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잘 쓰여진, 그러나 너무 평범한 원칙을 고수한 베르베르
2007. 10. 3. 10:37ㆍ서평/[서평] 인문
파피용
* 잘 쓰여진, 그러나 너무 평범한 원칙을 고수한 베르베르
파피용은 베르베르의 작품 중 두번째로 읽는 그의 책이다. 어쩌면 더 잘 알려진 개미나 타나토노트 등을 먼저 읽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책을 읽고 두번째로 접한 파피용은 소설 자체로는 잘 쓰여진 편이지만 베스트셀러의 명성을 유지하기에는 2%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 부족 부분을 채운 것이 [베르베르]라는 Name Value 였다.
이브 크라메르와 엘리자베트 말로이, 그리고 가브리엘 맥나마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소설 초반부는 여타 소설들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는 대표적인 플롯의 전개로 이어진다. 만남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상황은 또 다른 사건을 낳는다.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고 거기서 주동과 반동의 대립이 나오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그 사이에 들어가는 플롯은 내러티브의 전개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파피용은 이런 부분에서 베르베르의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해석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플롯으로 전개하고 있다.
파피용은 크게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파피용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담는 첫번째 단편은 위기에 처한 지구와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소수자의 투쟁을 담고 있다. 두번째 단편은 떠난 소수자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번째 단편은 단 두명만이 도착한 새지구에서의 정착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세번째 단편의 결론은 순환은 고리를 가진다.
* 단편 I -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
이브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해낸다. [빛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 말대로 빛으로 움직이는 우주범선의 설계도를 들고 만난 가브리엘 맥나라마는 초대형 우주 범선을 제안하고 그 계획을 실천한다. 이미 세상은 더 이상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는 상태였고, 세상에 가질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일한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라고 믿었다.
베르베르의 눈에 비친 세상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종교적 광신, 정치적 술수, 군화발 무력, 테러와 이기주의 등 희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거기서 파피용을 타고 갈 사람은 나쁜 성향을 적게 가진 사람들로 사회를 이루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1000년동안 자손을 낳아 사회화가 가능한 이들이 되어야 했다.
나쁜 성향을 적게 가진 사람을 뽑는 심사 기준은 별나다. 자율성, 사회성, 동기부여, 건강, 젊음, 독신, 전문성 등으로 뽑으며 여기엔 정치인, 군인, 목사를 필요없는 인물로 간주한다.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 그것이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첫 걸음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의 책을 계속 읽으면 나오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을 선하거나 사회성이 훌륭한 존재로 지속시키지는 못한다. 이는 베르베르도 알고, 독자도 아는 내용이다. 유일하게 모르는 이는 14만 4천명의 선발인원을 정하는 전문가로 구성된 심리팀 뿐이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파피용호에 대한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까지 생겨났다. 막 나마라는 이런 말을 한다.
[보수 반동적인 자들이지. 순식간에 우리가 그들의 새로운 증오의 대상이 된거요. 대중들한테는 항상 누군가 증오할 대상을 만들어 줘야 하는 법이지...]
D.E. 즉,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파피용호의 프로젝트는 출동한 군대에 의해 저지될 상황까지 이른다. 한편으로는 대립하는 세력을 둠으로서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해지겠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반동의 성격은 베르베르 자신이 보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설 속에도 현실에 대한 반영과 함께 현실에 대한 개혁이 동시에 들어있으며, 비록 소설이 논설문이나 웅변조의 계몽적 글은 아닐지라도 그 내러티브는 현실이라는 기반위에 서야 하며, 그 기반위에서 쌓인 글은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메스를 대는 역할까지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단편의 마지막부분에 나온 갈등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공감을 얻기에 힘든 무리였다.
* 단편 II - 선택된 자들의 선택받지 못한 선택
마지막 희망이라고 명명한 엑소도스의 길에 오른 14만 4천은 선택된 자들이다. 선발과정에서 선택되었으며, 그 이후 몇번의 갈등구조속에서 다시 정제되고 걸러진 공동체집단이다. 정치인, 군인, 종교인이 없는 전문가와 미혼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이상적 집단의 모습이다.
