는 바다를 생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엄청난 좌절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삶의 희망을 잃어간다. 바다를 볼 때마다 그들은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하더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런 절망을 하게 된다. 결국 지창환씨는 분신 자살을 시도했고,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절망이 끝내는 삶을 포기하게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앞에 닥친 문제를 자신의 눈으로 보는 한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청도 군수 선거에서 비리가 밝혀지면서 거기에 가담했던 어쩌면 법 없이도 살수 있다는 평을 받을 만도 한 촌사람들이 자살을 했다. 우리가 문제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한 그 문제는 우리를 갉아먹는 존재일 뿐이다. 지금의 이십대를 88만원세대라고 부르는 책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어 비정규직으로 머물러야 하고 그것도 74%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이 받는 돈은 88만원이 되고, 이 땅의 이십대는 평생 88만원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좌절감이 만들어내는 용어가 바로 88만원세대다. 대입 문제, 취업 문제, 이성 문제, 결혼 문제, 결국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실상 우리가 다룰 수 없는 더 큰 문제일 경우가 많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 이 문제를 보고, 그 앞에서 좌절한다. 마치 빌립과 안드레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가진 건 이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떡을 주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가르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예수의 마음은 제자들과 달랐다. 예수는 어떻게 할 것을 미리 알고 빌립을 시험했다고 말한다. 시험에는 세 종류의 시험이 있다. 그것을 인간의 시험, 사탄의 시험,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인간의 시험은 자격을 재어보고 거기에 적합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이다. 그래서 그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을 제외시키는 것이 인간의 시험이다. 운전면허 시험이 그렇다. 시험을 보고 그 기준에 미달하는 이들에게는 절대로 운전면허증을 주지 않는다. 열 번 떨어지고, 스무번 떨어졌다고 불쌍하다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이에게 면허증을 주지 않는다. 자격이 되는지를 재어보고, 거기에 도달한 사람에게만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대입시험도 마찬가지요. 취직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의 많은 시험들은 바로 이 자격에 관계된다. 그래서 이 시험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다. 여기서 말하는 두 번째 시험은 사탄의 시험이다.

사탄의 시험은 절망하고 좌절하게 하는 시험이다. 그것은 보통 영어로는 Temptation, 유혹이라고 불려진다. 사탄은 심지어 예수님에게까지 접근해서 이런 유혹을 한다. 사십일을 금식한 후에 돌이 떡이 되어 보게 하라는 둥,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 하나님이 보호하는지 시험해 보라는 둥,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는 둥, 이런 유혹을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이다. 사탄의 시험의 한 가지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희석시킨다는데 있다. 그 약속을 희석시키는데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세상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대신 뱀을 통해 나온 사탄의 말을 듣고 말씀보다 세상의 화려함과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켰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려 한다. 청년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무엇인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돈과 이성의 문제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 속삭인다.

괜찮아, 괜찮아, 서로 좋아하는데 무슨 문제될 것이 있어? 지금이 조선시대야 무슨 정절이야 정절은, 쿨하게 살아, 서로 좋아하면 그걸로 된거 아냐? 즐기는게 무슨 문제야? 그건 죄도 아냐, 세상을 봐, 얼마나 더 큰 죄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교회? 맨날 간다고 뭐 달라지는 것 있디? 자주 얼굴보이며 귀찮은 일만 떠맡게 되고, 괜히 할 일 없는 백수처럼 보이니까, 너무 자주갈 필요 없어. 주일에 한번 잠깐 얼굴 비추고 아직 잘 살고 있다고 한마디 해주면 돼.
또 솔직히 현실적으로 필요한 건 돈이지. 아르바이트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 미래를 위해서 공부하면서 준비하겠다는데 교회 조금 빠지는게 무슨 문제겠어? 열심히 사는게 중요하지...

열심히 사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특히 사탄에게 미혹되어 사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사는 삶은 차라리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막14:21) 는 가롯 유다를 바라보며 안타까와하는 예수의 말이 적용되는 안타까운 삶이다.

연애도 하라. 아르바이트도 하고, 열심히 취직 준비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 하지만 그것을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한다. 어차피 똑같이 하는 건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어차피 자기 출세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공부나 그 공부가 그 공부, 똑같은 공부가 아닙니까? 똑같지 않다. 시작은 비슷하다. 하는 것도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그 끝은 극과 극이 된다.

