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자들에게 고함
2008. 7. 7. 16:00ㆍEye
다음의 싸이의 복음주의 클럽에 올렸던 글이다. 그 클럽이 이름에 걸맞는 클럽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주의자들에게 고함
** 촛불집회의 정체성과 싸이 복음주의 클럽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
** (싸이 복음주의 클럽의 존재의의는 무엇인가?)
* 서론 *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취미나 여가선용의 장이 아닌 의무다. 정치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다른 정당의 소속원들만의 의무가 아닌 미디어의 의무이며, 동시에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이다. 또한 우리(복음주의 클럽의 구성원들)는 또 다른 소속감을 가진 존재로 존재한다. 적어도 복음주의 클럽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로 정의하고 그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하려한다.
* 왜 글을 쓰나? *
오랜만에, 거의 몇년만에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광우병 의심소에 대한 정부의 미심쩍은 수입에 반대하는 그림을 보고 기꺼이 신문광고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동참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솔직히 그 광고 문구는 정말 아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음주의 클럽(이하 복클)엔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바른 길을 모색하고, 토론하고, "소통"하는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을 지내면서 복클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금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복클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이곳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그러면 우리도 대형보수교회들처럼 정치에서 물러나 권력에 아부하는 이들을 보면서도 못본체 하라는 말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되물음에 대해서는 조금 더 글을 읽은 후 생각해보기 바란다. 적어도 그런 의도로 글을 쓰거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 정체성을 물음 *
정체성을 묻는 이유는 이번 미국소 수입에 대한 것이 아니다. 클럽 전체의 분위기에 관한 것이다. 여기는 이름은 복음주의지만 정작 복음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기독교와 천주교를 분리하는 듯한 뉘앙스에 반발하고, 간디에게 인정받지 못한 기독교에 대해서 비난하고, 게다가 대체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천주교인이든, 자유주의자든, 혹은 그 자유주의 계열에서마저도 스스로를 섹터의 아웃사이더로 표방하는 이들이 마음껏 활개치고 돌아다니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민중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라느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의 정신을 강론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자, 그럼 이쯤에서 진지하게 한번 물어보자. 복음주의 진영에서 주권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헌법 1조를 들이미는 것이 바른 대답일까? 교회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며 설교하는 것이 바른 복음주의의 성경강해의 내용인가? 인문학의 기본은 텍스트에 있어야한다. 적어도 기독교를, 아니 복음주의를 인문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이 되는 텍스트를 주의깊게 살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하며 그 기초위에서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복음주의의 행동강령들이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현실은 모든 쓰레기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듯한 인상을 줄 뿐이다. 복음주의에 관련된 글은 클럽 초창기에 쓰여진 몇개의 짧은 글들로 마감되고, 이제 더 이상 이곳은 그 예전의 고리타분한 글과는 무관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아니 되어있다! 미안하지만 지금 올라오는 글들과 "복음주의 클럽"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어울리냐고 묻고 싶은가? 조금 더 기다려주기 바란다.
촛불집회에 참석할 수 있다. 거기서 목소리 외쳐 아침이슬을 부를 수도, 광야에서를 부를 수도, 훌라송을 부를수도 있다. 그럴거면 내려오라고 소리 높여 외칠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청년도 있고, 오히려 그런 청년들을 보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은 아니듯해서 더 정이 간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근들어 촛불집회에 대한 글들에서 소울드레서[이하 소드]라는 이름은 이제는 매우 유명한 이름이 되어있다. 다음의 패션카페였던 소드는 기꺼이 경향신문의 광고를 사서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아 경향, 한계레 신문의 광고사기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여전히 소드는 지금도 촛불집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거기서 목소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소드는 자신들의 카페가 정치카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꺼이 카페의 비공개를 선택했다. 소드 카페의 정체성은 패션카페다. 그래서 회원자격또한 17세에서 39세로 제한한다. 진중권교수도 회원자격이 안된다면 퇴짜를 놓은 곳이다[LINK:DS].
