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7. 16:08ㆍLife/Christian
섬기는 자가 큰 세상 (2010-02-D)
(막10:32-45) 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 지도자를 나누는 네 가지 분류
지도자를 통상 네 부류로 나눠서 이해하곤 한다. 첫 번째 부류는 열심이 있고 똑똑한 지도자이고, 두 번째 부류는 열심은 있되 미련한 지도자, 세 번째 부류는 게으르지만 똑똑한 지도자, 마지막 네번째 부류는 게으르고 미련한 지도자가 그것이다. 여기서 부하직원이 가장 좋은 점수를 주는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일까? 또 부하직원이 보기에 제일 감당하기 어려운 지도자는 어떤 타입의 지도자일까?
가장 좋은 점수를 받는 지도자를 열심이 있으며 똑똑한 첫 번째 부류라고 생각했는가? 아니다. 아랫사람의 입장에서 제일 좋은 지도자는 게으르지만 똑똑한 세 번째 부류다. 자신이 특별한 열심을 내지 않으므로 부하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동시에 똑똑하므로 일이 잘못되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줄 수 있고, 부하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일을 망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막아준다. 부하들의 입장에서는 성가시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이 잘못되지 않게 잘 막아주고 또 필요하다면 일을 할 방법을 알려주고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맡겨준다. 이런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을 키워주는 지도자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은 이런 지도자를 최고의 지도자로 뽑는다. 이런 지도자의 아래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는 방식을 체험적으로 배우고, 스스로 터득해간다.
그러면 부하직원의 입장에서 제일 감당하기 어려운 지도자는 어떤 타입일까? 게으르고 미련한 네 번째 부류라고 생각을 했다면 역시 잘못 생각한 것이다. 제발 이런 사람만은 아니었으면 하는 지도자 스타일은 열심은 있되 미련한 두 번째 스타일이다. 게으르고 미련한 지도자는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에 간섭은 하지 않기에 적어도 무슨 일을 할 때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열심을 가진 미련한 두 번째 부류의 지도자는 미련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일의 중요도도 파악하지 못한다. 결국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한다. 일본의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의 소설속에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내일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식당에서 채소를 바닥에 떨어뜨려 지저분하게 했다는 이유로 전체 병사들을 모아 정신교육을 시키고 기합을 준다. 그 지도자가 할 줄 아는 유일한 것은 식당을 깨끗하게 하는 것 뿐이었고, 결국 그는 그의 뜻대로 식당은 깨끗하게 했지만 이미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은 그 전투는 패전하고 만다. 열심은 있되 미련한 지도자를 둔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면 직장의 아랫사람들도 배울 것이 없다. 한 수나 두 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을뿐더러, 중요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도 못한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지도자만큼 성가시고 불편한 지도자도 없다.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지도자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또 이런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면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화를 낸다.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어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개인적인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상사를 둔 아랫사람들은 알아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신세가 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런 현상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과거 일본이 그러했고, 현재 한국이 그렇다.
권위를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여전히 이런 경향을 병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군대가 그렇고, 정치계가 그렇고, 또 종교계가 그렇다. 한국 교회 역시도 이러한 잘못된 권위주의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고, 그것을 고치려는 시도조차 잘못된 성경해석을 이용해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하다.
2. 제자들의 지도자관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지나친 열심을 억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 제자들과 함께 다녔지만 거기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하나 하나 다 가르치지 않는다. 제자들을 모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라 강의하지 않는다. 때로는 거리를 다니며 말하고, 때로는 들판의 꽃을 보며 말하고, 때로는 고기를 잡는 어부를 보며 말했다. 삼년간 매일 가르쳤던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이후에 또 다른 보혜사가 올 것과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보다 훨씬 먼 미래를 보시며 한 걸음씩 그 길을 안내하신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삼년이라는 시간이 모든 것을 제대로 깨닫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은 아직 그들의 가치관 속에서 여전히 깨이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라서 오는 수치감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마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위치에 서고 싶어하는 마음, 이런 마음으로 예수 앞에 섰기에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었다. 이러한 은밀한 욕망이 분출되는 계기가 나온다. 모두가 은밀히 품던 욕망을 누군가 한 사람이 드러내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은 은밀한 상태로 남아있지 못하게 된다. 제자들 중에 있었던 그 은밀한 욕망은 결국 경쟁하듯이 서로를 헐뜯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더 높은 위치에 있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은 예수의 제자라는 자리를 상류사회로 들어가는 통로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지도자가 되는 것, 높은 위치에 가는 것을 이 사회의 귀족이 되는 것, 사람들을 통치하고 누르며 높은 자리에 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3. 추노, 반상과 양천에 대한 고민
추노라는 드라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노비의 신분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업복이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한다. “노비와 양반이 바뀌는 것보다 노비, 양반 구분 없는 세상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초복이라는 인물이 이런 대답을 한다. “노비 양반 구분없는 세상이 좋지만 그래도 저는 양반들에게 복수는 하고 싶어요.” 아비는 한겨울에 얼음을 캐오다 빠져죽고, 어미는 다른 집에 팔려가고, 도망가다 잡혀와 얼굴에 낙인이 찍혀 더 이상 여자로 사는 것 조차 불가능한 여인의 입장에서 이런 인생의 막장까지 자신을 몰고온 양반들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 드라마상에서는 오히려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반상의 구별, 양천의 구별이 과연 역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지금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반상의 틀 속에서 살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유치원에서부터 집의 평수로 친구와 소속집단이 결정된다. 서울인지 지방인지, 강남인지 강북인지, 아파트인지 아닌지, 50평 이상인지 아닌지로 그가 어느 계급에 속했는지가 결정된다. 보이지 않는 현대의 반상의 틀 속에서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애를 쓴다. 상위 5%에 들기 위해, 혹은 상위 1%, 0.1%에 들기 위해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쟁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피라밋을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야지, 내 아들은 내 딸은 꼭 저기 올라가게 해야지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 양인과 천민의 구분은 이미 조선시대를 마치며 사라졌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또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다.
