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단상] 기독교 도덕
2007. 11. 22. 13:24ㆍLife
1. 초딩적 도덕의 이해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뜻 떠오르는 이미지는 내가 자유롭고자 하는데 방해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된다. 재미있게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것, 자유롭게 방탕해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보통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뜻 우리 속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떠올려지게 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하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말이다.
필자는 이것을 초딩적 도덕의 이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딩적이라는 말은 어리거나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도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기에 생겨난, 그리고 고착된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을 말하면 보통 철학자들의 듣기 거북한 개념어들을 가져와 설명하곤 한다. 형이상학이 어쩌구, 헤겔이 어쩌구, 저쩌구, 등등... 이런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정작 이러한 철학적 접근은 오히려 도덕의 실생활속에서의 자리매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이상과 이상주의를 말하면서 도덕은 절대선과 현실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잘난척 하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 듯한 오도된 현상을 낳기까지 한다.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보다는 왜 그 신호등의 신호가 사회에 득보다 실이 많음을 열띠게 웅변하는 듣보잡이 더 주목받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블로그에 올린 글 "부끄러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 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히 이 사회가 가진 도덕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수 있겠다. 그들에게 도덕이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못되고 형편없는 그래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퇴직교사의 헛소리"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2. 그렇다면 도덕은 필요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것이 필요없다고 입을 모으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에 대해서는 지극히 너그러우며 동시에 타인에 대해서는 이 도덕의 자를 가져다 재기 좋아하는 존재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그런 일을 우리는, 이 사회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사회는 도덕을 필요로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도덕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덕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도덕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도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만약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이 도덕이 제한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환경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이 전무해진다. 수인의 딜레마는 두명의 죄인을 각각 심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에 대한 게임이론이다. 심문자는 두 죄인에게 각각 별도의 방에서 죄를 자수할 것을 권한다. 만약 죄를 자수하면 다른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기간 복역을 하게 된다. 10년이라고 하자. 죄수 A 가 자백을 하면 A는 바로 풀려난다. 대신에 죄수 B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10년을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자백을 하지 않으며 증거불충분으로 둘 모두 2년의 형량만 채우면 된다. 세번째 경우, 만약 두 사람 모두 자백을 하게 되면 두사람 모두 10년동안 장기간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최선의 선택은 두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음으로서 모두 2년만 살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두사람 모두가 자백하는 것으로 모두 10년간 감옥에 갇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왜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입을 열거나 입을 다물거나 간에 내가 입을 여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이 수인의 딜레마의 내용이다. 스스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지만, 결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마는 것, 이것이 바로 지능을 지녔다는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사회적 도덕은 이러한 한계상황에 종종 처하게 된다. 노사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결과 타협의 구도속에서 이러한 게임이론이 작용한다. 매년 연말이면 뒤집어지는 도로의 보드블럭에서도 개별 자치단체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전체를 봐서는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된다. 미국에서 남아도는 곡류를 기아로 죽어가는 나라에 주는 대신 가축에게 먹이고, 바다속에 수장시키는 것 역시 자국의 이익을 최선으로 하되 결과적으로 지구 전체로는 더 큰 실을 가져오는 수인의 딜레마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3. 그것을 넘어선 도덕
그래서 이러한 상식을 넘어선 도덕의 존재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도덕은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도덕을 제시한다. 세상의 가치관의 정점은 황금률로 표현될 수 있다. 황금률은 성경 마태복음 7:12 의 내용에 드러난다.
다른 사람에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도덕의 중요한 부분이다. 때로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 황금률은 세상과 하늘을 잇는 도덕이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지키기 힘든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지키기 왜 어려운가하면 그것이 반드시 돌아올 득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잘 한다고 해서, 심지어 그가 내게 하기를 원하는 그것을 내가 해 준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동일하게 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의 주변엔 이러한 황금률로 인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잘해주면 오히려 "쟤가 뭔가 모자라서 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이용하려는 '악당'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이 황금률은 모두가 지키면 그 이상의 선은 없을 것 같지만, 결코 지켜지지 않는 이 세상이 천국이 될수 없는 분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도덕의 척도이기도 하다.
