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겨자씨 믿음 (마17:9-20)

2012. 1. 22. 13:57Life/Christian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9-20)


 

 

1. 이미 온 엘리야

 

본문은 이전의 내용을 이어서 계속 전개된다. 산 위에서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산 위에 집을 짓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예수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산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는 함무령을 예수에게서 듣는다. 제자들은 의아했다. 선지자들에 의해서, 특히 말라기선지자에 의해서 진노의 날, 심판의 날이 이르기전에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엘리야가 온다는 것이 당시 유대에 널리 퍼진 사실이었다.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다는 것을 말한다면 많은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데 훨씬 쉬울것이라고 제자들은 판단한 듯 하다.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가는대로 다른 제자들에게 그리고 군중에게 산에서 있었던 일, 본 일을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죽음을 당하고 다시 부활하기까지 비밀에 부칠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예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미 온 엘리야를 제대로 대우하지도 않고,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고 했다. 예수가 말한 엘리야는 산위에서 만난 그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즉 세례요한을 말한 것이었고, 제자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온 엘리야,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다. 성경해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파악 하는 데에 어느 정도까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고민꺼리를 던져준다.

 

즉, 말라기 선지자가 말했던 엘리야는 문자적 의미로 구약시대에 살았던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 즉, 엘리야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직을 임명받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사람을 의미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뛰어난 발명가를 보면서 한국의 에디슨이라고 칭찬할 때 그것이 전구의 필라멘트 실험은 수천, 수만번 반복했던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

 

당시의 제자들의 상황은 미래에 대해서 낙관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예수는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예수 자신은 그런 대중들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었고, 절대적으로 자신이 곧 고난을 받고 죽을것이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제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들의 이성으로 예수의 말은 이해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믿기 원했던 승리자 구세주에 대한 믿음과 예수가 말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둘 사이에서 제자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가 직접 말을 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이 곧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조차 없는 제자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3.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믿음에 대해서 이 구절만큼 억지스럽고, 이상할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해석되는 구절도 없었을 것이다. 종종 겨자씨 믿음은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이해되며 무슨 일이든 해 낼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일종의 에너지저장창고처럼 이해되곤 한다. 큰 잘못이다.

믿음은 보통사람을 수퍼맨이 되게 하는 그런 마법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아니 우리의 상식이 거부하는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만 하는 그런 일을 우리로 알게 하고, 그것이 실행되게 한다. 산을 옮기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다. 그 섭리는 인간이 억지스럽게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의지에 기반 한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당시 제자들에게 요구되었던 믿음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잘 나가는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곧 죄인이 되어 모두의 눈 앞 에서 수치스럽게 죽어갈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제자들에게 요구된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 이후에 일어나는 부활을 볼 수 있으며, 그런 부활을 보는 자의 믿음이 곧 무덤을 비게 하는 믿음이고,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며, 세상을 거꾸로 뒤집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