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마녀사냥] 집단 광기에 얼룩진 대중, 그 속의 한 소년의 영혼

2008. 5. 16. 23:37서평/[서평] 인문

마녀 사냥(보림문학선07)(양장본) 상세보기
라이프 에스퍼 애너슨 지음 | 보림 펴냄
마녀 사냥의 진실을 생생하게 파헤친 문제작! 『마녀 사냥』은 15~17세기 유럽에서 만행된 '마녀 사냥'을 소재로 삼은 작품으로, 집단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 잔인한 세상과 극렬하게 부딪친 소년이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성장소설이다. 더불어 차이에 대한 존중과 관용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에스벤은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 이후 마을에서

한스, 에스벤 그들은 그들의 사회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어머니를 불에 태워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소년, 그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소년에게 바른 곳을 알려주는 한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마녀사냥.... 이글은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 말해주고 있다.

한계례시문 기획의원인 홍세화씨는 이 책의 서두에 기분좋은 추천의 글을 써 두었다. 제목은 [집단 광기 앞에 선 숭고한 인간의 영혼]이다. 그렇다. 이 책은 중세의 기독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광기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하다. 한스 박사는 그러한 인간을 보고 두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두렵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래. 두려우면 보호해 줄 것이 필요하지. 무엇 때문에 두려운지 모르면 두려움을 막아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해. 하지만 그것이 자기 힘에 부치는 것이면 안 돼. 뭔가 잘못되면 악마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편이 간단하지. 하지만 악마는 태워 죽이거나 맞싸울 수 없어. 그래서 자기보다 약해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태워 죽이거나 괴롭히는 거야."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에스벤에게 한스는 조용히 이렇게 묻는다.

"왜 넌 도와주지 않았지?"
...
"왜냐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모두 저보다 강했고요. 전 겁이 났어요."

저자인 에너슨은 마녀사냥의 핵심은 사람들의 마음에 잠재된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이 페스트처럼 퍼져가는 것, 그래서 모두의 마음속에 두려움의 씨앗을 뿌리고 결국 그들 중의 한 약자를 선정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진다. 중세의 경우 특히 더했을 것이다. 흑사병의 창궐, 떠도는 소문, 매일 죽어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래서 그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병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실수와 그들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지적된다.

그들은 마녀가 되고, 마법사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치료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사람은 사람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인해 마녀로 소문이 돌게 되고, 결국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다. 거기엔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어.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단다. 그것이 내 강점이야. 병든 사람을 고쳐 줄 때마다 난 나 자신의 화형대에 장작 한 개비를 더 올려놓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 모두 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일 사람이 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사람이 괴로워하거나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
"아무도 우리 어머니가 괴로워할 것인지 묻지 않았어요. 그냥 죽여 버렸지요."
"그랬지.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비겁하고 나약했기 때문이야. 그들은 힘을 갖고 있었어.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나약하단다. 하지만 만약 네가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말이다. 너는 어디에 있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나았겠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어머니냐, 아니면 그 바깥, 괴롭히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끼어 있는 어머니냐?"

그들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먼저 나의 문제를 바라보자.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과 함께 있는가? 아니면 그들에 둘러싸여서 기꺼이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을 감내하고 있는가?

힘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나약하다는 말은 인류 역사를 통해 그 예들을 너무나 많이 보여왔다. 힘이 있기에 그들은 나약해졌고, 나약해졌기에 더 약한 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힘을 행사했다. 히틀러가 그랬고, 서구의 많은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이 그러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2007년 아프간의 피랍인들을 바라보는 한국사회가 그러했다.

"단지 몇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누군가 아저씨를 욕하기 시작하면 모두들 함께 입을 모을 테니까요."
"나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야. 누가 감히 약한 사람 편에 서려고 하겠느냐. 사람들은 모르쇠하거나 아니면 가장 강한 집단과 한 패가 되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힘을 갖게 되고, 온 힘을 다해 그 힘에 매달리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일이 흘러가는 쪽으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이제 사람들을 본다. 대중을 본다. 군중을 본다. 그들은 개인의 집합체가 아니다. 군중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움직이는 조직체가 된다. 개인의 생각은 그 집단의 사고속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그 집단의 흘러가는 흐름속에 묻혀진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의 생각이니,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집단의 정의가 된다. 히틀러가 그렇고, 마녀를 화형에 처하는 이들이 그러했고, 그리고 오늘 우리들 역시도 언제라도 그런 처지에 처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기독교의 탓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한, 그들은 언제라도 손에 횃불을 들고 마녀사냥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집단의 정의는 정의될 필요가 없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정의는 검증되지 않은 채, 모두를 불사르는 화형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한스는 에스벤에게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온 자신이 결국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인간에게서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음을 알린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한스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 대중들? 그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산더미 같은 편견에 얽매여 그것을 참이라고 여기지. 그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책임을 자기 안에서 찾는 법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속죄양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속죄양을 찾아낸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도 알고 있지...."

마법사로 몰린 한스는 에스벤을 도망치게 하고 자신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간다. 한스를 끌고간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는 너도 알고 있다. 편견과 생각과 책임, 한스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에스벤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비난의 꺼리를 찾아낸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털어서 나오는 먼지를 사진찍어 인터넷에 올리며 마녀사냥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는 지속된다. 속죄양을 찾을 수 있는 한, 그들의 축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축제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세가 지났으니 이제 마녀사냥은 멈추었을까? 에너슨은 자신의 책 [마녀사냥]을 통해 오늘 역시 집단 광기의 흐름속에 여전히 우리 속에 자행되는 무지한 마녀사냥은 지속되고 있음을 알린다.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 마녀사냥은 중세에 끝났다고 믿거나, 혹은 마녀사냥은 기독교인들 같은 종교인들만 하는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어버리는 한 말이다.

[서평:마녀사냥] 집단 광기에 얼룩진 대중, 그 속의 한 소년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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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licleLim(2008.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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