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세력'에 대한 시각을 생각한다.
2012. 3. 14. 09:54ㆍEye/시사단평
1. 들어가는 글
지난번 제주 강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와중에 ‘외부세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종종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커지고 확산되며 지면이나 뉴스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전달되기까지는 현지에 있는 현지인들의 반응뿐 아니라 거기에 외부인들의 입김, 혹은 외부 세력의 압력등이 작용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기에 외부세력이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용어가 아니게 되었다.
2. 외부세력에 대한 석연치 않은 반응
이번 제주 강정 마을에 대한 해군기지건설을 둘러싸고 또 외부세력의 작용을 걱정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존 언론들은 ‘외부세력’, 혹은 ‘전문 시위꾼’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강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실상은 현지인들과는 별 관계가 없는 외부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전달한다. 그 속내는 이번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건은 별로 큰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외부인들이 들쑤셔놓아서 결국 일이 커졌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외부세력이라는 말을 쓸 때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이 된다. 이를테면 한국의 귀중한 문화재가 ‘외부세력’에 의해 약탈당했다 라든지, ‘외부세력’을 몰아낸 후 민족의 독립을 찾고자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한민족과 그 정체성에 어긋나는 세력으로서의 외부인들 혹은 그 외부인들과 동조하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식으로 ‘외부세력’이 종종 쓰여 왔다. 이런 맥락에서 ‘외부세력’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정말 ‘외부세력’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부정적인 어감을 주기위해 ‘외부세력’이라는 말을 ‘일부러’ 사용하는지 거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제주강정마을에서는 ‘외부세력’보다 한단계 높은 ‘전문 시위꾼’ 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사실 현 정부 들어 일반 시민들의 불만이나 촛불집회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민정서를 이해하려는 소통의 쓴 약을 복용하는 노력보다 그들을 ‘전문 시위꾼’으로 몰아버리고 그 소리는 ‘괴담’으로 흘려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대처방식이 되어버렸다. 정말 제주에는 전문 시위꾼, 혹은 종북주의자들이 모여서 북한을 찬양하며 북한을 위해 남한을 분열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3. 제노비스 신드롬
제노비스 신드롬, 혹은 방관자효과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1964년 3월 13일 금요일, 뉴욕 주 퀸스 지역에서 키티라고 불리던 28살의 여성 캐서린 제노비스는 지배인으로 일하던 술집에서 야간당번을 마치고 귀가하던 새벽 3시쯤 한 수상한 남성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 그때 ?제노비스는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구조 요청을 하였고, 아파트에 살던 동네 사람들은 불을 켜고 사건을 지켜보았다. 제노비스를 살해한 범인인 모즐리는 후에 법정 진술에서 집집마다 불이 켜졌지만 사람들이 사건 장소로 내려올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고 했다. 갑자기 불을 켜고 지켜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사건 장소로 오지 않는 대신 "그 여자를 내버려 두시오."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모즐리는 바로 도망을 쳤고, 제노비스는 난자당한 몸을 이끌고 어느 가게 앞으로 드러누웠다. 잠시 후 모즐리는 다시 나타나 제노비스의 온몸을 다시 한번 난자했다. 제노비스는 계속 소리를 질렀고, 또다시 아파트 불이 켜지자, 모즐리는 또 도망을 갔다. 제노비스는 힘겹게 자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건물 복도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분 후에 모즐리가 다시 나타나 제노비스를 강간했다. 이 살인사건은 새벽 3시 15분에서 50분까지 약 35분 동안 일어났다. 집에 불을 켜고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총 38명이었고, 그들은 직접 사건 현장으로 내려가 제노비스를 구출하지는 않았다. 사건이 끝나고 한 명이 경찰에 신고했으나, 그녀의 목숨은 이미 끊겨 있었다.
처음 이 사건은 뉴욕 타임스지에 네 줄짜리 기사로 실렸다. 그러나 나중에 뉴욕 주의 섹션 담당 편집자 로젠탈이 그 사건을 목격하고도 도와주지 않은 38명의 방관자들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로젠탈은 뉴욕 타임스지에 38명의 방관에 대하여 기사를 실었고, 미국 전역에 38명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방관자 효과 또는 제노비스 신드롬은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책임은 분산되어 결과적으로 아무도 나서지 않는 현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본다면 아무리 그 38명이 자신의 정당성을 심리학적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비참하게 여러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제노비스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경찰에 연락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제노비스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 제노비스는 38명의 심리적 상태를 이해하며 자신의 죽음이 정당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왜 사람들이 자신의 외침을 이렇게 외면하는지, 왜 도움을 구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않는지 그 답을 모른채 죽어갔을 것이다. 안다고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을 그런 답이 심리학자들을 통해 나왔을 뿐이다.
