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방송했다는 신의 길, 인간의 길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할것도 없다. 하지만 대충 그 내용이 어떠할 것인지는 광고나 기타 여기저기 흘러다니는 말만 들어도 충분히 알수 있다. 신학을 조금이라고 공부하며 스스로 책을 읽는 방법을 습득했다면 이는 특별할 것이 없는 내용이다. 그에 관련해서 뉴스앤조이에서 두개의 글을 발견했다. 여기 그 글을 실어둔다. 나중에 참고하기 위해서...
SBS 대기획 4부작 '신의 길 인간의 길' 첫 편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가 6월 29일 방영됐다.(SBS 홈페이지 갈무리)
[기고] "SBS스페셜, 십자가와 부활을 간과" 예수의 신성 부정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파괴일 뿐
SBS가 기획하여 지난 6월 29일에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 제1부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관심을 촉발시키며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한다. 이 기획물은 버미스(G. Vermes), 크로산(J. D. Crossan) 등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비교적 무게 있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였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비교적 여과 없이 소개하고자 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물은 모든 편집물이 그러하듯이 보이지 않는 주관성을 담고 있다. 그 주관성은 인터뷰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드러난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 전문가는 크로산이 유일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크로산은 비중 있는 학자이긴 하지만 그의 입장은 학계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 하나를 대변할 뿐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미국의 마이어(J. P. Meir)와 샌더스(E. P. Sanders), 독일의 타이센(G. Theissen), 영국의 라이트(N. T. Wright) 등이 중요한데, 이들이 제외되고 크로산의 입장이 마치 정설인 양 소개되는 인상을 주며 결론 내려진 것은 유감이다.
크로산의 주요 방법론은 다중 증언(multiple attestation)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지만, 타이센, 샌더스, 라이트 등이 사용하는 ‘설명가능성 원리’를 무시할 수 없고,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비유사성 원리’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방영물에서 크로산은 요세푸스, 타키투스 등의 다중 증언에 입각하여 예수의 존재의 역사성을 변호한다. 이것은 이교도 신화에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허구라는 가설을 논박하는 중요한 논증이다. 그의 논증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유사성은 영향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 유사한 두 가지 이야기는 서로 영향을 미쳐서 발생했을 필연성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가 그 이전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 없이 단지 이야기 차원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사성에서 인과관계를 끌어내는 논리적 비약이다.
저자들은 어떤 사건을 서술할 때 유사한 평행구절들에 관한 독자들의 지식을 활용한다. 즉 저자들은 의사소통을 위하여 독자들의 선이해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전달된다. 그리하여 여러 본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는 현상이 발생하며, 이러한 유사성의 면밀한 관찰이 본문 해석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현상을 간본문성(intertextuality)라고 부른다. 복음서 본문의 해석에는 구약성서, 중간기 문헌이 매우 중요하다. 복음서는 구약성서과 중간기 문헌의 세계 속에 사는 저자들이 그러한 세계 속에 사는 독자들에 그들이 공유하는 언어 세계를 토대로 의사소통을 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본문성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본문 뒤에 놓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과 유사한 옷을 입은 사람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궤변이다.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인 ‘설명가능성 원리’를 도입한다면 한 가지 비판을 더할 수 있다. 예수가 실재하지 않았고 그 이야기가 과연 허구라면 그렇게 창작된 이야기를 믿고 기독교가 발생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허구 이야기를 믿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고 죽음을 무릅쓸 수 있었을까? 예수의 실재를 부정하는 가설은 기독교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므로 타당성이 없다.
이 기획물에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인 ‘신의 아들,’ ‘천국’의 개념을 진지하게 다룬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개념에 관하여 꼭 언급하여야 하지만 빠뜨린 것이 있다. ‘신의 아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 칭호이다. 4 Ezra 7:28(“나의 아들 메시아”)뿐 아니라, 쿰란문헌(4Q246 2:1)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인 ‘메시아’라는 칭호에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개념을 담아 사용하며 고대하였으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할 때, 이러한 개념에 따라 예수를 종말론적인 구원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지적은 옳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적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를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그 시대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시작되었다. 우리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주)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후(마가 14:25) 십자가상에서 포도주를 마심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마가 15:36).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는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메시아로 취임하시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기획물의 의도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소통을 위한 것인데, 이러한 소통은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유대교와 이슬람과의 소통을 위하여 기독교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일방적 파괴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인간 예수를 메시아(즉 하나님의 아들)라고 선언한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발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말씀에 따라(신명기 21:23)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발생은 예수의 죽음을 무효화하는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부활은 결국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간 예수 자신의 주장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로 받아들어지게 하였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를 묻는 이 기획물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건드렸으나 ‘신의 아들’의 개념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된 배경인 십자가와 부활을 간과하였다. 예수를 정치적 이념을 가졌던 한 독특한 유대인에 불과했다면 기독교는 그러한 인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획물은 피상적으로 보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파괴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이러한 도전 앞에 반응하며 수천 년을 지내왔으며 이러한 도전은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도 언제든지 다루어지며 응전되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학에는 많은 항체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획물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항체가 없는 일부 기독교 단체들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참으로 해악을 주는 것은 오히려 교회의 부패이다. 어느새 기득권층이 되어버리고 기득권층과 타협하고 그들의 수호자가 되어버린 교회의 모습에는 미래가 없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힘으로 선교를 하려는 승리주의에는 십자가도 예수도 없다. 이처럼 예수 없는 교회는 대통령을 배출하거나 정권을 창출해도 그것은 자멸의 길일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기획물을 두고 분노할 때가 아니라 복음을 말로 왜곡하는 목회자들과 행함으로 왜곡하는 기독교 위정자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또한 이기적 기복주의에 빠져 복음을 왜곡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비통해 할 때이다. 본질을 잃은 기독교는 더 이상 지킬 가치가 없으며, 변질된 복음은 더 이상 전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정권에 결탁하여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잘못된 대제사장의 교권세력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의 모습을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세상이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정권과 교권이 결탁하여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여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의 뒤를 따라 이러한 부정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음성이 있는가? 교회가 정권을 배출하였을 때에는 교회가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교회에 돌을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 교회를 버리실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가장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권의 잘못을 지적해야 할 때이다. 교회는 돈과 권력을 택하기보다 하나님을 택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
신현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기고] "SBS '신의 길 인간의 길'은 표절" 반기독교 소설 <예수는 신화다> 베낀 것은 기독교에 대한 폭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반기독교 소설류인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그대로 베낀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 4부작 중 첫 편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가 6월 29일 밤 11시 20분부터 한 시간 동안 방영됐다.
