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23. 17:37ㆍLife
제목 : 상식에 기초한 논의가 필요한 블로고스피어
** 현상의 모습 **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개신교에 대한 반감과 이를 인지하지 못한채 휘둘리고 있는 소위 네티즌들의 모습을 보며 아직 이모습에는 공개적 토론을 수용할 만한 환경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왜 그들이 공격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원인을 제시해본다. 물론 이 원인제시는 맞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원인으로 더 객관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기꺼이 따를 것이다(피드백을 줄 사람은 익명의 댓글보다는 트랙백을 사용해주길 바란다).
** 이랜드의 확장과 그에 따른 부작용 **
잘 알다시피 이랜드의 비정규직 문제는 경제계에서는 처음에 별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그런 문제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있었으니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길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잘못은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부분을 읽어주길 바라고, 비기독교인이라면 이 부분은 건너뛰어줄 것을 바란다. 굳이 기독교의 교리적 부분과 믿음의 부분을 모든 기업이나 기업주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고,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비기독교인들이 언급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믿음의 기준에서 이 일들을 차분히 받아들이기 바랄뿐이다.
이랜드의 초창기 설립 당시의 모습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대학생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랜드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졸업 후 들어가고 싶은 기업이 되었다. 중소기업이면서 대기업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매우 적었다. 그때만 해도 보수는 많지 않았고(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정직과 성실로 승부할수 있다는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걸음을 내딛는 이들에게 더 많은 연봉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랜드는 초기 설립당시의 멤버들이 빠지면서부터 조금씩 다른 기업들과 별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기업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주일 성수를 강조했던 이랜드에서 까르푸를 인수하면서 주일 영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홈에버라는 이름으로 이랜드는 이전까지는 기꺼이 이익의 상당부분을 포기하면서도 허용하지 않았던 주일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일반 다른 기업들이라면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옷장사나 기타 대형 마트를 운영하는 경우 주일 매상의 평일 매상의 배이상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고, 당연히 모든 대형 마트들이 휴일없이, 게다가 어떤 곳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상태인데 주일마다 꼬박꼬박 쉰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선교기업임을 자처했던 이랜드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교회가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날이 다른 날에 비해 손님이 적은 날이기 때문이거나 열심히 장사하려고 노력해봐야 노력에 비해 얻는 득이 가장 작은 날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날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후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그날 모여 예배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만약 이랜드에서 병원을 인수했거나 혹은 소방서와 관련된 일을 했다면 혹 몰라도 그저 대형마트를 인수한 것은 다른 차원의 일로 보기 힘든 것이다. 단지 이랜드는 기업으로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이윤창출이 악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 기업이라는 호칭을 달지 않았다면 주일 영업도 뭐라고 토달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이랜드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기업이다. 이 기업에서 주일날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즉, 이제 더 이상 이랜드는 한국의 기독교 기업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기업이 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랜드는 이제 한국의 여러 기업 들 중 하나일 뿐이다.
기업을 확장시키려니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기본적으로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여야한다. 그 방편으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비정규직원의 사용이었고, 그것이 불거져 발생한 것이 이번 파업등으로 일련의 눈쌀찌푸리는 사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랜드의 초창기 시작 시절의 모습을 들어 아는 나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만약 초창기 멤버들이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이런모습은 아니었을텐데하는 어쩌면 쓸데 없는 사념에도 잠기게 된다.
어쨌건 지금의 이랜드의 모습은 기독교의 이념을 사회에 드러내는 모습이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을 빨리 이랜드계열의 결정권을 가진 이들이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경제 논리와 경영 논리에 밀려 초창기 창업 정신을 홰손하는 것은 어쩌면 이랜드를 이랜드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빨리 인식하는 것이 좋다.
막연한 투쟁과 막연한 노동운동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바라는 바는
레위기 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기업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모든 기업이 이 말씀을 실천할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기독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고자 한다면 최소한 이 말씀앞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법률적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률적 당위성보다 먼저 시작된 기반인 성경적 기반을 말하고자 한다. 기독기업은 단순히 이윤을 최대한으로 창출해내는 기업이 아니다. 좋은 기업은 최대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겠지만 기독 기업은 모퉁이의 이삭을 기꺼이 그것이 필요한 자를 위해 남겨줄 줄 아는 기업이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명령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모퉁이의 이삭이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비정규직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일 것이다. 모쪼록 이 일이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방향으로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 아프간 피랍자들에 대한 반감과 언론과 정부의 책임 **
이것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차라리 이랜드 상품 불매운동을 하겠다며 리본을 단 블로그는 이해할 수 있다. 예전부터 기독교인이라면 치를 떨던 이들의 반감도 항상 그래왔던 것이니 그러려니 할수 있다. 그런데 아프간 피랍자들에 대한 반감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어떤 이들은 내가 쓴 글에서 언론과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에 반감을 가졌다. 지금까지 언론과 정부는 최선을 다해 피랍자들을 구출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지 않느냐는 질책도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선교라는 말 대신 봉사활동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줬다.
