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단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

2007. 10. 8. 20:58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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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덕률, 자연법, 양심 어떻게 부르던 무엇인가가 있다!!

자연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Law of Human Nature 라고 불리는 것으로 도덕률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아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배우지 않으면 수학을 할수 없다. 구구단을 외지도 못한다. 덧셈과 뺄셈 조차도 배우지 못한다면 하지 못한다. 하지만 배우지 않더라도 아는 것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규칙들은 성문화되지 않는다. 꼭 배워야만 아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왠만하면 이걸 지키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비록 잘못된 방식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어떤 이는 고액 과외를 시키고 어떤 이는 힘을 사용해서 자식의 군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한다. 비록 그 방식은 잘못일 지라도 그들 모두,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 바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나오면 대부분의 경우 그 부모에 대해서 비난이 인다. 자식을 때리는 부모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우리는 그가 "잘못"했다는 것을 누군가가 억지로 알려주지 않아도 "안다".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세살이 되는 형이고, 둘째 아이는 이제 막 백일이 된 아이다. 첫째는 자신의 사랑을 둘째가 빼앗아 간 것에 화가 났다. 첫째는 둘째를 때렸다. 아버지는 그 첫째 아이를 방에 데리고 가서 타이른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일이야."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자신의 말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아버지의 말을 생각해 본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일이다는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적어도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틀린 것이다. 악이다. 이것은 굳이 누군가가 억지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아는 것이다.

이러한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어떤 법칙이 있음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것을 도덕률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라고 초등학교의 사회교과목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도덕률이라는 법칙이 나온 근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도덕률은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말은 즉, 적어도 누군가가 정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무엇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최소한 그 정한 존재와 만든 근원이 인간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2. 어떤 반론들 ...

물론 이러한 점에 대해서 반론들도 있다. 첫째로 다른 인간의 본능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과정을 겪으며 발전되어 온 본능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본능으로 생각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기본적으로 본능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누르게 된다. 일주일을 굶고 배가 고픈 전쟁 난민에게 미인과의 데이트와 배부른 식사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할때 우리는 그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안다. 두가지 본능, 성욕과 식욕이 충돌할 때 그중 강한 본능이 다른 본능을 누르게 되는 것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약한 사람을 돕는것이 선이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도덕률의 한 예이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본능은 약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취하기를 원한다. 약한 사람, 배고픈 사람을 도울 돈으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멋진 목걸이에, 새로 나온 차를 뽑아 다니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그런데 이 도덕률은 그 본능을 누르게 한다. "이거 먹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잖아. 저 사람은 정말 먹지 못해서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인데, 저 사람을 도와야 하지 않겠어?" 하고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며 말을 건다.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률이고, 그 도덕률을 만든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러한 논리는 이미 이전에 언급했듯이 플라톤을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의 동굴의 비유를 살펴본다면 이러한 논의에 대해 보다 깊은 사유가 가능할것이다. 단, 섣부르게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 사람이고, 더 이상 인용할 필요도 없는 구시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플라톤을 깍아 내리는 것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극복했다고 하니까 나도 극복했을 거라고 착각하는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플라톤의 철학은 불완전한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플라톤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함부로 깍아 내리거나 홀대하는 제대로 된 지식인은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도덕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한가지 이런 결론은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도덕률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어떤 기준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는 두번째 문제다. 적어도 무엇인가에 대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과 악의 구분은 없다고도 말한다. 범신론자들, 흰두교나 불교, 헤겔 같은 철학자들은 범신론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선악간 구분은 없다. 혹은 불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맨 윗 부분은 이 글을 쓰는 날, 인터넷에서 어느 신문의 모니터 화면을 캡춰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사건들은 매일같이 벌어진다. 한 기사 제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게임비를 벌기 위해 임신한 부인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남편이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도 악이 아닌것이 된다. 흰두교에 대해서는 굳이 비판을 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그 종교의 세계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할 필요는 있다고 느껴진다. 흰두교는 윤회적 사관을 가진다. 그래서 현세에서 받는 고통은 전생에 벌인 것의 댓가라고 믿는다. 지금 이 고통을 달게 잘 받으면, 천신 출신인 불가촉 천민들이 브라만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고, 혁명을 벌이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고, 그저 잘 참고 견디다가 죽으면 다음 생에는 브라만 같은 좋은 카스트로 태어날 거라고 믿는다. 선이 없고 악이 없다. 그들의 세계관속에서는 지금 받는 고통은 이전의 댓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말을 쓰면서도 한편으론 우습다. 지금 받는 고통이 악의 댓가라면, 그리고 브라만 같은 카스트의 생애가 선의 댓가라면 이미 그것 만으로도 그들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모순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선악간의 구분이 없으며 절대적인 기준도 없다고 말하는 이들 역시 대부분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되는 말을 듣게 된다면 보통은 열을 낸다. 암세포는 치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할 존재일까? 임신한 부인을 게임비 마련을 위해 성매매에 내보낸 남편도 선을 행한 것인가? 누군가에게 묻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라, 그는 잘한 것인가 아니면 잘못한 것인가? 적어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잘못에 대한 기준이 나에게 있으며, 세상의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인식되지 않는가?