불공정한 내용을 케이블이 아니라 그것도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다는 사실은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는 검증되지 않은 자료 제시와 그 논리전개 방식의 문제점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서 지적되어 이미 학계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허구 소설류인데, 이번에 SBS 스페셜이 전적으로 거기에만 의존하다시피 하면서 특집방송을 만든 것은 공익방송으로서 스스로 그 위상을 격하시킨 부끄러운 사건이며 동시에 정통 기독교에 대한 무책임한 폭거이다.
그러면 필자가 이번 방영된 SBS 스페셜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집트 신화인 ‘오시리스 신화’에 관해 살펴보자. 오시리스 신화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서기 40~70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르크에 의해서다. 다시 말해, 단군신화가 일연에 의해 조선시대에 한국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과 그 유래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플루타르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후 10년 내지 40년이 경과한 때에 출생한 인물이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을 집대성한 사도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을 다 기록한 이후 비로소 활동하기 시작한 철학자이다.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쓴 때를 아무리 빨리 잡아도 70~80년경이므로, 이미 그때는 신약성서의 기록이 거의 마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시기가 맞아 떨이지지 않는다.
둘째,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를 표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 프리크가 플루타르크의 “이시스와 오시리스에 관하여”라는 책을 표절한 것이다. 오시리스는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이집트인에게 농사를 짓는 법과 여러 신들에게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오시리스의 동생인 세트는 이것을 시기하여 자기 형인 오시리스를 잡으려고 교묘하게 수작을 꾸며서 자신이 만든 관 속에 눕히게 된다. 후에 오시리스는 세트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14개로 토막이 나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리스처럼 이시스와 근친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며, 오시리스가 이집트를 28년간 통치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통치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신음하면서 당대에 정치적 메시아만을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와 그 주권을 온 인류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었다.
셋째, 초기 그리스도교는 오시리스 신화와 같은 고대 이민족들의 신화가 간직하고 있는 다신론적인 내용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이 말은 티모시 프리크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신화는 무엇인가? 그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시리스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등장한다.
플루타르크는 이집트 신들의 이름 대신에 로마 신들의 이름으로 대체하여 오시리스 신화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다신론적인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사상에 철저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다신론적인 신화를 배격하고, 죄에 빠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표현 방식도 플루타르크가 오시리스 신화를 소개하는 것과 같은 신화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들의 진술로 되어 있다.
신약성서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역사는 신화와 달리 사건이 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 의미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사역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구원과 은혜와 평강이다.
넷째, SBS 스페셜이 티모시 프리크를 인터뷰 전면에 내세워서 그의 주장들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 것은 한국의 청취자들을 우롱한 처사이다. 더구나 SBS 스페셜 제작진이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단지 방송 초두에 책 표지만을 보여주고 이미 내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설명이나 인용 제시어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가져다가 마치 자기들이 학문적으로 신약성서와 비교를 한 것과 같이 청취자들을 현혹시킨 것은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 검증되지 않은 망상을 무단으로 사용한 일이므로 너무나도 중대한 표절행위이다.
과연 SBS는 티모시 프리크와 특히 그 책의 공저자인 피터 캔디에게 허락을 받았는가? 이는 마치 SBS 스페셜 제작진이 무슨 학자라도 된 듯이 착각하고 청취자들을 기만한 행동이 아닌가? 필자는 이러한 SBS 스페셜의 표절 행위에 대해서 마땅히 그 담당자들에게 엄한 책임을 물어야 공적 기관이 취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SBS 스페셜의 기획의도에 의하면, “본 프로그램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기원을 <예수는 신화다>라는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의의 저서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심어주었다.
결론적으로,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캔디가 공저한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가 이미 서구와 국내 학계에서 그 학문적 가치가 없는 일종의 기독교 비하 소설류로 결론이 난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이번에 특집 프로그램을 만든 SBS는 공익 방송으로서 그 역할을 공정하게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져야한다. 물론 일부 네티즌들이 이번 SBS 스페셜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 혹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의 표출이며 또한 제대로 실상을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의 치기인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줄 아는 공인이라면 스스로 자중 자해할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SBS는 이번 스페셜 방송 파행과 관련하여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단순하게 무마하고 해명만을 할 것이 아니라, 차후에 유사한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청취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제기를 SBS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공개적으로 소개하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 이번에 “예수는 신화다”라는 저서를 표절하고 더 나아가서 공정하지 못하게 특집 방송을 만든 담당자들을 엄히 문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후에 기독교계가 SBS에 대하여 법적으로 그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