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조건 (1) - 이국운

2008. 6. 20. 19:53Life

- 이 글은 1989년 사랑의 교회 대학부에서 발간한 찬양모음집 [내 영혼의 찬양]의 서문이다. 글을 쓰신 이국운 님은 현재 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이다.- [VIA:많은물소리]


변명

늘상 기쁜 마음으로 찬양을 하면서도 그 기쁨을 삶으로 깊숙이 연결시킬 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몇마디 말들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을 부추기는 짓궂은 일입니다. 소경이 밝은 세상을 말할 수 없듯이, 우리는 단지 환하게 빛나는 그 무엇에 대한 안타까운 인상을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많은 망설임과 어색한 더듬거림이 지나간 다음에야 말입니다.

이 글은 1989년도에 새로 개편된 사랑의 교회 대학부 찬양집의 '서문' 비슷한 글입니다만 지금 말씀드리는 부끄러움 말고도 몇가지 변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첫째로 워낙에 재주가 없고, 진지하지 못한 탓에 찬양의 조건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내걸긴 하였지만 그것에 걸맞는 기름진 내용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찬양집의 편집에 아는 바가 전무한 형편이고 보면 그 입장을 변호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그 어떤 태도도 제겐 불가능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원리부연적인 설명이나 비판적 서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자리를 비워두었다가 나중에 채워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여 무례를 무릅쓰고 요사이 우리들 사이에서 불리워지는 이른바 '찬양'들에 관하여 평소에 느껴왔던 몇가지 인상들을 적어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때로 성숙되지 못한 생각이나 신경질적인 반응이 보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감수하고 만용을 부려보는 것은, 참으로 정직하게 안타까움을 적어낸다면, 이후 누군가 그것을 딛고 나아가기가 한결 수월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중요성

요사이는 아주 흔한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얼마 전만 해도 차 속에서나 걸어다니면서 이어폰을 꽂고 흥얼거리는 사람들은 꽤나 선택받은 족속이었습니다. 문명의 혜택이랄까요. 어떠한 소음 속에서도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축복이긴 하겠습니다만, 때때로 그것이 우리들의 조용한 산책을, 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넉넉함을 빼앗아가고 있는 듯하여 못내 아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선놀음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애써 평강을 외치지 않고 오히려 있는 고독에 정직한 것이 하나님을 묵상하기에 이로울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찬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쓰이는 빈도로 보아 그 말의 의미는 노랗고 빨간 티셔츠를 입은 건강하게 생긴 젊은 사람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노래하고 있는 모습(어떤 사람은 손을 들기도 하고, 누군가는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하나같이 최선의 선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요함과 광활함 같은 것이 끼여들 여지도 없이 그것은 무슨 흥겨운 분위기와 기쁜 열기로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이라는 그 말이 기타라는 악기와 무슨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더니 요사이는 점점 기름칠한 머리와 밝은 색의 옷가지들도 그것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절실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 말입니다.

거대한 산맥의 큰 봉우리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그리 크게 외칠 것도 없이, 말할것도 없이, 그저 큰 자연과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의 품에 안긴 벅찬 감격을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늘 찬양할 수는 없을까요? '호연지기'를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그 웅혼함을 우리의 찬양 안에 담을 수는 없을까요?

150편의 시편과 성경의 곳곳에 등장하는 많은 찬양들이 왜 가사만 적혀 내려오고 있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수많은 곡조를 붙여 찬양하고 묵상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발견된 것은 그것이 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철학자들의 난잡한 글보다 깊은 통찰과, 데이비드 린이나 윌리암 와일러의 웅대한 앵글도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한과 아픔과 행복과 분노가 어우러져 있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였습니다. 그것을 씹고 곱씹으면 그 안에 사상과 율동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연을 가지고 그것들을 읽으면, 우리 안에도 그런 깨어짐과 함의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쁨을 기쁨으로 말하지 않고, 아픔을 아픔으로 말하지 않고, 그것을 삶으로 형상화해낸 숨쉬는 예술, 그것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시의 가슴으로 하나님과 그 분이 주신 세계를 묵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어폰을 귓구멍에 틀어넣는 수선을 부리지 않고도 더 진솔하게 그 분을 찬양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시의 맥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만 이 찬양을 통해 여호와의 크심과 인자하심을 이해하고, 회개케 하시고, 치유하시며, 일하게 하시는, 찬양의 능력을 역동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요로도, 동요로도, 술판의 노래로도, 선비들의 시조로도, 판소리로도, 군가로도, 장송곡으로도, 행진곡으로도,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 너머에 있는 시의 호흡을 아는 사람만이 교향악과, 오페라와, 일터의 망치소리와, 빗소리와, 새들의 지저귐과, 자동차들의 빵빵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여호와의 거룩하심에 대한 찬양과, 그에 대한 간구가 올려지고 있음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고독한 아픔을 넘치는 감사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이어야만 하겠습니다.

4박자의 춤

시에 관하여 말하다 보니까 꼭 무슨 고아하고 순결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씀드리게 된 것 같습니다만 사실 진정한 시가 삶인 것처럼 우리는 그것을 매우 현실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사건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렀던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임금님인 다윗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얘기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시란 분명히 그렇게 삶 속에서 표현되는현실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한가지 잘못된 의식이 많이 퍼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어찌되었건 진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귀한 예물이 될 것이라는 견해 말입니다. 큰 관용과 덕스러움이 들어있는 이 견해는 그 말 자체로는 분명 하나도 틀린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견해가 스스로를 무비판적인 중립주의자로 얽어매 놓고 그 틈을 타 우리의 찬양이 사람들의 노랫가락을 무심코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한가지 겸손한 선택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비를 가리는 사랑의 정신'을 일깨워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음악하는 친구들에게 들으니 음악이라고 하는 예술활동은 크게 네 개의 활동들이 서로 엇물려서 돌아갈 때 건전하게 발전될 수 있다고 합니다. 창작과 연주, 그리고 비평과 이론화의 활동들 말입니다.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작품이 제시되고, 그것이 탁월한 연주가들에 의해 재현되고, 창작과 연주에 대하여 정리된 관점 속에서 잠정적이지만 분명한 평가가 행해지고, 그것이 세계와 인간과 구원과 음악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 속으로 수렴될 때, 그리고 그것이 다음 세대에서 창작과 연주활동에 되먹임될 때 음악이 건전하게 제 사명을 수행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은 얘기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음악활동이 그러할진대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을 전파하는 중요한 무기로서의 찬양이 그러한 재생산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말입니다.

경박한 말싸움과 감정대립으로 치달을 위험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찬양으로 지키려는 비평과 이론화의 작업 역시 하나의 훌륭한 찬양이 됨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찬양은, 우리의 시는 겸손과 감사의 터 위에서 창작과 연주와 비평과 이론으로 이루어지는 절실한 현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 임금을 쫓아가는 참으로 흥겨운 4박자의 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