맞다. 지금 이루어지는 글과 뉴스, 그리고 정부 발표는 상당히 신중을 기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 초기의 대응은 어땠을까? 그때를 기억한다.
사건 초기 신문과 뉴스들은 무슨 큰 건을 낚은 듯이 기사거리를 찾아헤매었다. 단순한 사실의 보도를 넘어 뉴스와 신문은 과거의 모든 것을 들먹이며 경쟁적인 취재 전쟁을 벌였다. 뉴스와 신문은 이런 큰 보도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곳에서 보도하지 않은 내용을 물어와야만 했다. 그러면서 억지로 가져다 온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이번 사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 다른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이었다. 그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는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필자도 잘 아는 일이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역시 필자도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지적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일과 이번 일은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별반 관계가 없는 두 사건이 묘하게 얽히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많은 네티즌들은 두 사건을 묘하게 잇기 시작했다. 필자의 지난 두개의 글에 달린 댓글을 봐도 마치 자신이 대단한 기사거리를 물어온 것처럼 그 두 사건을 짜매어놓은 루머들을 전달하고 있었다. 한두명이 아니었고, 또 한명이 한번만 적는 것도 아니었다. 댓글은 정체모를 루머의 집합소이면서 동시에 루머의 도배장소가 되어 갔다. 그 댓글들은 숫자가 많아 아직 지우지 못하고 있다. 언제든지 가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루머의 내용은 결국은 이전 사건의 잘못 모두를 현 사건의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프간에서 피랍된 이들에 대해 지나칠정도로 과격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런 여론 형성과정에 언론의 책임은 분명히 있다. 언론은 자신들의 광고수익을 노려 또 다른 특종을 만들어야만 했고, 그를 위해 이런 큰 사건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결국 언론에 의해 많은 사람들은 무분별한 정보를 받아들였고, 거기서 잘못된 정보의 혼돈속에 잘못된 루머들이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미 [너희의 잘못이 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그 루머들이 잘못이었음이 밝혀졌지만(사실 아직도 그 루머들이 잘못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전히 사람들은 한번 내린 자신의 결론을 쉽게 번복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이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심리가 작용하였다. 게다가 집단의 행동뒤에 숨어서 여전히 많은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고 분노하는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어, 내가 잘못 판단한게 아니야!!!].
그러면 정부의 실수는 무엇일까? 우선 정부는 이 일을 뒤에서 방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사건 초기 언론에서는 교회와 개신교의 무분별한 확장논리가 이 일을 발생하게 했다는 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원한다면 당시의 뉴스들을 다시 청취해보기를 바란다. 문제는 그런 잘못된 정보들이 혼동되고 있는 중에도 여전히 정부측에서는 그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정당간 문제에 곧 있을 선거에 골치아픈 상황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결국 정부와 정치인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안녕과 건강에 있음을 다시금 자각할 때 당시 처했어야 하는 정부의 신속한 반응은 상당히 느린 뒷북이었다는 점이다. 모든 정보의 조작이 끝나고, 그것이 진실된 정보인 듯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마녀 사냥식 몰이가 다 진행된 다음에야 [그것은 근거 없는 루머다]라고 발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악플에 대한 경찰력의 동원한 수사까지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뒤늦은 대처로 많은 네트즌들은 이미 자신의 생각을 고착화 시킨 뒤였고, 그들의 이러한 고착된 생각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이미 말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근거자료들을 억지로 찾아내도록 하는 근거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여러 악플러들에 대한 강제력을 동원한 정부에 대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다시금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볼수도 있다. 사람들의 심리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억지로라도 타인의 잘못을 끄집어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증명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는 또 한 몫을 한 것이다.
정부의 두번째 실수는 협상력의 부재에 있다고 보인다.
이미 한번 한국 정부는 탈레반과의 좋은 협상의 기회를 놓쳤다. 처음 탈레반에서 요구했던 것은 한국 군대의 철수였다. 이것은 한국 군대의 철수가 연장될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볼수 있었다. 처음 협상에서 정부는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다 보여주었다. 한국 군대는 올해 말 철수할 것이고, 연장 계획은 절대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손에 든 중요한 카드를 보여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땅에 버리는 실수를 했다. 한국 정부의 외교력과 협상력에 대해 한숨을 쉬게 하는 반응이었다. 그때 만약 한국 정부가 외교적 협상안으로 한국군 철수라는 카드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다면 현행 사태는 조금 더 풀기 쉬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 또 다른 문제들 **
이 사건 후 많은 일들을 거슬러가며 여러 이들이 기독교를 비판할 이유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찾아다니기만 한다면야 정보의 바다라고 하는 인터넷에서 그런 기사거리를 무더기로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인들, 목사들, 지도자들중에 잘못이 있었음을 우리 사회에 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을 지금 피랍된 이들에게 화살을 돌려 [죽으라]고 외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동시에 이러한 시도들은 이미 언론에 의해 처음부터 잘못 시작된 것임을 깨닫지 못한 채 은연중에 조종당하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잘못으로 가는 길이다.
