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난의 길 위에서 부르심(마17:1-7)
2012. 1. 14. 16:23ㆍLife/Christian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마17:1-17)
마태복음 17장은 엿새후라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엿새는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할수 있는 시간입니다. 엿새전,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존재가 아니라 이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며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피할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시도가 사단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세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얼굴이 해같이,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모세이며 엘리야인지를 알았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과 그 두명이 대화하는 것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여서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던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들이 누군지를 알게 된 베드로가 나섭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게 좋겠습니다. 말만하시면 여기에 집 세채를 짓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모두 여기서 세상과는 동떨어져서 삽시다. 굳이 고난받고 죽으려 할 이유가 있습니까? 위대한 영웅, 세분을 모시고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게 우리한테 제일 낫겠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베드로는 말을 했겠지요. 베드로의 말에는 베드로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전히 고난을 싫어하고, 길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멀리하고 싶었던 베드로는 산위에서 초막을 짓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도로는 어찌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4)".
이미 예수님은 엿새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밝혔습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사단의 것으로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만류합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조금 더 교묘해졌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겸손과 공손을 가장한 이러한 불신앙은 한국 교회에 이미 널리 퍼져있습니다. 거친 말과 무례한 말에 발끈하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포장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하는 불신앙적인 말들이 얼마나 교회를 홰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목사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젊잖게 믿음없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무례하지만 정당한 이유를 대며 자신의 신앙을 공격하는 이들을 악인으로 낙인찍습니다.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겸손으로 포장된 사악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좋아합니다. 직접 고난의 길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서 영화보듯이, 영화속에서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길 위로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이미 하나님이 알려주셨지만 우리는 고난을 피할 길만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셨음으도 우리는 계속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단서조항을 끌어냅니다. 믿음은 사라지고 변명과 하지 못할 이유만이 덕지덕지 들어붙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길 위에 있는 예수
베드로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빛이 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명령이고, 이것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지금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말을 해 주었음으도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엿새전 이미 들려준 말을 그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길에서 산위에 초막셋을 짓고 거기 눌러앉을 발코니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야만 했습니다.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그들이 다시 길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지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소리였습니다.
3. 인간의 두려움
하늘의 소리 앞에서 제자들은 땅에 널부러집니다. "심히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때문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땅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을 피하려하는 행위는 비신앙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2:20)"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혹은 타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일본 원전 주변 후쿠시마에 살던 사람들은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들의 잘못때문에? 아닙니다. 인간의 교만함으로 자연마저 누르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도자들과 그들에 동조하여 물질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은피해야 합니다. 아니 이런 고난은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폭탄을 돌리며 돈을 벌어들였던 미국의 경제는 그 폭탄이 터질때 폭탄을 들고 있던 사람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고난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예수가 우리를 부를때 예수는 우리를 고난의 길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마저 위협받는, 아니 분명히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런 길에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요. 초막 셋과 고난의 길을 바꿀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릴때 제자들의 더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담긴 그 두려움앞에 제자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
4. 하나님의 위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땅위에 엎어진 제자들을 보며 그들에게 손을 대고 일으켜 주시며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길 위에서 예수와 함께 맞이 하는 고난이 암흑속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두려움속에 엎드러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그 고난의 무게는 우리 혼자 감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말하면서 그 멍에를 우리에게만 지우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멍에를 자신이 매고 우리가 거기 따라갈 수 있도록 걸음을 맞추어 주십니다. 시작하는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맞아야 할 고난에서 피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려하면 진정한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낙망의 두려움, 그 두려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바닥보다 더 낮은 곳에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고난에 초대하면서 동시에 그 고난의 길을 우리가 혼자 가게 두지 않습니다. 위로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에 처할지라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끄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길 위에 설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그 고난의 끝에 존재하는 희망을 보게 되고, 그 희망의 끝에서 고난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마17:1-17)
마태복음 17장은 엿새후라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면서 시작됩니다. 엿새는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닙니다.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할수 있는 시간입니다. 엿새전,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존재가 아니라 이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며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까지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피할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시도가 사단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 세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는 것을 봅니다. 얼굴이 해같이, 옷이 빛같이 희어졌다고 성경은 묘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모세이며 엘리야인지를 알았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과 그 두명이 대화하는 것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여서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던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들이 누군지를 알게 된 베드로가 나섭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게 좋겠습니다. 말만하시면 여기에 집 세채를 짓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 모두 여기서 세상과는 동떨어져서 삽시다. 굳이 고난받고 죽으려 할 이유가 있습니까? 위대한 영웅, 세분을 모시고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게 우리한테 제일 낫겠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베드로는 말을 했겠지요. 베드로의 말에는 베드로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전히 고난을 싫어하고, 길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멀리하고 싶었던 베드로는 산위에서 초막을 짓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도로는 어찌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4)".