3. 과학에 대한 오해

종교적인 관점은 고대의 유물이요, 신화일 뿐이고, 현대의 관점은 과학적인 진화론에 바탕한 유물론이라는 생각도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다. 유물론은 플라톤 이전시대부터 분명히 있어왔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만물의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물과 불, 흙 등을 말해왔다. 요즘에 인기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가치는 이미 그들의 시대에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통해 시작되었다. 종교는 신화요,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고, 과학은 종교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는 오해는 일부 과학자들과 그들을 신봉하는 일부 군중들의 것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역시 과학자들 중에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학으로 도덕률을 해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이들이 오히려 많다는 것 또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과학은 사실을 관찰한다. 관찰된 사실에서 어떤 것을 추론하기도 한다. 그것에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법칙은 반드시 그렇게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구 연대 측정법으로 우라늄의 반감기를 이용한다. 우라늄 238의 반감기는 42.1억년이다. 이 반감기 조사를 통해 지구의 연대를 측정했다. 단, 지구 초기에 우라늄이 변화된 납 206 이 전혀 없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 그 기간동안 다른 어떤 원인으로 인해 우라늄 238의 붕괴속도를 빨리 하는 어떤 요소나 영향이 없었어야 한다. 이 말은 지구의 나이를 계산한 방법에 대해서 그것이 답이 될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것이 답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42억년전으로 돌아가서 납 206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학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과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적어도 필자는 과학을 존중하고 공학을 하는 입장에서 과학과 공학이 가진 잠재력과 위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반인들보다는 더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과 공학을 만병통치약에 대한민국의 부강한 선진국으로 만들 수 있으려니 오해하는 이들의 잘못된 시선을 보면 어떤 때는 낙담이 되기까지 한다. 한때 줄기세포 논란을 겪었던 황우석 교수의 일은 아직도 아픔으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는 그 전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문제에 대해서 우려하며 글을 썼던 적도 있다. 생명윤리의 문제들이었다. 결국 그 모든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했던 이들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끌고 가려는 영웅의 앞길을 막는 소인배로 취급당했다. 그리고 이후 줄기세포가 없다는 것과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황박사의 연구는 연구 자체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경제논리에 따른 문제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졌다. 무척 아쉬웠다. 논문에 조작이 없더라도, 줄기세포가 있었더라도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따른 윤리적 기준과 연구의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는 사회분위기가 되어야 하지만 결국 BT를 도깨비방망이로 인식하는 어쩌면 다수의 파시스트적 움직임때문에 귀중한 논의의 기회마저 앗아가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다.과학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낳기 원한다. 비록 그것이 잘못이라 할지라도 그 유혹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큰 비용을 치렀다.