한국 교회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많은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패도 있었다. 모든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중에 6살짜리 아이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하며 그것을 고집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어쩌면 그래서 지난 10년간 한국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오히려 그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가장 큰 성장을 보인 종교는 천주교다 1995년 290만 정도였던 천주교는 2005년 통계자료에서 490만에서 510만 정도의 성장세를 보인 반면 기독교는 1995년 870만에서 2005년 860만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런 모습은 우선 기독교내에서도 반성의 움직임과 함께 현행 기독교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인다. 게다가 대부분 교회에서 떠난 이들은 천주교로 발길을 옮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예수를 떠나고싶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교회의 모습에 실망감을 표출하고 나름의 대안으로 천주교를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이다(이 점에서 필자는 안타까움과 함께 그들이 그래도 예수를 떠나지 않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감사한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가장 중요한 교리적 부분에서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냐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이 질문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복잡한 문제를 다뤄야하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 다뤘듯, 현재 한국 개신교의 인구는 870만이 아닌 490만으로 보아야 하며 여기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조사하여 다시 그 인구를 측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경우 [기독교인]이라는 성경적 정의에 근접한 인구는 최대 200만 이하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종교인구에 대한 정확한 측정은 어려우므로 그저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라는 설문자의 질문에 기독교라고 답하는 모든 사람은 기독교로 조사될 것이므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인구가 아닌 성경적 근거에 적합한 기독교인의 숫자를 다시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다만 이러한 조사는 아마도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재정적 문제와 통계 조사의 필요성에 대한 절실한 요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강남의 대형 교회들이 그러하듯 일부 교회들은 이미 사교집단화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자체적으로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큰 무리에 속해 거기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근절되지 않는 한 큰 매이저급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건 기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기독교회의 문제인 것처럼 보여지는 많은 것들은 이미 자본화된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말하고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를 이 땅에서 없애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의 말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마치 모든 문제가 교회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 교회가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교계 신문들과 그리고 많은 기독교 포털등에서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것을 개혁해야 할 것을 소리 높이고 있다. 인터넷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를 찾아보라. 상당히 많은 글들과 기사들이 기독교 신문이나 포털등에서 나온 것음을 알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 대해 목숨걸고 그것이 잘못임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본화된 사회는 점점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어간다. 그중엔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도 있다. 철저하게 사기를 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을 끝까지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안전과 행복까지 포기하는 이들도 역시 있다. 한때 기독교의 이단을 추적하던 탁명환소장은 이단 때문에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런 위험스런 상황에 처하기전에 자기 목숨과 자기 가족의 안전을 보살피기에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잘못된 신앙에 빠진 이들의 형편을 알리고 거기서 빠져나올 길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외부에서 봤을때 마치 기독교 내부의 권력다툼에 죽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죽음은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되는 한 걸음을 걸은 것이다.
교회가 없어짐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다와짐으로 문제는 해결되어갈 것이다.
** 많은 이들이 범하는 실수 **
때로는 말을 아껴야 한다. 때로는 해야 할 말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해야 할 말인지에 대해서 자신은 스스로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말은 내 생각이요 판단이라고 스스로 믿는 것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말과 생각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그 무리에 파묻혀 그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집단최면을 믿음으로 정의하는 것은 기독교의 바른 정의가 아니고, 그렇게 믿는 이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반대로 이러한 집단 최면은 반드시 종교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집단 최면은 공격성을 동반하고 오히려 다수에 묻혀 그것이 진리라고 믿는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것이다. 수백개의 악플이 달린 곳에 스스로 그 다수의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정하는 이들도 있음을 안다.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는 작은 구절이 있었다면 악성 댓글을 다는 대신 침묵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단상] 마음을 추스리며 ... (0) | 2007.09.04 |
---|---|
아프간 피랍 사태의 잘못된 루머를 되짚어 본다. (0) | 2007.08.30 |
댓글에 대한 답글 (1) | 2007.08.22 |
개신교에 대한 반감은 주류의 것인가? (15) | 2007.08.20 |
블로그를 시작하고 맞은 재미있는 한가지 현상 (0) | 2007.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