4. 예수, 이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한 존재
그 모든 노력의 앞에서 예수는 그 모든 것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으뜸이 되고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종이 될 것을 말한다. 으뜸이 되고자 예수를 찾은 이들에게 종이 될 것을 말했으니 제자들이나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 그것을 요구하는 예수의 말 앞에서 제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추구한 것들과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에 그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돌아간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이 모든 것들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으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 모든 사람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명령하고 호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으뜸이 되는 사람은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으뜸이 되는 사람은 그들의 부족을 채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교만은 지독하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을 듣고 마치 자신은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를 든다. 그 이유는 저들이 내 섬김을 받지 않으려한다는 것이고, 저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포장된 이러한 교만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처럼 조금씩 교회 공동체를 잠식해간다. 왜 내가 너희들을 위해주는 이 마음을 몰라주느냐, 왜 내가 이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데 이것을 몰라주느냐, 왜 내가 이렇게 열심을 다해 섬기고 있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느냐, 이러한 마음을 가진다.
교회에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첫 번째가 목사고 다음이 장로들이다. (공항-목사) 권사들과 집사들도 역시 두드러져 보이는 위치에 있으며 안내를 하는 사람들과 각 전도회의 회장들도 이렇게 두드러져 보이는 위치에 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인사를 받으려한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교묘한 말로 자신을 속인다. 나는 인사를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려한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하면서 어느 사이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고 정말로 착각하게 된다. 아이를 가르칠 때 처음 아이를 야단칠 때는 진심으로 아이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해진 어느 순간 더 이상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위험한 것이다.
예수는 높아지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높아지려고 노력해서 높아질 수 없다. 최소한 하나님나라에서의 높임받음은 하나님이 정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한 방법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높임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자리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그러한 고통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종이 되어 섬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범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개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결정해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함께 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결정이기도 하다.
5. 섬기는 자가 큰 세상
그러기에 그의 나라에서 높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으로 높은 사람은 모든 이들의 종으로서 심지어 그에게 침을 뱉고, 그를 모욕하며, 그를 욕한다고 할지라도 그 앞에서 종의 모습으로 더욱 낮아지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그의 발을 씻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모른채 한다고 마음 아파하는 것, 그것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섬기는 종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내 앞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더라도, 내 눈 앞에서 방문을 꽝하는 큰 소리를 내며 닫더라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종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한다며, 으뜸인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는 스스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왜 섬기는 자가 큰 세상을 말하고 있을까?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면, 큰 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이 자신의 힘을 분출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속에서 낮은자, 작은자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 밖에 없다. 물론 세상에서 큰자는 로또1등 당첨 자체를 우습게 볼 것이지만 그것만이라도 갖는 것이 유일하게 조금 더 높은 위치로 도약하는 방법이라고 믿게 된다. 원시시대에만 그랬을까? 로마의 식민통치나 아니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만 해당되는 일일까? 아니다 이 세상은 교묘하게 우리를 속인다. 무엇이든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고 속삭이지만 정작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것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줍는 정도에 불과하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많은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복권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가?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린 사람이 많은 돈을 가졌을까? 아니면 카지노를 가진 사람이 많은 돈을 가졌을까? 이런 세상의 질서에 대해 그리스도는 분명한 단절을 선언한다. 그리고 종이 된 자가 큰 세상, 섬기는 자가 큰 세상을 말한다. 그런 세상을 오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우리를 그 세상에 초대하겠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나라가 완전히 오기전에 그 나라의 삶의 방식을 연습하는 것이다. 종이 되는 삶의 방식을 연습하는 것, 섬기는 삶의 방식을 연습하는 것, 낮아지는 삶의 방식을 연습하는 것,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간소하게 사는 심플라이프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그의 나라에서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누군가 내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일것을 바라는 순간, 거기 그리스도가 고개를 숙인 채 우리를 영접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주인이 종을 위해 봉사하는 나라, 더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해 섬기는 나라, 그 나라의 국민은 하나님께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작은 자를 위해 기꺼이 섬기는 삶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연습하는 것, 그것을 훈련하는 것, 그러한 삶의 방식의 기쁨을 미리 맛 보는 것, 그것이 오늘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이 되어야한다.
섬기는 자가 큰 세상 (2010-02-D)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201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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