말이 조금 옆길로 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은 하고 있는 것, 혹은 눈에 보이는 것, 관찰이 되는 것에 한해 제한된다는 것이다. 행동을 주로 본다고 해도, 과학은 "하고 있는", 그래서 관찰 가능한 행동을 보게 된다. 하지만 도덕률은 "해야 하는", 그래서 때로는 관찰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것이다. 과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는 도덕률에 관한 어떤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내면을 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도덕률을 발견할 수 있고, 그 도덕률에 이율배반적인 세상과 세상속에 속해 있는 나를 보게 된다.


4.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종교는 검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신화적인 우상에 빠진 어리석은 종교로 미리 전제하지 말라.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종종 마르크스의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을 인용하는 이들도 많다. 물론 그 말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라 살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경제관에 대해서도 비평적일게다. 단지 그의 한 마디 "종교는 아편"이라는 그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이 많다. 그것이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말을 반복했더라도 그 말이 정말 그런지 확인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필자의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길을 잃은 사람은 잠시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확인하고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 기독교가 혹시 그 길이 아닐까를 고민하는 이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래서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필자는 만족할 것이다.

위에서 도덕률이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했다. 모두에게 있는 어쩌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다시한번 위에 달리, 이 글을 쓴 날짜에 나온 신문의 한 면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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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장미빛으로 환한가? 아니면 지옥의 어두움으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는가? 한걸음만 더 뒤로 가서 살펴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얼짱이라고 유명해진 아이는 친구를 시켜 원조교제를 하게 한다. 화성에서는 연쇄살인범 때문에 어두워지면 밖에 다니는 것이 무섭다. 택시를 타고 귀가하려는 여자를 죽이고 살해해서 한강다리에 버린 사건도 얼마 전에 있었다. 대선이 다가오자 불과 얼마전까지 전우같은 교분을 나누던 사람들이 원수가 되어 서로를 짓밟고 있는 모습, 이것뿐일까?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큰 뉴스들은 즐비하다.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벌이진 미국의 패권주의 전쟁, 거기에 동참해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보겠다며, 미국의 비위를 거스리면 안된다며 미국의 침략전쟁에 일조한 한국 정부와 쌍수를 들고 환영한 대중들, 극우파 기독교인들, 아프리카에서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노예가 되고 죽어가는 원주민들, 그래서 붙여진 Blood Diamond 라는 명칭, 이 많은 것을 늘어놓자니 며칠 밤을 새도 부족할 판이다. 물론 가끔 뉴스에 훈훈한 소식도 있다. 김밥집 할머니가 평생을 모은 돈을 학교와 학생을 위해 쓰라며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소식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볼때 최소한 필자는 이 세상이 "불의"하다는 생각을 버릴수가 없다. 그리고 이 불의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느낀다. 도덕률 배후의 존재는 "의"로운 존재이며, "선"한 존재이다. 그래야만 불의에 대해 그는 "화"를 낼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도덕률 배후의 존재의 선함은 모든 것에 대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 선함은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 악을 저주한다. 그 도덕률의 기준은 지고지순함이다. 최고의 법이며, 적당한 것이 아닌 완전한 것만을 인정한다. 그래서 이 도덕률 앞에서 나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악당이 되고 만다. 나는 불의에 반대한 선한 존재가 없는 세상은 이미 소망이 없는 세상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선한 존재 앞에서 완전한 도덕률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은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함께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 선의 존재가 주는 불안과 부담이다. 우리는 절대 선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 절대 선 앞에 서는 것이 그와 우리가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옳고 그름에 대한 단상을 제시한다. 글의 내용은 [순전한 기독교, C.S.루이스]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설명했음을 밝힌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그 책을 꼭 세번이상 정독을 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함께 그 부분에 대해서 혹은 적용이나 한국적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나눔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것이다.

여기까지는 책은 전반부 중 절반 정도인 [옳고 그름 -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라는 부분의 내용을 주로 참고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후반부의 기독교의 중심 내용들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실제로 이 글은 기독교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유신론적 관점에서 글을 쓴 것이다. 이 철저하고 무자비한 선한 존재로서의 도덕률의 배후에 있는 존재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 신관, 계시, 이해등의 문제는 다음번 글의 내용으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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