나는 관계 없다. 그저 나는 조용한 마을에 살기 위해 여기 이사왔을 뿐이다. 시끄럽게해서 내 수면을 방해하지만 말라. 나는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하지 않겠다. 게다가 나 말고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굳이 내가 나서야 할 이유 따윈 없다. 저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사고가 난거고, 다른 사람들이 경찰을 부르든지 알아서 하겠지, 난 숙면을 취해야겠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다들 하고 있었을 것이다.
4. 행간을 읽는 사고
종종 우리는 글을 읽을 때 행간을 읽으라고 한다. 글자로 쓰여진 그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자, 그 문자가 쓰여진 이면의 내용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 세력’, 혹은 ‘전문 시위꾼’ 이라는 말은 정말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들일까? 아니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혹시 그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방관자’로 만들기 위해 선택된 단어들이 아닐까? 작은 어감의 차이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치기도 한다. 어떤 집회에 ‘노벨 평화상’ 후보가 참석했다는 어감과 어떤 집회가 ‘전문 시위꾼’들에 의해 주도 된다는 어감은 이미 그 집회에서 말해지는 내용을 듣기 이전에 미리 ‘판단’하게 만든다.
그러기에 진보 매체들은 제주 강정에 ‘노벨 평화상 후보 엔지 젤터’가 함께 하고 있으며 ‘노벨 평화상 후보’가 군경에게 폭행을 당했음을 알리고, 보수 매체들은 이 노벨 평화상 후보 대신 ‘외부세력’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정치인들이나 환경운동가에 대해서는 ‘전문 시위꾼’이라는 단어로 포장한다.
이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 거기에 나 말고도 이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이러한 책임분산효과, 제노비스 신드롬은 그 일을 했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이익은 거의 없는 반면 불이익은 상당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잘 포장해준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러한 나를 정당화한다. 제주 강정은 거기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나는 그 일과는 상관없어라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 편안한 마음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울고, 감정을 이입한다. 개그프로를 보며 스트레스를 날린다. 그리고 나는 그 ‘외부세력’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왜냐하면 ‘외부세력’이란 말은 ‘왕따’와 비슷하게 찌질한 어감을 가진 단어기 때문이다.
5. 그러면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반대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며 하여가를 불러줄 때 그것이 정말 옳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외부세력’을 경멸하는 하여가는 모든 사람을 개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개인이 된 국민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없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마틴 니묄러는 ‘그들이 왔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맨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노비스는 나 자신일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제노비스가 될수 있다. 제노비스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제노비스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장 내게 불이익이 오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가는 불이익은 언젠가 반드시 나와 우리 가족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구성원을 지키는 대신, 구성원의 희생위에만 설수 있는 그런 사회 시스템이라면 희생자를 몇 명 선출하기 위해 투표하는 것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은 그러한 시스템을 전면 수정하는 것이다. 타인의 생존과 희생을 담보로 지속되는 사회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회다. 국가는 개인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국민을 희생시키며 성장하는 국가는 수정되거나 혹은 없어져야 할 국가다.
나는 ‘외부세력’을 존경한다. 돈을 벌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문제라고 여겨왔던 많은 문제들을 우리의 문제라고 여기며 뛰어든다. 그러기에 종종 이해관계가 걸린 어떤 집단으로부터 눈총을 받는 것도 불사한다. 이익은 없지만 불이익은 충분히 당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인권이 될 수도 있고, 환경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혹은 반대하는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외부세력’으로 불리고, 그 가치를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유혹을 버렸다는 그 사실 하나로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그들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우리는 기존의 이익단체들이 보여왔던 프레임속에 갇혀서 그들을 단순한 ‘외부세력’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적어도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말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 때로는 그들의 주장에 반대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들의 주장이 옳기에 수긍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도 있다. 적어도 먼저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판단은 그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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