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0. 9. 03:45ㆍLife
* 예전 20006년 2월에 보았던 영화의 개인적인 소감이다. 적당히 보고 썼던 글이고, 어디에 실리기 위한 글도 아닌지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블로그 한곳에 내 글을들 모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씩 정리하고 있다.
***** 이 글은 영화 뮌헨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수 있습니다. 혹시 영화를 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영화를 본 다음에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 Operation Wrath of God
1972년 뮌헨올림픽이 한창이던 때에 일어난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한
테러사건은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234명의 팔레스타인 죄수의 석방을 요청했고, 결국 총과 폭발로
모든 인질은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전세계에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보복작전을 촉발하게 된다. 이 작전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신의 분노(Operation Wrath of God)] 작전이다.
언제부터인지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인간은 자기 의지대로 신의 마음을 가늠한다.
이슬람은 자신들
의 무장투쟁이 성전(holy war)이라고 말하고, 이것은 미국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성경을 보면 이미
구약성경의 무수한 민족들이 자신들의 신을 가지고, 그 신을 이용하는 것이 보여진다. 스스로를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신을 자신의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춤추게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신의 뜻의 가늠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그 신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끼워맞추고 만다.
애국, 유대교의 하나님의 민족애에 호소하는 국가의 부름에 애브너(에릭 바나)는 별다른
고민없이 선뜻 암살요원의 자리를 수락한다. 기꺼이 한몸 바쳐 민족과 조국에, 그리고 God 의 부름에 순응하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애브너는 최고의 팀을 조직, 뮌헨 학살의 책임자들을 하나씩 찾아가며 제거하게 된다.
*** 역시 스필버그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홍보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주제를 건드릴 때부터 친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스필버그의 예측은 일부 극단적 유대인들의 불쾌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역시 스필버그는
바보는 아니다.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는 어떤 식으로든 결코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는 않는다. 흥행에 촛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또
다른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있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를 보며 그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이 영화가 우파적 성향이
짙은 유대인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이 영화는 지금까지 그려왔던 테러범들에 대한 다이하드적 응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폭력은 다른 헐리웃 영화에 비해 훨씬 사실적이며, 추악하고, 도저히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
한국의 많은 영화들이 조폭들의 세계를 동경하는 듯한 영상을 그리고, 대다수의 뮤직비디오의 영상이 폭력을 미화하는 것에 반해 스필버그는 폭력은
결코 동경해서도, 또 미화할 수도 없는 것임을 영상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쩔수 없는 트라우마의 잔존을 깨끗이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들의 손가락질과 구타를 당했던 암울한 소년기를 보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부모의 이혼과 늘상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트라우마의 잔존으로 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필모그라피는 항상 [가족]에 대한 강조를
잊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지만, 결국 개인의 회귀처는 가족이라는 메시지로 끝을 맺고 있다.
영화에서 애브너는
이스라엘의 암살단의 리더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조금씩 회의를 느끼게 된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계속 갈등하게 된다. 암살단의
책임자의 갈등, 여기서 관객은 이스라엘의 정의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정도 느끼지 않게 된다. 스필버그는 더 이상 관객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 애브너
검은 9월단의 테러에 대한 보복조치의 정당성, 하지만 그 보복을 위해 나선 애브너는 혹시나
민간인 희생자가 생길것을 두려워하며 파리에서 함샤리의 암살때 어린 딸의 목소리에 폭발스위치를 누르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 뛰어 저지시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미 관객의 눈에 비친 애브너는 검은 9월단과는 다른 광신적 살인마가 아닌 자격있는(qualified) 살인 집행관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11명을 차례로 암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애브너는 보복조치로 또 다른 테러들이 일어나는 것을 듣게 된다. 영화는 11명에 대한
보복조치로 공항에 있는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전달한다. 약국에 폭탄이 터졌다는 소식도 전해준다.
애브너의 고뇌에 찬 표정연기는 압권이다. 적어도 애릭 바나라는 이름을 이전에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 영화로 인해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년생 모사드의 일원에서 암살팀의 리더를 맡으며 왕성하게 애국심에
불타는 표정부터 서서히 갈등을 겪게 되는 모습을 거쳐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을 눈 앞에 둔 극도의 공포를 담고 있는 표정까지 애릭
바나라는 존재는 서서히 관객의 뇌리에 깊숙히 침투해 간다. 그리고 서서히 관객과 동화되어 간다.
