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7. 18:04ㆍEye
세상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식에 관하여 (수 9:1-15)
[들어가는 글]
지금 미국 소의 수입에 관해서 세상은 시끄럽습니다. 광우병에 관해서 인터넷에서는 참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소위 광우병괴담이라는 것까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 광우병 괴담을 한번 소개해 보겠습니다.
괴담 - 소를 이용해 만드는 화장품, 생리대, 기저귀 등 600가지 제품을 사용해도 광우병에 전염된다.
괴담 - 광우병 쇠고기를 다룬 칼과 도마에 의해 수돗물까지도 오염된다
괴담 - 한국인 95%가 광우병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괴담 - 미국내 치매환자가 약 500만명인데 이중 25만~65만명이 인간광우병으로 추정된다.
괴담 - 살코기만 먹어도 광우병에 걸린다
괴담 - 키스만 해도 광우병이 전염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괴담들이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것일까요?
유투브라는 인터넷에서 가장 큰 공개된 동영상을 올리거나 볼 수 있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거기에 한 캘리포니아의 도축업체에서 소를 잡는 장면이 올라왔습니다. 소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태였습니다. 그 소를 억지로 때려서 일어나게 만들고 그리고 식용으로 도축하는 장면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국내에서 과연 그런 소가 광우병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 됩니다.
오늘 오전에 살펴본 바로는 대통령 탄핵에 서명한 사람이 백이십만명이 넘었습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명박대통령이 한국경제를 살려줄 것이라는 사람들이 이제는 공포속에서 대통령에게 내려오라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모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대한민국이 잘 될줄 알았는데 정작 대통령이 되고 나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정치권은 항상 시끄러웠습니다. 거기에 이번 소고기 수입 결정은 뜻밖의 사태를 몰고 온 것입니다.
공포 중에 떨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누군가가 [저놈이 범인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죠. 이제 모든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대통령도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는 모든 것을, 경제를 살려야만 용서받는 다는 조건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이전에 했던 모든 실수들, 잘못들, 그 모든 것을 사람들은 눈감아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국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물가는 이전보다 더 오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은 계속해서 혼탁하고, 거기에 이번 미국 소고기 사건이 터졌습니다.
대통령도 어찌 보면 한국 경제를 이전처럼 회복시켜야만 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정작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미국 부시정부의 힘을 믿고 북한과 강압적인 외교를 펼치려고 했더니 미국은 대한민국을 빼놓고 북한과 외교를 합니다.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면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이름을 빼준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부랴부랴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제야 남북연락사무소를 만들자고 뒷북을 칩니다.
동아일보엔 대통령이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광우병에 대한 공포에 떨고 대통령은 한국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과 미국이라는 큰 힘 앞에서 역시 공포로 떨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공포를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포를 느끼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든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 가나안의 왕들] 하나님을 대항한 연맹체의 결성
오늘 성경을 보면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로는 요단 서쪽과 레바논 앞에 있는 헷족속, 아모리족속, 가나안족속, 브리스족속, 히위 족속들입니다. 정확히는 그 족속을 거느리고 있는 왕이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이겼는지 그들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아이를 쳐서 정복한 이스라엘이 이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들이 곧 들이 닥칠 것입니다. 왕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공포에 떠는 왕들은 하나의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가나안 연맹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그들이 서로의 땅을 빼앗기 위해 싸움을 벌였더라도 지금만큼은 든든한 우방이 돼서 공동의 적, 이스라엘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왕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애굽에 원조를 요청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아멘호텝3세와 아케나텐에게 보낸 400여통의 편지에 보면 가나안왕들은 하비루의 위협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집트의 원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공포에 떨면서 사람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맙니다. 자신들에게 그 공포를 이길 충분한 힘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충분히 자신들이 법이 될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들의 힘이 하나님을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고 세상의 왕들은 믿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실패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가나안의 왕들은 강한 힘을 가진 왕들입니다. 왠만한 전쟁에서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왕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앞에서 자신들의 공포를 눌러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승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강한 힘을 꺽기 위해 약한 이스라엘을 보냈습니다. 약한 이스라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대신해서 전쟁을 치르시기에 승리를 맛보는 존재들입니다. 그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고 이스라엘은 그 승리의 증인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첫 번째 방식은 이렇습니다. 공포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스스로 영원한 파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강한 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지식을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그것이 우리의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 기브온] 복종치 않는 평화의 갈구
두 번째 삶의 방식은 역시 공포에 떨고 있던 기브온 족속의 모습에서 등장합니다. 기브온은 가나안의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꾀를 냅니다. 그들은 헤어진 전대와 기운 포도주 가죽 부대, 그리고 낡은 옷과 신을 신고 마치 먼 고장에서 온 것처럼 속여서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은 신명기 20장에 나옵니다.