차라리 패션동아리나 인테리어클럽, SLR클럽 등에서는 인문학적 충돌이나 깊은 사색까지는 필요없기에 자신들의 소리를 그들과 섟어서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곳들마저도 정치와 자신들의 정체성은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복클은 다르다. 적어도 참여를 해야 한다고 결정이 나면 소드보다는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뛰어들어야한다. 그리고 참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그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야한다. 하지만 뛰어들기는 소드에 못미치고, 클럽의 정체성과 시국에 대한 판단은 복음주의적 견지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텍스트와 컨텍스트 *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어느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라지만 지금의 복클에서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컨텍스트만 존재하고, 그나마 클럽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닌 외부의 소리들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약간의 시간을 돌아보면 클럽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이 있기는하나? 하는 반감이 든다. 심지어 클럽장까지도 바빠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민중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라느니, 성직자가 민중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로 들어야 한다느니하는 듣보잡을 듣게 된다. 물론 외부에서 이런 말은 이상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복음주의의 텍스트에서 이런 말은 어떤 의미일지 먼저 생각이나 하고 말을 하는 걸까? 이곳이 복음주의자들의 클럽이라는 것을 여기 회원들은 대체 인식이나 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이러한 말들이 얼마나 복클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바른지 아무도 점검하지 않고 늘어놓을 뿐이다.
* 실천 *
지난 7월 3일, 개신교가 주도하는 촛불 시국 기도회에 참석했었다. 여러 목사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 거기서 시위 문화에 익숙치 못한 목사들 사이에서 구호조차 제대로 외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여기까지 나와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들이 있음이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거기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촛불을 켜본적이 없다. 미국소고기 수입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할때, 나 역시도 반대의 입장이었지만 촛불을 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집에서 집회의 소식을 들으며 '수고하네' 정도의 생각만을 가졌다.
나는 이명박이 당선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경제가 중요해도 경제를 신으로 여기고, 그것으로 나라를 혼동에 빠뜨릴 그의 연설을 듣고 있자면 역겨움이 일어났다. 지금도 내 설교는 맘몬숭배에 대한 경계와 그것에서 초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부분을 상당부분 차지한다. 선거에 빠진 적이 없었고, 당연히 그에게 표를 주지 않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제부터 그에 따른 댓가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현실을 말이다. 그중 하나가 미국소였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져야 할 짐으로 인식했다. 국민이 뽑았으니, 그가 미친짓을 한들 그것을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아들이 패륜짓을 하면 그 놈을 붙잡아 몽둥이로 쳐서 정신 차리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안된다면 어쩌겠나? 혹자는 감방에 가둬두기라도 할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어쩔수 없는 혹이라면 체념하고 데리고 살아야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블로그에 온라인 촛불을 단 것은 6월이 지나고 7월이 시작된 다음이다. 즉,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이 있은 다음의 일이다. 나의 촛불은 이전의 의미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저항이다. 먹거리수호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물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이들이 잘못했다거나 그들의 생각이 짧다는 등의 내용은 전혀 아니다. 다만 내 입장에서 그것은 내가 못마땅해 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내기 싫은 TV수신료를 내야만 하는 것처럼, 어쩌면 약간의 저항으로 막을 수 있을것이지만 그만큼의 피해를 수행하면서까지 지켜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에는 다르다.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촐불집회에 대한 참석과 블로그에 상징적인 촛불을 밝히는 것이 7월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 복음주의의 기반을 확보할 필요성 VS 아무런 기반없이 자족하는 복클 *
나의 선택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가 우리에게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현실이라는 장에서 구현될 것이지를 찾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복음주의"에 대한 바른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복클은 아무런 기반이 없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 광우병과 촛불시위라는 흐름속에서 복클은 길을 잃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누군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열등의식은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게 했다. 결과적으로 여기에 모인 것은 대중속에서 길을 잃고, 교회 속에서 길을 잃고, 그리고 촛불 속에서 길을 잃고, 그리고 복클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곳은 대안의 장도, 고민토로의 장도 아니다. 그저 시끄러운 시장의 한 구석일 뿐이다.
* 결론이 아닌 요청과 사족 *
마지막으로 감히 요청한다. 스스로 양심의 소리에 비추어 자신이 복음주의자라고 여기지 않는 분들은 내 글에 대답을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복음주의 클럽에서 그 클럽에 속한 복음주의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클럽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농담조의 지나가는 듣보잡이나, 한번 찔러보는 듯한 어투의 말은 서로를 불편하게 할 뿐이다. 그러니 복음주의자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두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핀의를 버릴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이들은 적어도 내 글에 대해서는 잠잠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왜냐하면 아직 이곳의 이름은 "복음주의 클럽"이기 때문이고, 나는 "복음주의"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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