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22. 13:55ㆍEye/시사단평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봤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많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 간단히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대학 교수가 있다. 그는 수능시험에 나왔던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동료 교수들로부터 눈 밖에 나게 된다. 다음해 재임용에서 탈락하게 된 교수는 법원에 자신의 재임용 탈락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그 잘못을 고쳐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재판은 재임용 탈락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내려진다. 불만을 품은 교수는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간다. 밤늦은 시간, 교수는 판사와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화살이 발사된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된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교수는 법원에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겠다고 주장하며 검사가 제시한 증거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모든... 재판 과정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 1심과 2심은 건너뛰고 마지막 3심 과정만을 주의 깊게 보여준다.
영화 속 교수와 변호인의 주장은 이렇다. 첫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 둘째, 피해자의 주장이 바뀌고 있다는 것, 셋째, 판사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대신 덮기에만 급급해한다는 것이다.
부러진 화살이 있다고 했으면서 정작 증거로 제시된 것은 멀쩡한 화살이었고, 옷은 구멍이 뚫리고 피가 묻어있지만 정작 그 피가 겉옷과 속옷 사이에 있는 와이셔츠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의 상처의 크기가 구급차에 탔던 사람과 의사의 견해가 달라졌다는 것, 또 화살의 강도를 보아 사람의 배에 맞고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점 등을 지적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사법기관의 잘못된 법 적용과 습관적인 법관들의 권위의식에 따른 억지 해석을 문제 삼는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문제제기는 재미는 있지만 정작 한편의 모습만을 지나치게 과도하게 보여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굳이 영화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제기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궁의 표적이 된 판사는 굳이 자신이 맞지 않은 화살을 맞았다고 증거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그 상태 그대로였어도 석궁은 발사되었으며 주변에는 증인들이 있었다. 맞지 않았더라도 치명적 무기를 소지했고, 살인미수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셈이다. 그런 것을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화살을 감추고, 자신의 옷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혹은 다른 동물의 피를 묻히면서 증거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적어도 사법기관에서 재판을 관장하는 판사가 그런 무리수를 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둘째, 1심과 2심에서 별 문제가 없이 당연한 것으로 넘어가면서 시간이 흘러버린 옷에 묻은 핏자국에 대한 혈흔감정이 과연 그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혈흔감정은 서로간의 기싸움을 위해 필요한 일종의 줄다리가가 아니었을까? 당시의 과학적 방법이 일정 시간이 지난 상태에서 옷에 묻은 혈흔을 가지고 과연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정밀하게 감정해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만약 그렇다면 혈흔 감정의 결과 그것이 판사의 것이라는 증거자료로 채택되지 못할 수도 있다. 판사의 피였지만, 시간이 지나 오염된 증거물에서 나온 혈흔에 의해 판사의 피라는 증거자료의 신빙성을 결여 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판사가 그런 이유들 때문에 혈흔검사를 배제 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셋째, 고의가 아니었고,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발사였다고 주장을 한다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동기가 있다. 또, 시간과 장소는 사람이 없는 밤이었다.
이 영화 한편을 가지고 석궁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렸고, 교수는 잘못된 사법기관에 의해 억울하게 죄인이 되었다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당시의 상황에서 현재의 CSI 같은 과학수사에 기인한 결과물을 찾고, 그렇지 않으니 문제가 있는 판결이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상당한 무리라고 보여 진다.
진실은 존재하지만 그 진실을 정확히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들과 분명한 것들에 기초해서 진실을 찾아가야한다. 판사와 교수가 가지고 있던 진실, 그들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하나하나의 사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어쩌면 신앙도 비슷하다. 우리는 당장 저 먼 곳에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는 없다. 작은 것 하나 하나에 집중할 때 우리는 먼 곳에 있는 진실의 그림자의 작은 단편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는 것을 보는 믿음, 그것이 바른 믿음이고 바른 신앙이다. 바른 신앙은 증거를 조작하지도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지도, 눈감아버리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보며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나서는 작업, 그것은 과학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의 모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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