마치 설악산 꼭대기에 떨어진 두 방울의 빗방울의 끝과 같다. 꼭대기 끝점에서 1mm 오른쪽에 떨어진 빗방울은 산을 따라 내려와 지천과 합류하고 결국은 동해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끝점에서 1mm 왼편에 떨어진 빗방물은 산을 흘러 내려와 계곡을 흘러 결국 종양강, 동강, 남한강, 임진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첫 출발은 매우 가까웠다.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은 동쪽의 끝과 서쪽의 끝으로 멀어진다. 그 나뉘는 점을 분기점, 혹은 분수령이라고 말한다. 분수령의 오른편과 왼편은 절대로 만날 수 없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고, 놀고, 연애도 하고, 취직도하고 그렇게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안에 있다는 것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그렇게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험은 어떤 것일까? 예수는 빌립이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빌립에게 물었던 것이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빌립의 상태를 빌립 자신보다 더 자세히 알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다. 예수는 이제부터 하려는 일을 통해 빌립을 더 성장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마음, 믿음이 없는 모습, 예수를 신뢰하기 보다는 돈 계산에 빨랐던 빌립에게 모든 일에 전적으로 예수를 신뢰할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시험이다. 이 시험을 거칠 때마다 우리는 한 단계씩 성장하게 된다. 젖만 먹던 유아기를 벗어나서 이유식을 먹게 된다. 이유식에서 연한 음식물은 직접 씹어 먹기 시작한다. 나중에 고기까지 먹을 수 있는 성인이 된다. 하나님의 시험은 이러한 성장을 우리에게 가져온다.

III. 풍요로 채우기 원하시는 주님

우리 하늘 아버지는 참으로 경험되어지시는 분이다.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이 매일 아침 좋은 기분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분은 40년간 광야에서 3백만 이스라엘백성들을 양육하셨다. 우리는 그분께서 3백만 명의 선교사를 중국에 보내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분은 충분히 그들 모두를 양육하실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고 결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믿자.

허드슨 테일러의 일기중에 있는 한 부분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고 결코 그분의 공급하심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고 고백한다.
그는 우리를 풍요로 채우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 방법 역시도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방법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요를 공급하실 때 결코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실 것이다.

이백 데나리온으로 떡을 사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며 먹게 하였을 때 열두 바구니에 남은 것이 차게 되었다. 이 부분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해석을 한다. 한 소년이 가져온 도시락을 내어 놓았을 때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래서 그들도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함께 먹고 이렇게 남을 정도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 해 보인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들 중에 도시락을 가져온 사람이 이 소년 하나뿐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도시락을 오천명이 먹었다는 말 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을 열어 함께 먹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를 기록하면서 그것을 표적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기적적인 사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일 때문에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삼으려 했다. 자기가 가져온 도시락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하겠는가? 26절에서는 떡을 먹고 배부른 것 때문에 자기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질책한다. 이 기록은 사람들이 가져온 것을 나눠먹은 사건을 신화로 만든 것이 아니다. 정말 있었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이 신화가 되어 전래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사건이 발생한 후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나 전설처럼 되어 구전으로 전해지는 기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은 예수의 제자들이 살아 있던 때에 그들이 보고 들은 직접적인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신화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마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이 나은 것처럼, 38년된 병자가 일어나 걷게 된 것처럼, 이 사건은 분명히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예수가 어떤 이라는 것을 모두의 눈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풍요하게 채운다. 부족하게 채우지 않고 풍성하게 채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그 마음을 채워야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이 우리를 채운다. 매일보는 TV의 내용이 우리의 마음과 말을 채운다. 매일 하는 게임이 우리의 생각을 채운다. 매일 찾는 인터넷과 허무 맹랑한 루머들이 우리의 관심을 채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빈자리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기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마음의 빈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우리 마음의 중심을 비워야 한다. 지난 특별 새벽기도회를 인도할 때 차량운전봉사를 했다. 새벽에 기도하며 마음을 채우기 원하는 성도들을 태우고 다녔다. 새벽 4시 반, 나이트클럽에서 막 나온 듯한 한 아가씨 횡단보도앞에 걸어갈 기운조차 없이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무엇인가가 부족했을 것이다. 마음의 빈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트클럽을 전전했을 것이다.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춤을 추면서 자신의 빈 마음을 채워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다음날 더 공허한 마음만을 가지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더 열심을 가지고 나이트클럽을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이트클럽이 구원의 장소처럼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영원히 마음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곳이다.

빈자리가 있는가? 마음에 빈 공간이 있는가?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그래서 항상 무엇인가가 갈증이 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그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라. 그때에 우리는 풍성하게 우리를 채우고, 우리를 기뻐하시는, 우리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이 채워질 것이다.

IV. 풍요로 채우는 삶

신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죽음의 길을 걷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보이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생명을 택할 수 있도록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우리에겐 돈이 없어서 이 사람들을 먹일 떡을 살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주님 우리에겐 세상의 모든 떡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주님이 계십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우리는 여전히 주일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며, 돈이 예배보다 주일모임보다 중요하다고, 결코 하나님도 내 재정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혹은 주님 내가 주님을 신뢰합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하나님의 풍요로 채우심 (요 6:1-15)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 (200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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