4. 초월한 도덕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황금률이 도덕의 핵심이기는 할 지언정, 그것이 최종의 목적은 아니다. 최종의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가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바를 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완벽한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조건이 달리지 않는다. 그가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그의 가치관과 철학, 나의 세계관과 성장환경, 그 어떤 것도 조건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온전하라"는 명령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NIV 성경에서는 Be Perfect ! 라는 말로 번역되어있다. 이러한 도덕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지상에서 황금률은 커녕 수인의 딜레마에 빠져 허덕이는 인류에게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라니 말이다.
이 명령은 할수 있을까 없을까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마치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오늘 저녁의 반찬이라면 문제없다. 좋은 직장 때려치우는 거라면 그것 역시 문제 없다. 삼성이든, 검사든 얼마든지 훌훌 털고 나올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주어진 것이지,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이 두가지에서 판단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선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직장에 돈에 그와 관련된 생활은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아니다.
5. 실천적 도덕 : Simple Life
최종 목적지를 알았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 길이 너무 멀고 험하므로 일찌감치 발닦고 누워 자자는 것이고, 두번째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분명히 아는 한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우리의 온전함을 바란다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스스로 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선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이 시작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이 황금률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비록 그 댓가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는 확신은 우리가 그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제공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기부하는 것에 더 헌신해야 한다. 기부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유롭게 줄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줄것을 말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들의 삶은 검소해야 한다. 굳이 필요없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사는 소비행태는 버려야 한다. 꼭 필요한 것을 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포기하며 오히려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없는 이들을 위해 내 다른 부분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들의 처지에 처했을때 그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Simple Life, 바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시작하는 발걸음의 시작이다.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뜻 떠오르는 이미지는 내가 자유롭고자 하는데 방해하는 어떤 것을 떠올리게 된다. 재미있게 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것, 자유롭게 방탕해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보통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언뜻 우리 속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떠올려지게 된다.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하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 말이다.
필자는 이것을 초딩적 도덕의 이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딩적이라는 말은 어리거나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런 생각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도덕에 대한 바른 이해를 못하고 있기에 생겨난, 그리고 고착된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을 말하면 보통 철학자들의 듣기 거북한 개념어들을 가져와 설명하곤 한다. 형이상학이 어쩌구, 헤겔이 어쩌구, 저쩌구, 등등... 이런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정작 이러한 철학적 접근은 오히려 도덕의 실생활속에서의 자리매김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이상과 이상주의를 말하면서 도덕은 절대선과 현실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잘난척 하는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 듯한 오도된 현상을 낳기까지 한다.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보다는 왜 그 신호등의 신호가 사회에 득보다 실이 많음을 열띠게 웅변하는 듣보잡이 더 주목받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블로그에 올린 글 "부끄러움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 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히 이 사회가 가진 도덕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수 있겠다. 그들에게 도덕이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못되고 형편없는 그래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퇴직교사의 헛소리"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2. 그렇다면 도덕은 필요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것이 필요없다고 입을 모으지는 않는다.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에 대해서는 지극히 너그러우며 동시에 타인에 대해서는 이 도덕의 자를 가져다 재기 좋아하는 존재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그런 일을 우리는, 이 사회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사회는 도덕을 필요로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도덕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덕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도덕으로 인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도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만약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이 도덕이 제한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수인의 딜레마와 같은 환경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이 전무해진다. 