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이 사건이 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2009. 10. 1. 16:05ㆍEye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니 화가나고 분노할 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로는 나도 화를 내고, 만약 내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불같이 분노하고 지금 나영이 부모가 겪는 이상의 고통과 분노를 드러내게 될것이다. 하지만 제3자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당사자와 같은 분노에 휩쌓이기 보다는 고통받는 자의 아픔을 감싸안아주는 일이고 또 다시 그런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일게다.
나영이 사건이냐 아니면 이제 거의 신상이 공개된 조모씨 사건이냐는 구별은 차치하고 현재 사람들의 인식의 흐름에 대해서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 있어 글을 쓴다.
가해자의 인권을 짓밟는 것은 한때의 위안은 되고 억울함을 풀 잠시의 쾌락은 될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다음번 피해자의 억울함을 덜어주는 일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집중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과 그가 그 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을 보완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그것을 다시 되돌릴수야 없다. 하지만 되돌릴수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휩쓸리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할 기회와 때를 상실하는 것이 될수도 있다.
1. 받아들일것은 받아들인다.
12년의 처벌이 약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행 법의 테두리에서 지난 재판 결과들에 대한 판례들을 무시하고 판사가 마음대로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는 판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판단이 무조건 다 옳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를 판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그 재판에서의 판결을 내리도록 한 것은 우리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판례를 무시한 것도, 법을 어긴것도, 게다가 자격도 제대로 갖춘 사람의 판결이니 우선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눈물을 머금고라도 말이다.
2. 고쳐야 할 것은 고친다.
하지만 12년의 처벌은 확실히 약했다. 이제까지의 영유아성폭행범들, 간혹 성폭행후 살인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을게다. 그런 경우들에 대한 처벌기준과 교화 및 예방을 위한 다방면의 프로그램과 조처가 필요하다. 이것은 분노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차가워보일지라도 이런 시도들이 분명히 있어야만 앞으로 제2, 제3의 나영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3.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의 의미가 많이 곡해되었다. 그의 죄는 미워하되 인간 조모씨는 미워하지 말자 혹은 그를 미워하지 않아야 하니 형량을 가볍게 하자는 식으로 오해한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모씨를 편드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착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도 없다고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세력을 형성해서 조모씨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없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의 죄를 미워하되 철저히 미워해서 다시는 그런 죄의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동시에 그런 끔찍한 범죄를 행하고도 뉘우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영이는 평생을 배꼽 옆 호스에 의지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 이성 친구를 사귀려는 마음이 들었을때 그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보다 나이가 들수록 더 큰 아픔을 겪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좋아한다는 말을 할수 있을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자연스러운 감정이 사치스러운 것인양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그의 죄는 이와 같이 끔찍하다. 지금보다 10년 후에, 20년 후에 더 끔찍한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10년 후, 20년 후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행동이었는지 깨닫게 될까? 아마도, 아닐게다. 지금의 심정 그대로 10년 후, 20년 후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할게다. 혹은 재수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게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이미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진 모습이다. 벌레의 날개를 뜯으며 부르르떠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는 악동의 모습도, 아파트의 고층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려 죽어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모습도, 어쩌면 그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우리 시대의 병든 모습이기도 하다. 버젓이 티브프로에 야동이야기가 나오고, 일본야동의 심각하게 일그러진 성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모두는 아니라도 일부에게는 이와같은 쉼쉬기조차 역겨운 악취를 풍기게 한다. 그것에 오염된 한 처참하게 일그러진 영혼이 보여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의 참상을 깨닫기까지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기에 그의 인권은 스스로 포기한 것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런 처참한 일을 벌이고도 당당하다. 미친놈.... 맞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불쌍한 미친놈이다.
4. 그를 벌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인가?
고통스런 마음은 알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나영이 부모의 아픔과 고통보다 더하지는 않다. 나영이 부모가 원하지 않는 것을 굳이 억지로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 얻어내려는 시도는 자위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체적 인프라를 구축해야한다. 최소한 이와 같은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만의 하나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돌보는 장치가 필요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영이와 그의 고통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어쩔수 없다. 우리 모두 먹고 살기에 바쁠테니 말이다. 그리고 제2의 나영이가 생긴다면 그때 대중은 더 이상 피해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한번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을때 우리는 무엇이든 만들어두어야한다. 피해자가 더 이상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더 이상의 나영이와 같은 피해자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는 예방장치를 말이다.
최근에 "불멸의 신성가족"이란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의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그 책을 읽고난 다음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이전부터 계속 가졌왔던 불신, 그것이 다시한번 확인되었을 뿐이니 말이다. 다만, 한가지 그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의 힘을 발견했다. 할수 없는 것은 할수 없는 것이지만, 할수 있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할수 없는 것에 내 시간과 중요한 기회를 소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미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 하는 노력과 열정은 오히려 예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쪽으로 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힘이 모아져야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한다. 일회성의 모금은 잠간은 빛이 나겠지만 두번째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절망을 낳게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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