이 이상적 집단속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그리고 법 없이도 살수 있을 줄 알았던 14만4천이라는 사회속에 새롭게 법과 질서, 정부와 힘이 들어선다. 전쟁이 벌어지고, 천년 후 남은 인원은 단 6명이다.
베르베르는 종교는 사람을 의존하게 만드는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소설의 곳곳에 성경의 세계관을 가져다 사용한다. 이는 두가지 이유에서 성경의 세계관을 사용하는 듯 하다. 첫째는 그것이 이미 보편화되었기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두번째는 포스트모던적 사유속에서 기존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하고 철저히 원 의미를 왜곡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14만 4천명이라는 숫자와 성경의 천년왕국의 의미하는 천년이라는 우주여행, 노아의 방주를 흉내낸 파피용, 지옥으로 변해버린 지상세계와 거기서 탈출하는 휴거, 사틴과 사탄, 선지자, 여자와 뱀의 적대관계,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 구전을 통해 오해된 사실을 전파하는 인류, 이 모든 것들이 베르베르가 성경의 텍스트를 자신의 사유로 해석하고 재정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가이아이론과 빅뱅, 우주생명기원설과 진화등이 혼용되며 소설에서만 가능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러나 베르베르 조차도 인류의 죄성과 죄성의 발현이 아무리 정제된 14만 4천이라는 새인류의 죄의 문제를 풀수는 없었다. 단 6명이 남을 때까지 인류는 죽이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한다. 선택된 자들은 선택받지 못한 선택을 통해 자멸하고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은 발전과 진화의 시간이 아닌 퇴행과 원시로의 회귀의 시간이었다.
물론 소설이기에, 그 어떤 소재를 변형해서 사용해도 문제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플롯을 가져다 사용한다고 나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소설은 모든 것을 소재로 쓸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소설가는 없다. 자기가 쓸 소재와 플롯을 선별해서 얼마나 잘 소화해 내었는가에 그 소설의 선과 악이 결정된다. 베르베르는 파피용에서 너무 많은 소재를 끌어들였다. 심지어 그 자신도 사유하지 못한 소재들의 혼잡함속에서 그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늘어놓았을까? 조금 더 정제되고 절제된 소재속에서의 사유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차라리 단편이었던 [여행의 책]은 비록 그 사유자체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파피용]보다 나았다.
[난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운석들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왔다고 믿어...] 이브의 우주생명기원설은 세번째 단편에서 조금 다른 모양으로 실현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엘리자베트의 말이다. 항상 최악의 인간이 법을 만들게 되는 파피용내부의 모습을 보며 그 이유를 단정짓지만 어쩌면 이것이 정치와 힘과 종교를 떠난 인간이 내릴수 있는 최종적 죄의 결과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를 베르베르가 보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모습이 죄에서 떠난 상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단편 III -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남겨진 6명의 사람들, 그리고 단 둘밖에 탈수 없는 우주선, 한명의 여자와 5명의 남자, 갈등은 뒤로하고 여자에 의해 선택된 남자는 새로운 별로 향한다. 거기서 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둘은 싸우고 헤어진다. 지구에서 가져온 바이러스는 행성의 공룡들을 죽이고, 별거하는 여자는 뱀에 물려 죽는다. 혼자 남게된 남자는 자신의 갈비뼈를 빼내어 골수를 추출하고 그것으로 수정란을 만들어 인공자궁을 통해 여아를 만든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에야(Eya)였지만, 발음이 불 분명한 아이는 자신을 Eva라고 불렀다. 여자는 남자를 아담이라고 불렀고, 아담은 먼 지구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른건 잊혀도 이야기는 남으니까..], [그들은 미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과거인데...], [우리 조상들은 새로운 지구에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지구에서 탈출했어.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해],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지구상 생명의 출현에 대해 창조와 진화 그리고 외계에서 생명이 전해졌다는 가설도 있다. 외계생명유입설은 이 부분에서 소설의 또 다른 소재로 등장하고, 구전으로 이어지는 신화의 창조장면, 지구의 첫 인류인 아담과 이브의 모습, 또 다른 많은 지구들의 대한 말이 전달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또 다시 첫 부분으로 공명한다.
