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 나서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 - 나를 따르라, 본훼퍼
2008. 3. 5. 00:07ㆍ서평/[서평] 기독교
본훼퍼의 '나를 따르라'라는 책을 소개 받은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년간 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하던 1988년이었다. 당시는 올림픽이라는 주제로 한국은 뜨거웠고, 난 남산아래 도서관과 학원을 오가며 하루 4시간의 잠으로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 책을 소개받았다. 한번 읽어보라는 권면의 말을 듣고,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 책을 소개했을까라는 궁금증과 함께 이 책을 손에 들고 느낀것은 온갖 감탄사였다.
이제 intobook.tistory.com 에서 서평을 쓰면서 첫번째로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것은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책 중에 그래도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을 첫번째 서평으로 쓰자는 생각이 떠 올랐다. 이 책, '나를 따르라'는 지금까지 읽어본 많은 책들 중에서 다섯손가락에 들만한 책이다. 큰 감동과 큰 도전이 있었던 책이기도 하다.
본훼퍼의 생애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일반적으로 서른 전후에 가능한 신학박사학위(Dr. Theol.)를 20세가 되던 1927년에 치렀으며, 미국에서 초청을 받아 순회강연을 하던 중 조국의 위험을 인지하고 스스로 귀국하여 고백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였다.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하였으나 1943년 비밀경찰에 체포되고 2년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신학적 독자성은 당시 신학계를 놀라게했던 바르트와 디벨류스, 불트만등과 겨룰 정도의 독특성을 가졌다. 본훼퍼는 그들의 신학자체를 하나의 출발점으로 즉, '한갓 해석하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았다. 만약 그가 이른 나이에 죽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면 우리는 더 큰 신학적흐름의 중요한 한 흐름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를 따르라'에서 본훼퍼는 해석과 비신화화등에 매여있던 당시의 신학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책의 머릿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수의 계명을 무조건 좆는 자, 예수의 멍에를 불평없이 지는 자는 져야 할 짐을 가볍게 지고 피로를 모르고 옳은 길을 갈수 있는 힘을 오히려 그의 멍에의 부드러움에서 얻는다. 져야 할 멍에를 벗어 버리려는 자에게는 예수의 계명이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 된다. 자진하여 이 부름을 순종하는 자는 무거움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가벼운 신앙생활을 원한다. 언제든 필요하면 교회에 갈수 있지만 언제든 원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있는 신앙, 마치 서구의 교회와 분위기가 더 세련된 것으로 보여지고, 그렇게하는 것이 발전되는 것인양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본훼퍼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 멍에를 불평없이 지는 자는 그 짐의 가벼움을 알게 될 것이지만 그 짐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자는 결국 가혹하고 무거운 짐에 눌리게 될 것이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환영했다. 무거운 짐을 벗어나려고 애쓴 교회는 결국 국가교회로 히틀러를 위해 존재하는 형편없는 쓰레기들의 사교장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벗어나고 싶은가? 그에게 예수의 계명은 결코 가볍지 않아 그를 억누르는 족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그 멍에를 지는 자는 그 멍에의 가벼움에 놀랄것이며, 그 멍에를 함께 지는 이의 경이로움에 탄복할 것이다.
교회는 은혜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은혜는 댓가를 지불할 수 없을만큼 큰 것이기에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값싸게 떨이로 처분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교회의 대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값싼 은혜, 마치 아무런 가치 없는 물건을 떨이 처분하듯이 주어지는 은혜는 바른 은혜가 아니다.
귀한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전 재산을 기꺼이 기쁨으로 팔수 있는 은혜이고, 장사군이 전 재산을 팔아 기꺼이 그 값을 치르는 진주와 같은 것이다. 그물을 버리고 즉석에서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는 은혜이다. 은혜는 비싸다. 그래서 어떤 값진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은혜보다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그래서 귀한 은혜를 본 자들은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을 댓가로 치르더라도 더 크게 기뻐한다. 그것들 보다 더 귀한 은혜를 알기 때문이다.
나를 따르라
부르면, 부름을 받은 자는 주저하지 않고 순종한다. 좇으라는 부름에 제자는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 고백 대신 행동으로 순종한 것이다. '좇으라'와 '좇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될 수 없는 직접 관계이다.
"또 예수께서 지나가시대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2:14)"
사람들은 그 사이에 무엇이든 삽입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심리학적 혹은 역사적 중재자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문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단지 부름을 받은 자와 부른자 사이의 행동의 즉각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부르고, 제자는 그 부름에 따른다. 그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있을수 없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그 부름은 갈 것인지, 안 갈것인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다른 선택은 없다. 그가 나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할때, 나는 그 부름에 따라 나서거나 혹은 나서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자의 순종이라 한다.
책은 계속해서 예수의 부름을 들었지만 가진 것이 많아 따르지 못했던 부자청년의 모습에 대해서 말한다. 또 제자의 길에 대해서 말한다. 산상수훈에 대해서 말한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 쉽게 설명하는 것, 어떤 것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짧게 요약한다는 것은 이미 나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오히려 책의 구석구석을 주석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받게 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1945년에 나치 독일에 의해 죽은 한 신학자의 글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자신의 고국의 교회들이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것을 바라보며 끝내는 히틀러암살에 동참하게까지 한 신학자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양심의 속삭임을 들려줄수 있을까? 과연 오늘 21세기의 한국교회는 당시 독일교회에 비해 더 복음적이라고, 더 성경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2000년이 넘어 발명된 초고속 무선 인터넷 통신 기술보다 60여년 전에 죽은 한 젊은 신학자의 고뇌에 찬 외침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필자의 마음이다.
추천한다. 비록 이 책은 그다지 많은 이들이 읽지는 않았을지언정 그 내용이 조금 어렵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천천히 정독하며 읽을 것을 청년 기독인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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