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 읽기 시작을 알리며 ...

2007. 7. 2. 20:24영상/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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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Times1936



찰리 채플린,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다지 그 영상을 본 사람이 많지는 않고, 보아도 그 깊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 작은 키에 뒤뚱거리는 걸음, 그만의 팔자 걸음과 모자와 어색하지만 어울리는 복장, 항상 풍부한 표정의 그의 영상을 보고 있자면 왠지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는 어색한 쓴 웃음이 항상 자리잡곤한다. 말 대신에 글로, 그리고 약간 빠른 필름의 속도와 그 어색한 속도의 움직임을 유머러스하게 보이면서 흐르는 음악과 과장된 움직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그의 메시지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볼수 없는 현대사회의 불안을 부지중에 인식케 한다.

한때 지구상에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적이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비참한 생활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행복의 파랑새가 날아올 희망을 버리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채플린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 당연한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고, 더 많은 여유를 가졌지만, 개인의 행복의 가치는 작아졌다고 보다는 사라져버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말 사라진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개인의 행복의 가치가 없어졌다고 믿고 있는 사회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 필자에게 삭월세방에 여섯 식구가 모여사는 가난한 친구가 있었다. 필자 역시 부유한 편은 아니어서 항상 다른 사람의 집에 기생(?)하면서 눈치보며 사는 처지였다. 하지만 필자에게 부유한 친구도 있었다. 집에는 난생 처음 보는 귀한 간식거리들과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장난감이 가득한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친구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필자가 자라면서 이제 유치원 아이들의 친구의 경계가 아파트의 크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내가 자라왔던, 혹은 당연시 여겨졌던 가치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너무나 당연한 채플린의 영화속 미학은 다시금 그 시절을 돌이키며 희망에 잠겨 살기 원하는 마음을 자극한다. 다시금 채플린의 영상속에 눈을 두며 이제 그 영상속 아름다움을 잠시 만끽해 보고자 한다. 키드에 나오는 작은 아이와 채플린의 사랑, 잃은 아이를 찾아 눈물 흘리며 아이를 찾는 어머니의 사랑, 기계화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노동자와 아무에게 의지할 곳이 없는 철없는 소녀의 사랑이야기, 하지만 그 끝은 행복을 찾아가는 희망이라는 파랑새를 항상 염원하는 그들의 고전적인 감정에 다시금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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