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높은 자의 선지자
2007. 9. 29. 09:34ㆍLife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눅1:76)
1. 높은 자 선발대회
높 은 자가 되는 것과 그 높은 자의 선지자가 되는 것, 어찌보면 현대 우리 사회의 한 일면의 어두움을 가르쳐 주는 듯 하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지의식에 동고동락하던 이들이 대선이라는 [지극히 높은 자 선발대회]에 나서며 서로에 대해서 으르렁거리는 원수가 되어간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것, 권세를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가보다. 정작 대통령이 되면 못해먹겠다며 징징대도 결국 대선철이 다가오면 그 대통령을 해먹기 위해 그렇게도 애들을 쓴다. 후보통합과정을 지켜보자면 대체로 이 인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듯 하다. 서로를 깍아내리고 그래서 자기가 조금 더 낫다는 도토리 키재기식 자랑하기는 이미 [지극히 높은 자 예비 선발과정]중에 드러나는 단골메뉴기도 하다. 물론 이 메뉴는 선발대회의 "진"이 뽑히기까지 결코 빠지지 않는 메인메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차기 왕을 뽑는 위치라면 마리아를 통해 난 예수보다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통해 난 요한이 더 있어보인다. 적어도 배경이 그렇고, 부모가 그렇다. 아비없는 예수보다는, 대제사장이라는 부모를 둔 요한은 이미 태생적으로 예수보다는 한수 윗 단계에 가 있는 귀족출신이니 말이다. 이 정도면 예비경선도 필요없이 거의 요한이 몇수 앞서고 있는 셈이다.
2. 자신을 높이는 자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
이미 어제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보았던 51절에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와 반대되는 개념은 [그]를 두려워하는 자라는 것을 보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거기 가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힘과 권력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고 믿는 것 같다.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아니, 철저하게 개인적인 힘과 이익의 발현을 위해 어떻게든 그 능력을 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자리에 올랐던 자들의 하나같은 결과론적 느낌표라면 무리한 표현일까?
요한은 선지자의 역할을 맡는다. 이 선지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사람들의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은 선지자밖에 없기에 모양새가 난다. 적어도 이스라엘에서 선지자 모세의 위치는 하나님과 거의 동급이거나 별 차이 없을 정도로 느껴졌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모함하며 했던 모든 근거들이 모세를 써먹었다는 것을 보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선지자는 간지나는 존재다. 하지만 보이는 하나님, 스스로를 메시야라 칭하는 예수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어째 모양새가 그리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모든 말을 선지자를 통해 전달해야 했지만, 예수는 스스로 대중의 앞에 나서서 직접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직접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사람들의 눈 앞에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혼낸다. 물위를 걷기까지 한다. 이런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대언자라는 자리는 애매하다. 솔직히 이런 선지자는 스타가 될 환경을 소유하지 못한다.
3. 아직도 리더가 되고 싶은가?
누 군가를 이끌어 갈 리더의 모습은 오직 예수뿐이다. 누군가에게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은 오직 예수일 뿐이다. 나는 그의 리더나 스승이 되지 못한다. 단지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역할이 작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선지자는 말을 통해 자신이 대변해야 할 이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당 대변인이 당의 입장이 아닌 자신의 인기를 위해 말을 쏟는 순간부터 그는 인기를 차지하고 사람의 주목을 끄는 인물이 될지는 몰라도 그 당의 대변인은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요한은 그가 해야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의 부모들도 깨달았다. 요한은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왕을 돕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다. 우리는 리더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리더를 돕기 위해 사는 것이다.
4. 그 길을 준비하라
요 한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사람들의 조명을 받는 대신 사람들에게 거친 소리를 내 뱉었다. 그는 가까이 오는 이들을 섣부른 위로로 토닥이는 대신 회개를 외쳤다. 그리고 거기에 많은 이들의 마음이 준비되어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요한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호된 꾸지람을 듣고도 거기 있던 이들이다.
막연한 겸손, 그저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다며 구석에 쳐박혀서 눈만 꿈벅이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의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교만을 돕는 동조자의 모습일 뿐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 앞에서 잘못을 드러내는 것, 자신의 잘못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잘못까지도 기꺼이 드러냄에 그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바른 겸손의 모습이다.
요한은 그 길을 준비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그리고 교만을 거부함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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