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헌신
2007. 10. 26. 02:05ㆍLife
http://www.godpeople.com/cartoon/?12777에서 가져왔습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7:36-50)
예수는 제자들을 선택하고,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시작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곁에서 특별한 일을 보았다. 우선 한 백부장의 종의 병을 가까이 가지도 않고 고치는 것을 보았고, 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상당히 많은 이들에게 그 이름이 드러났고, 이제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살피는 한 사람과의 면담이 준비되어 있다.
한 바리새인이 있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자신의 식사자리에 초청한다. 이 초대자리는 어떤 자리였을까? 아마도 누가복음 16장의 거리 나사로와 부자의 잔치에 관한 이야기는 이 바리새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 자리는 단지 바리새인과 예수의 저녁 식사자리가 아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유명인사를 예수를 초청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지위를 과신하려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VIP석으로 부르지 않았다. 상석은 바리새인이 앉고, 그 주변엔 친한 친구들이 앉았을 것이다. 예수는 저 아래쪽에 따로 준비된 상에 덩그러니 그 제자들과 같이 앉았을 것이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에겐 관심이 없다. 그는 예수의 말을 듣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러놓고는 꿔다논 보릿자루마양 앉아있는 예수를 보며 혀를 차기까지 한다.
'이그 저, 더러운 죄인이 다가오는데도 가만있는 꼴 좀 봐'
바리새인과 멀리 떨어져있던 것은 오히려 그 여인에게는 다행이었다. 그 여인은 바리새인과 떨어져 하석에 앉은 예수를 찾아왔다. 아마도 그곳에 바리새인과 그 친구들, 그리고 여러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었던 것 같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리새인은 예수를 하석에 앉히며 자신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래 나는 저 예수 조차도 내 밥상 아래에 둘 정도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다!' 라는 것이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부른 목적이다.
예수의 발 아래에 앉은 여인은 울기 시작한다. 그 눈물이 그치지 않아 예수의 발을 적신다. 그리고 여인은 당황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눈물을 훔친다. 계속 흘리는 눈물과 그것을 계속해서 닦아내는 여인의 머릿가락, 그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발에 향유를 붓는다. 그 광경을 보고있는 바리새인과 예수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바리새인 시몬은 '저 더러운 죄인이!!' 라는 마음을 품었고, 예수는 하나님께 돌아온 잃은 양을 발견한 것이다. 예수는 시몬을 부른다. 시몬아, 한 사람은 천만원 빛을 졌고, 다른 사람은 일억 빛을 졌다. 갚은 능력이 없어서 둘 다 빛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누가 더 고마워 하겠느냐? 성경본문을 조금 현대식으로 풀어본 것이다. 그러면 이런 뜻이 된다.
시몬은 당연하다는듯이 말한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두 사람의 차이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은 식사를 초청하고 자신을 불러들인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식사하는 장소에 와서 발 밑에 앉아 울고 있는 사람이다.
우선 상식적인 생각을 해보자.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문화적 양식에 맞게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저녁 식사를 초대했으면 그 손님이 왔을때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상식이다.
손님에게 발을 씻을 물은 줘야한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은 먼지가 많아 약간만 이동해도 발이 금새 더러워진다. 초청된 손님은 발을 씻고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상식적인 대접조차 바리새인은 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여자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자신의 눈물을 사용했다.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44절)"
여인은 발을 씻을 물을 따로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로 발을 닦았다고 예수는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울어서 눈물이 발에 떨어져 더러워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오히려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수건이 아닌 머리털로, 여자에게 있어 어쩌면 너무나도 귀한 그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상식을 본다. 초청된 자를 반겨 맞이 할때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하는 것이 당시의 문화적 상식이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예수를 맞이하면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예수가 자신의 집에 와서 들러리처럼 있어주기만을 원했을 뿐이다. 심지어 그렇다고할지라도 그는 예수에게 정중한 인삿말과 입맞춤의 안부를 물어야했다. 하지만 그는 당연한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
반면 여인은 어떤가? 그녀는 입맞춤의 인사대신, 예수의 발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감히 예수 앞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인사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리새인은 감람유를 손님의 머리에 부어야 했다. 초청을 했고, 그래서 온 손님에게 최소한 상식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어떠했는가? 이 여인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향유는 당시 가장 고가의 기름으로 여자들은 결혼을 위해 이 향유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향유는 여자에게는 결혼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모습, 지나치다고도 말할 수 있는 모습이다.
여인의 모습은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고 예수는 말한다. 상식을 지켜야 하는 세상과 상식에 못미치는 바리새인의 모습, 그리고 죄인이라고 불리는 한 여인이 상식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 속에서 예수는 이 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Case 1. 하나님 앞에 선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를 주라 부르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 6:46)
그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를 이용한다. 그를 위해서는 싸구려 감람유도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위해서는 온갖 친구들을 불러 비싼 잔치를 벌인다. 그의 말은 들을 생각도 않으면서 그의 앞에 있는 죄인을 보며 그를 비난할 거리를 찾는다. 이것은 단지 바리새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어쩌면 오늘 한국 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려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이라함은 그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그 죄를 슬퍼서 울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왔던 것마저 기꺼이 내려 놓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다.
Case 2. 황금률을 포기 하고 싶은 사회
세상은 상식을 말한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상식에 한참 못미치는 삶을 살아간다. 이라크 파병을 연장한다.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국익을 외치며, 미국의 눈치를 보는 패거리의 패악스러움에 물들어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6:31)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이것은 황금률이라고도 불린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도덕으로 이 황금률은 최고의 위치에 있다. 상식은 그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황금률을 최고의 위치에 계속 버려둔 채 그것을 어떻게하면 부담을 덜 느끼면서 편히 지낼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이룰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잊을지를 고민한다.
신은 없다, 절대적 진리는 없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굳이 득보다 실이 큰 일에 명분만 가지고 손해를 보는 것은 바보짓이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를 돕기 위해 왕따가 되는 것 보다는 나도 그 패거리에 끼여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이 지혜다, 어느틈엔가 이러한 것들이 지혜가 되어 버린 사회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라를 위해서, 혹은 신념을 위해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이미 구석기적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 사회속에서 황금률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더 적합한 것은 '수인의 딜레마'에 갇힌 상태에서 어떻게하면 덜 손해를 볼까하는 Local Minimun을 찾는 일이다.
Case 3. 구원이 선포되다
이 본문의 마지막에 구원이 선포된다. 이 구원은 어떻게 선포되었는가? 이 구원은 여인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구원인가? 아니다. 그녀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향유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된다. 예수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표현한 한 죄인이었던 여인에게 죄의 사함을 선언한다. 죄의 사함은 어느 누구도 할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분의 제외하고는 말이다. 죄의 사함이 선언되고, 그리고 거기엔 구원받은 한 영혼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그러면 바리새인은 어떤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적게 받은 사람인가? 혹은 받지 못한 사람인가? 분명한 것은 그의 모습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적게 받았거나 혹은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단,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사랑을 적게 베풀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리새인은 예수를 초청할 수 있었고, 그때 예수가 그의 집에 직접 들어가 그와 대면할 기회까지 가질수 있었다. 만약 지금 예수가 필자의 집에 온다면 필자는 땅과 집을 다 팔아서라도 저녁을 대접할 의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은 그 기회를 스스로 헛되게 버린 것이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그를 적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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