이미 예수님은 엿새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밝혔습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사단의 것으로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만류합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조금 더 교묘해졌습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겸손과 공손을 가장한 이러한 불신앙은 한국 교회에 이미 널리 퍼져있습니다. 거친 말과 무례한 말에 발끈하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포장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하는 불신앙적인 말들이 얼마나 교회를 홰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목사들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젊잖게 믿음없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거칠고 무례하지만 정당한 이유를 대며 자신의 신앙을 공격하는 이들을 악인으로 낙인찍습니다.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겸손으로 포장된 사악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발코니에서 구경하기를 좋아합니다. 직접 고난의 길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서 영화보듯이, 영화속에서 누가 죽거나 다치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길 위로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고난을 겪을 것이라고 이미 하나님이 알려주셨지만 우리는 고난을 피할 길만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셨음으도 우리는 계속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단서조항을 끌어냅니다. 믿음은 사라지고 변명과 하지 못할 이유만이 덕지덕지 들어붙습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2. 길 위에 있는 예수
베드로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빛이 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명령이고, 이것이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지금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말을 해 주었음으도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엿새전 이미 들려준 말을 그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준비해야 할 길에서 산위에 초막셋을 짓고 거기 눌러앉을 발코니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야만 했습니다. 우뢰와 같은 소리가 들렸을 겁니다. 그들이 다시 길위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경고였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지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소리였습니다.
3. 인간의 두려움
하늘의 소리 앞에서 제자들은 땅에 널부러집니다. "심히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두려움은 경외감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때문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땅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을 피하려하는 행위는 비신앙적인 것이 됩니다. 물론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2:20)"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혹은 타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일본 원전 주변 후쿠시마에 살던 사람들은 왜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들의 잘못때문에? 아닙니다. 인간의 교만함으로 자연마저 누르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지도자들과 그들에 동조하여 물질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은피해야 합니다. 아니 이런 고난은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폭탄을 돌리며 돈을 벌어들였던 미국의 경제는 그 폭탄이 터질때 폭탄을 들고 있던 사람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고난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길 위에서 예수가 우리를 부를때 예수는 우리를 고난의 길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마저 위협받는, 아니 분명히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런 길에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그러니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요. 초막 셋과 고난의 길을 바꿀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릴때 제자들의 더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담긴 그 두려움앞에 제자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큰 두려움.
4. 하나님의 위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땅위에 엎어진 제자들을 보며 그들에게 손을 대고 일으켜 주시며 예수는 제자들을 위로합니다. 길 위에서 예수와 함께 맞이 하는 고난이 암흑속에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두려움속에 엎드러진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에 그 고난의 무게는 우리 혼자 감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말하면서 그 멍에를 우리에게만 지우지 않습니다. 그는 스스로 그 멍에를 자신이 매고 우리가 거기 따라갈 수 있도록 걸음을 맞추어 주십니다. 시작하는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이끄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속에서 우리는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맞아야 할 고난에서 피하지 못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고난을 피하려하면 진정한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낙망의 두려움, 그 두려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바닥보다 더 낮은 곳에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고난에 초대하면서 동시에 그 고난의 길을 우리가 혼자 가게 두지 않습니다. 위로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에 처할지라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끄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길 위에 설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그 고난의 끝에 존재하는 희망을 보게 되고, 그 희망의 끝에서 고난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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