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14. 10:36ㆍLife
I. 글 하나
마이클 카드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다. 그가 <엘 샤다이>의 작곡가라는 것도 책의 표지를 보고서 알았다. 그저 좋은 작곡가이려니 하는 생각, 그리고 그가 '애가(哀歌)'라는 주제를 가지고 책을 썼다는 것에 일종의 흥미를 느꼈다. '애가(哀歌)'는 현대 찬양운동, 보다 정확히는 현대 찬양의 흐름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가지게 하는 하나의 오브제이기도 하다.
최근, 교회에서 가르치던 한 청년의 죽음으로 위로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위로예배, 혹은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른다. 장례예배라는 말보다는 천국에 가는 이를 기억하며 환송하는 이들의 예배라고 불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이름이기도 하다.
비록 설교의 시간은 짧지만 그 시간에 어떤 말을 하는 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인지 항상 조심스럽기만 하다. 혹시나 내가 하는 설교를 듣고 그 가족들 중의 누군가가 '차라리 설교를 하지나 말지..', 하는 마음을 품기라도 하면 어쩌나, 아니 그런 마음이 들더라도 괜찮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거나 혹은 내 우스꽝스러운 설교로 슬픔을 잠시라도 잊게 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어쩌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II. 글 둘 - 애통의 언어, 애가
애통의 언어, '애가(哀歌)', 그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승리의 언어, 찬양과 대조되는 위치에 종종 놓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은 슬퍼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쌓인다. 기쁨의 노래를 해야지, 슬프고 우울한 노래, 가슴을 저미는 노래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위배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시대는 더욱 더 승리의 신학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대형교회, 무한한 가능성을 전파하는 설교,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 믿음, 그 이면에 눈물은 패자의 자기비하 이상은 결코 아닌 것이 되어가고 '애가(哀歌)'는 불신앙의 정죄함, 믿음 없음의 지아비판과도 상통하게 된다.
기타의 우울한 선율보다는 드럼의 웅장함과 키보드와 베이스의 둔탁함과 워시퍼들의 발랄한 율동과 멋드러진 애드립에 환호하는 것이 현대 찬양의 일반적 경향이라면 거기에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기에 슬픔을 갖는 것은 누구의 몫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시편의 상당부분의 애가로 채워진다. 단순한 환호보다 단순한 승리의 노래보다, 저주의 노래, 심판의 노래, 슬픔의 노래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성경의 시가서이고, 그것이 성경기자들의 찬양의 결코 작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부였다.
이러한 애가의 중심에서 하나의 질문을 발견하다. 이것은 불평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불평이고, 하나님의 인애(헤세드)에 대한 불평이다. 무소부재하시다면서, 인애하시다면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임재)
.......하나님 날 사랑하신다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습니까? (헤세드)
III. 글 셋 - 예배하기 위해 광야로 부르시는 하나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 그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로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단순히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드릴 예배의 환경은 바로 "광야"였다. 여기에 우리의 찬양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들이 드릴 찬양은 바로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그 광야길의 행로에 대한 요구사항이었던 것이다. 충분히 하나님은 그 길에서도 예배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 그것이 바로 worth-ship,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편한 장소에서만 예배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예배받기 위해 백성을 예배하기 편한 곳으로 모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예배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측 가능한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찬양은 항상 천편일률적인 환호성으로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욥과 다윗과 예레미야, 그리고 예수님의 슬픔의 노래를 통해 진정한 찬양의 의미를 살핀다. 그것은 종종 '애가(哀歌)'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노래이고, 그것이 우리가 부를 찬양의 노래임을, 또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IV. 글 넷 - 욥과 다윗과 예레미야, 그리고 하나님의 애가
친구들과의 지루한 신학적 대화를 통해 오히려 자신의 애가를 상실해가는 욥의 모습, 친구들과의 논쟁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욥은 스스로 가지고 있던 신성한 '애가(哀歌)'를 잃어가고 있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듯 착각하는 것에 빠져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어간다. 우리는 슬픔을 슬픔으로, 때로는 그 슬픔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우리의 시공간의 제약속에 틀어맞추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은 하나님을 기계적인 신으로, 혹은 이기적인 신으로, 혹은 무능력한 신으로 묘사한다. 그 모든 인간의 방법을 동원한 시도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부정한 채 유한한 자로 무한한 하나님을 측정하려는 그 무지한 시도는 오히려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사람에게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빼앗게 되고 만다.
다윗의 애가,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부른 하나님의 애가, 그 애가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왕을 찾는 것을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던 이들이 선지자에게 찾아와 왕을 달라고 했을 때, 찢어지는 마음으로 오히려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며 그들에게 왕을 준 하나님, 그 마음은 '애가(哀歌)'를 부르고 있었다. 이 백성이 나를 버렸다, 이 백성이 나를 버렸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위해 사랑을 노래하는 하나님의 노래, 그것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애가(哀歌)'외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떠난 백성을 위해 기꺼이 슬픔을 노래하며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 마치 아들을 대신해서 죽기를 바라는 왕 다윗의 노래속에 드러난 그 슬픔이 오늘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지는 않는가? 예례미야, 그의 눈물은 하나님의 고통과 분노로부터 흘러나왔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차라리 더 이상 선지자노릇하기를 포기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까지 표현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슬픔은 찬양으로 흘러나온다. 납득하기 힘든 예레미야의 애가, 그 속에 담긴 찬양, 이것은 슬픔과 그 슬픔을 넘어선 자에게만 가능한 노래이기에 이 노래는 가장 깊은 찬양이 된다.
V. 글 다섯 - 애가, 그 슬픔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의 현존
우리는 지금까지 승리에 취해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승리를 주는 이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심지어 그 극한 상황에서의 자유함 보다도 하나님, 그 분의 임재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애가는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고통받아야 하는가? 왜 욥의 고통받아야 하는가? 왜 지구상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통당하는가? 왜 아프간을 돕기 위해 간 이들이 고통받고 심지어 죽기까지 해야 했는가? 그것은 알지 못한다. 그 상황에 대한 설명과 답변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완전한 답이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리고 '애가(哀歌)'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그 슬픔을 예배의 제물로 드리게 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슬픔은 의미있는 형태의 제물이 된다. 우리의 유일한 해답은 바로 거기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현존이다. 그 임재야말로 우리의 소망이고 모든 의문의 대답이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애가(哀歌)'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소유한 '애가(哀歌)'는 우리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있게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한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로 슬프게 두시는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애가(哀歌)'를 소유한 자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깊은 예배를 가능하게 할 뿐이다.
VI. 글 여섯
우리의 예배에 '애가(哀歌)'가 회복되어야 한다. 억지스런 기쁨과 억지스런 승리의 미학에 빠져든 승리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장한 자아실현과 마인드컨트롤의 신앙이 아닌,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호소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약함과 뼈아픈 후회를 기꺼이 발산하고 거기에 낮은 곳에 기꺼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거기에 우는자의 예배가 있으며, 거기에 슬픔을 당한 자의 위로가 있다. 거기에 슬픔을 기쁨으로 역전시키는 놀라운 기적이 있으며, 거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하는 곳이다. 우리의 찬양은 슬픔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슬픔을 통해 우리는 웃음중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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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마이클 카드의 [잃어버린 노래, 애가]에 대해 썼던 서평을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편집하기 전의 원문은 아래 링크로 가면 읽을 수 있습니다.
[VIA:JelicleLim]
[BWFC칼럼] '애가(哀歌)'와 믿음
http://jeliclelim.tistory.com/266
JelicleLim (200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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