* 원형회귀적 동심의 고리속에서 순환하는 우주사
지구는 두번 존재했다. 이 소설에서 첫번째 지구는 탈출을 시도하는 곳이 되고, 두번째 지구는 탈출의 도착지가 된다. 14만 4천명의 신인류는 과거 의존을 버린 사회성을 가졌다고 자부했지만 그 역시 갈등과 죄와 살인과 전쟁을 겪었다. 단 두명이 내린 신천지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지 않아 여자는 뱀에 물려 죽어갔다. 새로운 인류의 태동은 새로운 갈등을 내포한다. 새로운 것은 없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행성의 공룡들은 지구의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지구의 생명들은 행성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은 다시 지구를 망치듯 새로운 행성을 망치겠지, 또 다른 지구를 찾아나서겠지, 파피용 2호가 만들어질까? 파피용은 원형회귀적 동심의 고리 속에서 악순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 모습속에서 보듯이 답은 없다. 정치인과 군인과 종교인을 배제하는 것이 답이 되지 않고, 신천지를 찾아 낸 것이 답이 되지 않고, 신천지의 주인이 된 것 역시 답이 되지 않는다. 베르베르는 그것을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 결론으로의 구원의 문제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잡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은 끝이 되고, 끝은 처음이 되며, 내가 알게 뭐냐는 작가의 조소섟인 지나치게 가벼운 소설이상은 아니다. 독자에서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하는 소설가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라는 그의 답변은 결국은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움 이상은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즐거움마저 얻지 못했다면 이 책은 작가 본연의 책임마저 유기한 것이 아닐까?
* 잘 쓰여진, 그러나 너무 평범한 원칙을 고수한 베르베르
파피용은 베르베르의 작품 중 두번째로 읽는 그의 책이다. 어쩌면 더 잘 알려진 개미나 타나토노트 등을 먼저 읽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책을 읽고 두번째로 접한 파피용은 소설 자체로는 잘 쓰여진 편이지만 베스트셀러의 명성을 유지하기에는 2%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 부족 부분을 채운 것이 [베르베르]라는 Name Value 였다.
이브 크라메르와 엘리자베트 말로이, 그리고 가브리엘 맥나마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소설 초반부는 여타 소설들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는 대표적인 플롯의 전개로 이어진다. 만남은 상황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상황은 또 다른 사건을 낳는다.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이르고 거기서 주동과 반동의 대립이 나오고 이는 또 다른 갈등을 낳는다. 그 사이에 들어가는 플롯은 내러티브의 전개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파피용은 이런 부분에서 베르베르의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해석을 담고 있으며 그것을 플롯으로 전개하고 있다.
파피용은 크게 세개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파피용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담는 첫번째 단편은 위기에 처한 지구와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소수자의 투쟁을 담고 있다. 두번째 단편은 떠난 소수자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번째 단편은 단 두명만이 도착한 새지구에서의 정착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세번째 단편의 결론은 순환은 고리를 가진다.
* 단편 I -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다
이브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해낸다. [빛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 말대로 빛으로 움직이는 우주범선의 설계도를 들고 만난 가브리엘 맥나라마는 초대형 우주 범선을 제안하고 그 계획을 실천한다. 이미 세상은 더 이상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는 상태였고, 세상에 가질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일한 마지막 희망은 탈출이라고 믿었다.
베르베르의 눈에 비친 세상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종교적 광신, 정치적 술수, 군화발 무력, 테러와 이기주의 등 희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거기서 파피용을 타고 갈 사람은 나쁜 성향을 적게 가진 사람들로 사회를 이루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1000년동안 자손을 낳아 사회화가 가능한 이들이 되어야 했다.