폭력은 폭력에 대한 대답이 될수 없다. 그것을 말하려는 의도였을까? 하지만 왠지 11명대
공항과 약국의 폭파사건을 통해 한 아이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적인 이스라엘의 암살자집단과 자신들의 이기적 목표 달성을 위해 올림픽에 참여한
관계없는 선수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공항과 약국에 폭발물 테러를 일삼는 광신도 집단을 비교하는 듯한 기분은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도 선택하지 않은 스필버그는 무언중에 그 사이에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도록 관객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느끼는 것은 나 혼자일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중지하게 하려는 시도는 실제로는
강자의 편에 서서 그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중동지역의 불화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개별적인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전쟁이 될수 없을만큼의 거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유로 엄청난 장벽을 쌓아 고립시킨채 말려죽이는 정책을
쓰고 있으며, 지금도 거대한 화력의 폭격이 난민들이 있건 없건 퍼붓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는 이런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엄청난 살상앞에 영화는 단지 한
개인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려고 한다. 감독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은채 그저 고뇌하는
주인공의 얼굴과 그 고통으로 일그러진 몸을 아내를 통해 풀고 있는 한 불쌍한 사람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끝을 맺는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것은 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같은 위치에 놓인 존재로
인식되고 그 사이에서 애브너라는 한 개인의 고통만을 보여주며 그것으로 관객의 판단을 유보시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 눈에 보이는 작은 한두가지의 단서만으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하고, 누가 누구에 대해 살인의 권리가 있는지를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두 강대국의 사이에 끼인 작은 소시민의 고뇌를 전부인양 보임으로 거대한 힘을 가진 이스라엘과
빌붙어 살 땅마저 사라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이해관계에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의 틈새조차 허용하지 않게 될 사람들이 두려운 것이다.
*** 영화의 리얼리티즘
15세 관람가의 영화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장면들이 계속 등장한다. 마치
공포영화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사지가 찢어진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장면이나 테러범의 머리에 칼을 꽂는 장면, 알몸의 여인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장면, 애브너와 그 아내의 잠자리장면 등, 이 장면들은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미 스필버그의 필모그라피에서 충분히 짐작하고
예상했던 만큼 이 리얼리즘은 폭력을 미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그것을 아무리 아름다운 것으로 치장해도 그것은 사람의 사지가
찢겨나가고 생명이 끊어지는 것일 뿐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스필버그의 영상은 테러에 대한, 전쟁에 대한, 폭력에 대한 미학을
추구하지 않으며 참혹성을 주고자 한 것은 감독의 목적에 충실하게 이행된 부분이다.
*** 영화를 뛰어 넘어 대안의 세계로 ...
영화속에서 정보를 파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단 한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가 죽고 죽는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다만,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그 댓가로 거액의 돈을 받을 뿐이다. 그들은 애브너에게 정보를 팔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애브너의 정보를 제공한다.
스필버그는
철저하게 기독교에 대해서는 배타성을 드러낸다. 2시간 40분이 넘는 영화에서 단 한번 식사기도를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보를
파는 상인들의 식탁이 꾸며져있다.
정교분리를 외치지만 실제로 돈의 유무로 축복의 기준을 삼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나름의 반발이었을까?
정보상인들의 모습은 잠간 등장하는 정도였지만 실제로 그들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원흉과 같은 존재로 부각된다. 그 식탁에서 십자가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원칙마저 입밖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덮고마는 스크루지의 포장지의 역할이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는 결론을 내지 않는다. 아니 스필버그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유대인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상태이고, 유일한 대안을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유일한 대안, 그것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의 말에 절대적인 순종을 보이는 것 외에는 없다.
힘은 힘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한다. 적국에 원자폭탄이 있으면 그 이상의 원폭을 보유하면 전쟁이 억제되리라고 생각했다. 세계는 군비를 계속해서
늘려만간다. 미국은 쌓여있는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일정기간마다 그 무기를 소모할 전쟁을 필요로 했다. Lord Of War 라는 영화에서 한
무기상인의 모습은 현재의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은 이런 군사력의 축적은 심각한 병폐를 보이고 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힘으로 누르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적당히 둘러댄다. 강대국의 말은 진리가 되고, 약소국의 말은 핑계가 된다. 힘이 있기에 그 말은 진리가 있고, 힘이
없기에 그 말은 무시당한다.
이 세상은 절대로 평화로와질수 없다. 그것은 스필버그 역시 공감하고 있다. 대안을 인정하지 않은 스필버그의
마지막 탈출구는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린 채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피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기고,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에게 맡기고, 그리고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지지 말고 그저 가정이라는 도피처로 피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말은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될수 있다. 아니, 이외에 다른 대안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예수의 설교는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말이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실천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기에 대안이 될수 있다.
이 세상이 풀수 없는 문제기에 이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이 세상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없는 돌파구를 찾는것이 유일한 해법이 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말,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 이것은 세상의 방식으로는 이해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국가]라는 존재가 걸리면 더 불가능해지는 말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그 작은 주먹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힘있는 존재로 팔레스타인에 폭격을 하는 것이다.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무너뜨린다. 상대가 일어날수 없을때까지 철저하게 파괴한다. 이것이 세상의 법이다. 이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지구인 것이다.
이 법칙에 지배받는 한 이 세상은 영원히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도피처를 찾아 도망가고 만다. 고작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여기 가면 더 이상 그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시적인 마약같은 임시처방만을 내려줄 따름이다.
예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유대인은 이 대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유대의 트라우마를 가진 스필버그 역시 십자가는 단지 정보상인의 식탁 장식품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의를 위해 무력을 선택해 PLO역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기엔 항상 피와 죽음과 고통과 원한, 그리고 복수에 복수가 꼬리를 이을 뿐이다.
산상설교의 내용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니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한 자만이 산상설교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자만이 이 세상의 대안이 될수 있다. 이 세상의 가치에 대해서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자만이 예수의 도를 받아들이고 그 도를 삶의 실천강령을 삼아 본을 보일수 있다. 그 자만이 이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설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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