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단상] 척도에 관하여

2007. 9. 15. 17:04Life

[기독단상] 척도에 관하여

기독교에 대한 단상 05 : 척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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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척도(尺度)란 무엇인가?

척도(尺度)란 첫째, 자로 재는 길이의 표준을 의미하거나, 둘째 측정하거나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사전(인터넷 야후 국어사전 참조)에 정의되어 있다. 동의어로 도척(渡尺)이라는 말도 있다. 사실 이 척도라는 말은 한자어로 어렵다보니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닌듯 하다. 최근들어 이 단어를 신문이나 인터넷상에서 그렇게 자주 발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척도를 단순히 생각해 본다면 기준이라는 말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길고 짧음을 구별하고자 할때, 빠르고 느림을 구별하고자 할때, 크고 작음을 구별하고자 할때 우리는 그 사이에 기준이 될 무엇인가를 선정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길고, 무엇보다 빠르고, 무엇보다 큰 것인가?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면 오히려 기준을 정하기 어렵지 않다. 평균을 구하든 표준 편차를 구하면된다. 평균보다 그 이상인, 그리고 그 이하인 으로 나눌수도 있다.


2.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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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평균을 생각한다는 것이 항상 최선인 것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어떨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누군가를 보고 그를 좋다고 평한다면 그 좋음의 평가의 기준 즉, 척도는 무엇인가? 척도라는 말을 쓰면 대번에 떠 오르는 인물은 소피스트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가 떠오른다. 워낙에 고등학교 시절,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말이 인상에 깊게 남았기 때문이이라.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누구와도 다른 존재이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을 쉽게 설명한 것이다. 해체주의 철학의 21세기에 그의 말은 어쩌면 그가 살던 당시와 고대, 근세, 현대를 거쳐 지금 가장 진리에 가까운 말로 평가받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말은 해체주의 철학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좋은 사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려는 학생에게 좋은 사람은 자신을 가르쳐 줄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을 자신에게 쏟아 부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능력이 있더라도 그 능력을 내가 아닌 타인, 나의 경쟁자에게 쏟는 사람은 나의 적이 될 뿐이지 내게 [좋은 사람]이 될수 없다. 정치인의 계절이 되었다. 정치인들에게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의 허물은 기꺼이 덮여주는 사람, 하지만 상대의 허물은 끝까지 집요하게 파고 들어서 모든 것을 까발려 줄 사람이 정치인에게는 좋은 사람일 것이다.


3. 기준에 대해서

그렇데, 이 좋음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 대해서 [좋은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그 순간에도 혹시 우리는 내면의 양심에서 무언가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성악을 전공하려는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나는 A 라는 스승에게 지도를 받고 싶다. 그의 지도를 받으면 내 실력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하지만 A는 나를 지도하기를 거부하고 다른 학생을 지도하고 있다. 과연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그는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내 입장에서 나를 지도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을 편들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지만 그 이유로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 그 속에서 들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면서도 다른 정치인에 대해서는 나쁜 점만을 보고 반감을 품을때, 곁으로는 그를 [우리 사람]이라면 품는 제스쳐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마음을 품을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척도는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인간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이것을 해낼수 없다면 그는 사회라는 공동체속에서 함께 살아나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무인도같은 곳에 보내서 혼자서 사는 것이라면 몰라도 여럿이 생활하는 곳에 있는 자가 옳고 그름 조차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 한 명으로 인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 올바른 판단을 위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위해 우리는 다분한 노력을 한다. 배우기도 하고, 때로는 비용을 지불해가며 경험하기도 한다. 가정을 통해, 학교를 통해, 때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학습해 간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일까? 내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내 머리속에 각인된 것일까? 실제로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세뇌되어 온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볼수도 있다.


4. 잘못을 돌이키려는 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직폭력에 대한 묘한 기분을 가지고 그 세계에 발을 담는 아이들이 있다. 거기서 배우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세계에서나 통용될 만한 철학들, 질서들, 그리고 선과 악의 잘못된 우격다짐식 교육이 전부다. 그런데 그들 중에 조직폭력에서 빠져 나오려는 이들이 생긴다. 왜 빠져나오려는 걸까? 이론대로라면 그들은 그 집단에 들때부터 그곳이 진리고, 그곳이 행복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믿고 들어간 것이다. 가서는 열심히 배웠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하도록 교육되었다. 가끔 뼈가 부러지도록 맞고, 집단에서 탈퇴는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목숨을 잃는 것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탈퇴하려는 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탈퇴시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살인조를 보내 살인까지 일삼는 조직폭력배도 있다. 이미 올해 뉴스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거기서 탈퇴하고자하는 이들의 판단의 결정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었을까? 목숨까지도 걸만한 그 결정은 척도는 무엇일까?

그 마음속에 있는, 이것은 잘못이라는 것, 그것에 집중하면서 그 잘못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의 판단의 근거로서의 척도, 그 척도가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면서 클럽을 운영하고, 마약과 청부폭력을 일삼으면서 살던 어떤 이가 갑자기 더 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상황에까지 처해서 자신의 과거를 [죄]라고 정의할 때 그의 삶에 대한 판단의 척도는 단지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거나, 그가 받은 교육의 일부에 의한 것이라고 볼수는 없다. 그 척도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척도는 교육받는 것이 아니다. 그 척도는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고, 그 척도는 자신이 따르지 못하고 있지만, 따라야 함을 인정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5. 정리하며

조금 더 쉽게 말을 정리해 본다.

얼마전 첫째 아이가 둘째 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야단을 쳤다. 첫째는 자신이 받아야 하는 사랑이 둘째에게 부어지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다. 결국 첫째는 둘째 아이가 우유를 먹는 것을 손으로 방해하며 때리기까지 했다. 말로 야단을 쳤지만 첫째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첫째를 조용히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서 다시 야단을 쳤다. "네 동생은 지금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아기다. 자기보다 약한 아기를 괴롭히는 것은 나쁜짓이야." 라는 정도의 말을 했다. 나보다 약한 상대를 멸시하는 것, 나보다 약한 상대를 괴롭히는 것, 나보다 약한 상대의 것을 빼앗는 것, 그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을 굳이 누군가가 억지로 세뇌까지 시켜며 가르쳐주지 않는다해도 우리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역시도 그렇고, 이제 세살된 아이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다시 물어본다면 그것은 또 별개의 문제가 된다. 아이도 그렇지 못하고, 나 역시도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한다. 귀찮기에, 번거롭기에, 또 다른 일에 말려들 것이 두렵기에 우리는 나 보다 약한 이들의 어려움을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알면서도 넘어가는 일이 잦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무슨 교통사고가 났는지 목격자를 찾는 공고를 종종 보게 된다. 목격자가 없는 사고가 아니라 목격자들이 있는 사고인데도 모두는 그 사건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한다. 번거롭고, 귀찮고, 때로는 피해가 오기 때문에 모두는 자신에게는 이 일이 피해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지만, 정작 [그렇게] 살지는 못하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 - 그것을 척도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자연법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되는 척도는 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억지로 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척도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 척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그 척도를 제대로 따라 살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