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로 가득한 예배

2007. 10. 9. 04:00Life


기계로 가득한 예배
청년회 칼럼 [2005.05.22]
* 2005년에 썼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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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사실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공학박사과정을 밟으며 왠만한 IT 관련 일들은 별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면서 이런 이기( 利器)들이 생활에 더 깊이 관여하게 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내면서도 때로는 이런 것들에 지배되는 우리네 일상에 연민을 가지게 된다.

예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전에는 밤에는 당연히 잠을 자는 것이었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는 당연히 먼 거리를 이동할 때 걸어가거나 말 같은 수단을 사용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는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편지를 써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어찌보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었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결국 이것들이 주어지지 않는 환경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자신의 편리를 위해 휴대한 휴대전화는 어느 사이엔가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얽매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예전 80년대 후반, 한국교회는 갑작스런 찬양집회 열풍에 휩쓸렸다. 왠만한 대형 교회들은 너나 없이 모두 찬양단을 만들고, 찬양집회를 구성했다. 그때 원조격이었던 두란노 목요모임은 이런 찬양단들의 모델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찬양팀을 만들고 찬양집회를 열수 있는지 배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앰프와 스피커 시스템으로 EV 라는 이름이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거기 사용된 앰프가 무엇인지, 거기 쓰인 스피커가 무엇인지, 어떤 신디로 연주를 하고, 어떤 드럼이 있는지 관심을 가졌다. 그 문명의 이기( 利器) 를 사용하면 자신들도 같은 소리와 같은 집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드릴 수 있게 해준 역할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이런 것들에 매달려 이것들이 빠진 예배를 예배로 인식하지 않게 되거나, 혹은 이런 것들로 인해 예배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바른 예배에 관한 잘못된 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필자는 예배에 대한 하나의 모형으로 가지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낮은 동산에 올라 주위에 수천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을 보며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그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예수에게 수천의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고성능의 앰프시스템이 있었을까? 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비춰주기 위한 고해상도의 노트북과 빔프로젝트가 있었을까? 거기 있었던 것은 단지 예수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배가 있었다.

우리는 예배를 돕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한다. 찬양하기 위해 가사들을 프로젝트로 비춰주고 노래하기 위해 신디와 전자악기들을 다룬다. 목소리만으로 노래하기보다는 마이크를 사용해서 소리를 증폭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듣도록, 또 그들의 귀에 아름답게 들리도록 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예배를 돕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우리의 예배는 이것들의 도움을 받는 대신, 이것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집회를 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품목으로 EV 라는 이름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점에 젊은이들에게 호소한다. 진정한 예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거기에 기타가 있거나 없거나, 피아노가 있거나 없거나, 신디가 있거나 없거나, 빔프로젝트와 OHP가 있거나 없거나, 마이크와 앰프시스템이 있거나 없거나 말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예배를 보조하고 돕는 정도가 지나쳐 이것들이 없거나 부족함으로 인해 예배가 방해받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예배가 아니다.

왜 욥이 대단한지 아는가? 욥은 모든 것을 가졌을 때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했다. 모든 것을 완전히 다 잃어버린 후에도 욥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예배를 방해할 수 없음을, 자신이 잃어버린 어떤 것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배를 방해할 수 없음을 ...

하나의 형식에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그것에서 벗어난 것이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거기서 부족한 것 때문에 예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것, 그것은 이미 우리가 본질의 예배가 아닌 형식에 집중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진정한 찬양은 기타 하나만 있어도 된다. 아니 기타 하나 조차 없어도 된다. 목소리만으로, 심지어 목소리조차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다.

가끔씩 청년회 예배를 드릴 때 아무런 방송장비를 사용하지 말고 드려보자. 마이크까지도 모두 끄고, 정말 예전 동산에 예수의 주위로 모여든 그때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배를 드려보자.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를 만나보자. 앰프로 치장된 음, 에어컨으로 알맞게 냉각된 환경, 눈앞에 펼쳐진 프로젝트의 화면, 이 모든 것을 벗어나서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에서 예수의 마음을 느껴보자. 조금 더우면 어떤가? 조금 찬양의 가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어떤가? 조금 음이 틀리면 또 어떤가? 조금 설교자의 목소리가 작으면 어떤가?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면, 말씀을 듣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기도를 진정으로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예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