나쁜 성향을 적게 가진 사람을 뽑는 심사 기준은 별나다. 자율성, 사회성, 동기부여, 건강, 젊음, 독신, 전문성 등으로 뽑으며 여기엔 정치인, 군인, 목사를 필요없는 인물로 간주한다. 정부도 군대도 종교도 없는 최초의 사회, 그것이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첫 걸음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후의 책을 계속 읽으면 나오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인간을 선하거나 사회성이 훌륭한 존재로 지속시키지는 못한다. 이는 베르베르도 알고, 독자도 아는 내용이다. 유일하게 모르는 이는 14만 4천명의 선발인원을 정하는 전문가로 구성된 심리팀 뿐이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파피용호에 대한 소식이 외부에 전해지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대까지 생겨났다. 막 나마라는 이런 말을 한다.
[보수 반동적인 자들이지. 순식간에 우리가 그들의 새로운 증오의 대상이 된거요. 대중들한테는 항상 누군가 증오할 대상을 만들어 줘야 하는 법이지...]
D.E. 즉,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파피용호의 프로젝트는 출동한 군대에 의해 저지될 상황까지 이른다. 한편으로는 대립하는 세력을 둠으로서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해지겠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반동의 성격은 베르베르 자신이 보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소설 속에도 현실에 대한 반영과 함께 현실에 대한 개혁이 동시에 들어있으며, 비록 소설이 논설문이나 웅변조의 계몽적 글은 아닐지라도 그 내러티브는 현실이라는 기반위에 서야 하며, 그 기반위에서 쌓인 글은 현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 메스를 대는 역할까지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단편의 마지막부분에 나온 갈등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공감을 얻기에 힘든 무리였다.
* 단편 II - 선택된 자들의 선택받지 못한 선택
마지막 희망이라고 명명한 엑소도스의 길에 오른 14만 4천은 선택된 자들이다. 선발과정에서 선택되었으며, 그 이후 몇번의 갈등구조속에서 다시 정제되고 걸러진 공동체집단이다. 정치인, 군인, 종교인이 없는 전문가와 미혼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이상적 집단의 모습이다.
이 이상적 집단속에서 살인이 일어난다. 그리고 법 없이도 살수 있을 줄 알았던 14만4천이라는 사회속에 새롭게 법과 질서, 정부와 힘이 들어선다. 전쟁이 벌어지고, 천년 후 남은 인원은 단 6명이다.
베르베르는 종교는 사람을 의존하게 만드는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소설의 곳곳에 성경의 세계관을 가져다 사용한다. 이는 두가지 이유에서 성경의 세계관을 사용하는 듯 하다. 첫째는 그것이 이미 보편화되었기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두번째는 포스트모던적 사유속에서 기존의 의미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하고 철저히 원 의미를 왜곡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14만 4천명이라는 숫자와 성경의 천년왕국의 의미하는 천년이라는 우주여행, 노아의 방주를 흉내낸 파피용, 지옥으로 변해버린 지상세계와 거기서 탈출하는 휴거, 사틴과 사탄, 선지자, 여자와 뱀의 적대관계,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 구전을 통해 오해된 사실을 전파하는 인류, 이 모든 것들이 베르베르가 성경의 텍스트를 자신의 사유로 해석하고 재정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가이아이론과 빅뱅, 우주생명기원설과 진화등이 혼용되며 소설에서만 가능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러나 베르베르 조차도 인류의 죄성과 죄성의 발현이 아무리 정제된 14만 4천이라는 새인류의 죄의 문제를 풀수는 없었다. 단 6명이 남을 때까지 인류는 죽이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한다. 선택된 자들은 선택받지 못한 선택을 통해 자멸하고 있었다. 천년이라는 시간은 발전과 진화의 시간이 아닌 퇴행과 원시로의 회귀의 시간이었다.
물론 소설이기에, 그 어떤 소재를 변형해서 사용해도 문제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플롯을 가져다 사용한다고 나무랄 것도 없다. 하지만 소설은 모든 것을 소재로 쓸수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소설가는 없다. 자기가 쓸 소재와 플롯을 선별해서 얼마나 잘 소화해 내었는가에 그 소설의 선과 악이 결정된다. 베르베르는 파피용에서 너무 많은 소재를 끌어들였다. 심지어 그 자신도 사유하지 못한 소재들의 혼잡함속에서 그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을 늘어놓았을까? 조금 더 정제되고 절제된 소재속에서의 사유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차라리 단편이었던 [여행의 책]은 비록 그 사유자체는 인정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파피용]보다 나았다.