(신20:10-11)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먼 곳에 있는 성읍들과는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들이 화평을 원한다면 조공을 받고 평화조약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기브온은 이점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먼 곳에 있는 것처럼 그들은 속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조약을 맺습니다. 그들은 공포속에 있었고, 그래서 평화를 원했습니다. 평화롭게 그들이 지내던 방식 그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임수의 평화를 가장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공포속에서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한때는 한국의 경제를 살리면 대한민국이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알았습니다. 취직되지 않는 공포, 집이 없는 공포, 하지만 정작 죽어가는 소의 동영상을 한번 본 사람들은 그 영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곧 내 주변에서 일어날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다른 공포가 몰려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그 공포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서명을 하기도 하고 촛불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필요하다면 대통령을 탄핵이라도 해야 할 정도의 공포가 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정말 이 문제는 탄핵감일까요? 아니면 공포가 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것일까요? 공포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공포가 이 나라의 통치질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기브온 족속은 정직하게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에게 나가가서 전적인 항복을 하는 대신 속임수의 평화공존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공포를 느꼈습니다. 언제라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이 땅에서 멸하려 한다면 그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가지고 살아왔던 삶의 방식 그대로, 비록 그것이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공포속에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치 않는 자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두 번째 삶의 방식입니다. 무엇이든 힘있는 존재와 타협을 하는 모습입니다. 전적인 항복이 아닌 그때 그때 임기응변식의 타협을 일삼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항복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는 주일도 잘 지키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습니다. 고쳐만 주십시오.] 그러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세금 다 내고 어떻게 장사를 해요. 십일조만 잘 내면 되지...]
기브온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항복하는 대신 조약이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살 길을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영원히 이스라엘을 섬기는 종의 무리가 되고 맙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눈치 보면서 그때 그때 적당한 곳에 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원한 평안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 라합] 새언약 공동체에 합류
세 번째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영적인 중생을 통해 새 언약 공동체에 합류한 무리의 삶이라고 정의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는 훈련도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리고에서 가까운 곳에서 기꺼이 할례의식을 행하며 며칠간 전투불능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만을 기도하는 훈련도 했습니다. 여리고를 함성으로 무너뜨리며 하나님이 전쟁의 선두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보이는 무리였던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은 단순히 육체적인 아브라함의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라합과 그 가족들, 그와 함께 있던 친지, 친척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들이 이 세 번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자신의 입으로 이스라엘과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2:9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2: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 역시도 여리고성에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마음이 녹았다고, 또 정신은 잃었다고, 하지만 많은 다른 이들은 힘을 합쳐 하나님을 대적하려 한 반면 라합은 기꺼이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을 결심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상황속에서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깁니다. 더 이상 라합은 가나안의 여자가 아니게 됩니다. 비록 여리고에서 그녀는 가장 낮은 비천한 신분으로 몸을 파는 천한 여자였더라도 하나님은 그녀를 이스라엘로 부르십니다. 그녀는 잃어버렸던바 된 한 영혼이었고, 그리고 그 영혼은 이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 삶의 방식, 그것은 새 언약 공동체에 합류한 이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해 공포스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음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라고 부르겠습니다. 교회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 닮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은 공포속에서 좌지우지됩니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른 채 세상은 흘러갑니다. 어제까지 대한민국을 이끌 선각자처럼 여겨지던 사람이 하룻밤 새 탄핵의 대상이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공포에 의해 이끌려집니다. 매일, 매순간이 공포가 왕노릇합니다. 세상은 그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진정한 평화의 왕을 바라보는 대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아프간에서 억울하게 피랍된 사람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도 합니다. 공포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절벽 끝으로 몰아갑니다.
[맺음, 또 다른 시작]
하지만 교회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고백하는 곳입니다. 비록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전혀 없어 보이더라도 그렇더라도 믿음을 가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이 모든 고통을 아시고, 이 모든 고통을 당하셨음을 고백하며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이끌어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광우병 걸린 소를 먹는 것보다도 더 큰 고통과 공포를 겪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멍에를 함께 지고, 그와 동행할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많이 뒤숭숭합니다. 사람들은 모여서 정부를 성토합니다. 정부는 촛불집회를 불법집회로 사법처리하겠다고 합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자발적인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위서부터 아래까지 자발적인 결정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공포에 두려움에 휩쌓여 공포의 종이 되어 두려움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화가 나시죠?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재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화가, 그 공포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화로 인해서 여러분의 믿음에 상처가 가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가운에 화평을 전하는 자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화평을 선언하는 자입니다.
(신20:10-11)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공포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화평을 전하는 사신이 되십시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 모습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http://jeliclelim.tistory.com/226
JelicleLim(20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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