수인의 딜레마는 두명의 죄인을 각각 심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에 대한 게임이론이다. 심문자는 두 죄인에게 각각 별도의 방에서 죄를 자수할 것을 권한다. 만약 죄를 자수하면 다른 사람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기간 복역을 하게 된다. 10년이라고 하자. 죄수 A 가 자백을 하면 A는 바로 풀려난다. 대신에 죄수 B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10년을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만약 두 사람 모두 자백을 하지 않으며 증거불충분으로 둘 모두 2년의 형량만 채우면 된다. 세번째 경우, 만약 두 사람 모두 자백을 하게 되면 두사람 모두 10년동안 장기간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최선의 선택은 두 사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음으로서 모두 2년만 살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두사람 모두가 자백하는 것으로 모두 10년간 감옥에 갇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왜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방이 입을 열거나 입을 다물거나 간에 내가 입을 여는 것이 나에게는 더 나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공동체에 대해서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이 수인의 딜레마의 내용이다. 스스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지만, 결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마는 것, 이것이 바로 지능을 지녔다는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사회적 도덕은 이러한 한계상황에 종종 처하게 된다. 노사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결과 타협의 구도속에서 이러한 게임이론이 작용한다. 매년 연말이면 뒤집어지는 도로의 보드블럭에서도 개별 자치단체로서는 최선의 선택이 전체를 봐서는 최악을 선택하는 경우가 된다. 미국에서 남아도는 곡류를 기아로 죽어가는 나라에 주는 대신 가축에게 먹이고, 바다속에 수장시키는 것 역시 자국의 이익을 최선으로 하되 결과적으로 지구 전체로는 더 큰 실을 가져오는 수인의 딜레마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3. 그것을 넘어선 도덕
그래서 이러한 상식을 넘어선 도덕의 존재가 필요하다. 기독교의 도덕은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도덕을 제시한다. 세상의 가치관의 정점은 황금률로 표현될 수 있다. 황금률은 성경 마태복음 7:12 의 내용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다른 사람에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가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도덕의 중요한 부분이다. 때로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이 황금률은 세상과 하늘을 잇는 도덕이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지키기 힘든 것이고, 그만큼 하늘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지키기 왜 어려운가하면 그것이 반드시 돌아올 득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잘 한다고 해서, 심지어 그가 내게 하기를 원하는 그것을 내가 해 준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동일하게 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자의 주변엔 이러한 황금률로 인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소연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 잘해주면 오히려 "쟤가 뭔가 모자라서 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이용하려는 '악당'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이 황금률은 모두가 지키면 그 이상의 선은 없을 것 같지만, 결코 지켜지지 않는 이 세상이 천국이 될수 없는 분명한 현실을 보여주는 도덕의 척도이기도 하다.
4. 초월한 도덕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황금률이 도덕의 핵심이기는 할 지언정, 그것이 최종의 목적은 아니다. 최종의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그가 나에게 하기를 원하는 바를 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완벽한 하나님과 같이 온전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조건이 달리지 않는다. 그가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그의 가치관과 철학, 나의 세계관과 성장환경, 그 어떤 것도 조건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온전하라"는 명령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NIV 성경에서는 Be Perfect ! 라는 말로 번역되어있다. 이러한 도덕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지상에서 황금률은 커녕 수인의 딜레마에 빠져 허덕이는 인류에게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라니 말이다.
이 명령은 할수 있을까 없을까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마치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오늘 저녁의 반찬이라면 문제없다. 좋은 직장 때려치우는 거라면 그것 역시 문제 없다. 삼성이든, 검사든 얼마든지 훌훌 털고 나올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주어진 것이지,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이 두가지에서 판단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선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직장에 돈에 그와 관련된 생활은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아니다.
5. 실천적 도덕 : Simpl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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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황금률을 실천하는 것이 시작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이 황금률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비록 그 댓가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는 확신은 우리가 그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제공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기부하는 것에 더 헌신해야 한다. 기부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유롭게 줄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줄것을 말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들의 삶은 검소해야 한다. 굳이 필요없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사는 소비행태는 버려야 한다. 꼭 필요한 것을 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포기하며 오히려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없는 이들을 위해 내 다른 부분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그들의 처지에 처했을때 그들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Simple Life, 바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시작하는 발걸음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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