[난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운석들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왔다고 믿어...] 이브의 우주생명기원설은 세번째 단편에서 조금 다른 모양으로 실현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엘리자베트의 말이다. 항상 최악의 인간이 법을 만들게 되는 파피용내부의 모습을 보며 그 이유를 단정짓지만 어쩌면 이것이 정치와 힘과 종교를 떠난 인간이 내릴수 있는 최종적 죄의 결과에 대한 분석이 아닐까?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한가지를 베르베르가 보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모습이 죄에서 떠난 상태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단편 III -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남겨진 6명의 사람들, 그리고 단 둘밖에 탈수 없는 우주선, 한명의 여자와 5명의 남자, 갈등은 뒤로하고 여자에 의해 선택된 남자는 새로운 별로 향한다. 거기서 둘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둘은 싸우고 헤어진다. 지구에서 가져온 바이러스는 행성의 공룡들을 죽이고, 별거하는 여자는 뱀에 물려 죽는다. 혼자 남게된 남자는 자신의 갈비뼈를 빼내어 골수를 추출하고 그것으로 수정란을 만들어 인공자궁을 통해 여아를 만든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에야(Eya)였지만, 발음이 불 분명한 아이는 자신을 Eva라고 불렀다. 여자는 남자를 아담이라고 불렀고, 아담은 먼 지구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른건 잊혀도 이야기는 남으니까..], [그들은 미래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과거인데...], [우리 조상들은 새로운 지구에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지구에서 탈출했어.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해],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으니까]
지구상 생명의 출현에 대해 창조와 진화 그리고 외계에서 생명이 전해졌다는 가설도 있다. 외계생명유입설은 이 부분에서 소설의 또 다른 소재로 등장하고, 구전으로 이어지는 신화의 창조장면, 지구의 첫 인류인 아담과 이브의 모습, 또 다른 많은 지구들의 대한 말이 전달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또 다시 첫 부분으로 공명한다.
* 원형회귀적 동심의 고리속에서 순환하는 우주사
지구는 두번 존재했다. 이 소설에서 첫번째 지구는 탈출을 시도하는 곳이 되고, 두번째 지구는 탈출의 도착지가 된다. 14만 4천명의 신인류는 과거 의존을 버린 사회성을 가졌다고 자부했지만 그 역시 갈등과 죄와 살인과 전쟁을 겪었다. 단 두명이 내린 신천지에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지 않아 여자는 뱀에 물려 죽어갔다. 새로운 인류의 태동은 새로운 갈등을 내포한다. 새로운 것은 없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행성의 공룡들은 지구의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지구의 생명들은 행성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은 다시 지구를 망치듯 새로운 행성을 망치겠지, 또 다른 지구를 찾아나서겠지, 파피용 2호가 만들어질까? 파피용은 원형회귀적 동심의 고리 속에서 악순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 모습속에서 보듯이 답은 없다. 정치인과 군인과 종교인을 배제하는 것이 답이 되지 않고, 신천지를 찾아 낸 것이 답이 되지 않고, 신천지의 주인이 된 것 역시 답이 되지 않는다. 베르베르는 그것을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한다.
[사람들에게는 노예기질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자유를 요구하면서도 정말로 자유가 주어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어. 반대로 권위와 폭력앞에서는 안도감을 느끼지]
* 결론으로의 구원의 문제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잡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은 끝이 되고, 끝은 처음이 되며, 내가 알게 뭐냐는 작가의 조소섟인 지나치게 가벼운 소설이상은 아니다. 독자에서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하는 소설가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라는 그의 답변은 결국은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움 이상은 아무것도 아님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즐거움마저 얻지 못했다면 이 책은 작가 본연의 책임마저 유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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