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할까보다.
2009. 12. 21. 08:50ㆍEye
현재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류의 1/3 이 육류의 사료로 쓰인다.
고기 1kg 을 얻는데 사용되는 곡류는 대략 10kg 이 된다.
CO2 문제, 메탄가스 문제, 물 문제 모두 번외로 치자. 그래도 고기 1kg 을 얻기 위해서 곡물 10kg 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문제다. 왜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 곡식값은 인상은 곧 그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값은 상승은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인게다.
그간 후원하고 있는 컴패션에서 편지 한통을 받았다. 내가 돕고 있는 아이의 후원금을 인상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쾌히 승낙하고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동안 묶여있던 후원금을 실제 상황에 맞게 조금 인상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고 부담이 된다면 이전 금액으로 후원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별 무리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의 내용이다.
한국과 영국의 물가 상승률이 2008년 2.5% 와 2.3% 였다. 컴패션에서 돕는 아이들의 나라인 방글라데시와 에티오피아의 물가상승률은 9.1% 와 17.2% 였다. 이렇게 많이 오르는 물가는 아이들을 돕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물가가 오르면 달러가 오를테니 외환으로 돕는 입장에서 큰 무리는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래 부분에 몇줄의 글이 있었다.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은 좋다. 고기를 먹는 것도 좋다. 먹을 수 있는 것이니, 먹도록 허용된 것이니, 먹고 우리의 피와 살이되는 것이니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 단, 내가 먹는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고통을 받아서는 안된다.
정치적 목적의 무역 규제를 통해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식량값은 오르고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더욱 배고픔을 호소하게 되었다. 선진국들의 고급스런 스테이크와 먹고 버리는 고기때문에 후진국 사람들이 먹을 곡물들이 가축들의 사료가 되었다. 이렇게 가축들의 사료가 된 곡물들 때문에 곡물의 가격은 오르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고기가 아닌 곡물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이오 연료의 사용은 무공해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용되는 옥수수와 사탕수수는 돈이 많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들이겠지만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누군가 살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것을 누군가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기 위해 소모하는 무엇이 되어 버렸다.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의 전체적 삶의 불균형을 가져온 것이다.
컴패션에서 한 아이를 위해 후원하는 금액은 지금까지 매월 4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아이에게 약간의 교육과 약간의 식사를 제공해 준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7끼의 밥을 지원해주었지만 지금은 고작 5끼니밖에 줄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기름기 흐르는 쌀밥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흙 냄새가 나고 때로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래서 눈으로 보아야만 이게 밥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그런 밥이다. 한국에서 여행간 여행자들은 함께 먹기 버거운 그런 것을 음식이라면 먹고 있다. 그래도 감사하게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감사하게 먹는다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우리는 정말 나쁜놈이다. 그 밥은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아니 그 밥은 내 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까? 내 아이는 절대 그런 저질스럽 밥을 먹이지 않을 것이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없어 못 먹는 아이들이 많으니 감사히 받아 먹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의 얼굴을 보며 정말 그 말을 본심으로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생각을 발로 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결국은 내 스스로 하나의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는 듯 하다. 이번 기회에 채식주의자로의 변절(?)을 고민중이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고기 먹는 것을 근절하고 그로인해 약간의 육류시장의 공급이 하락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곡물의 일부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희생한 보람이 될 것이다.
고기 1kg 을 얻는데 사용되는 곡류는 대략 10kg 이 된다.
CO2 문제, 메탄가스 문제, 물 문제 모두 번외로 치자. 그래도 고기 1kg 을 얻기 위해서 곡물 10kg 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문제다. 왜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 곡식값은 인상은 곧 그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값은 상승은 삶의 질에 대한 문제인게다.
그간 후원하고 있는 컴패션에서 편지 한통을 받았다. 내가 돕고 있는 아이의 후원금을 인상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쾌히 승낙하고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동안 묶여있던 후원금을 실제 상황에 맞게 조금 인상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고 부담이 된다면 이전 금액으로 후원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별 무리될 것이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의 내용이다.
한국과 영국의 물가 상승률이 2008년 2.5% 와 2.3% 였다. 컴패션에서 돕는 아이들의 나라인 방글라데시와 에티오피아의 물가상승률은 9.1% 와 17.2% 였다. 이렇게 많이 오르는 물가는 아이들을 돕기 어렵게 만든다. 물론 물가가 오르면 달러가 오를테니 외환으로 돕는 입장에서 큰 무리는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래 부분에 몇줄의 글이 있었다.
가난한 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요소들
무역규제 : 가난한 나라의 식량값이 더욱 올랐습니다.
육류소비증가 :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인 곡물이 가축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상 기후로 인한 재해 증가 : 가뭄과 태풍 등으로 농작물의 수확이 어려워지고 삶의 터전이 사라졌습니다.
옥수수, 사탕수수의 바이오 연료 사용 :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인 옥수수, 사탕수수 등의 가격이 올랐습니다.
무역규제 : 가난한 나라의 식량값이 더욱 올랐습니다.
육류소비증가 :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인 곡물이 가축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상 기후로 인한 재해 증가 : 가뭄과 태풍 등으로 농작물의 수확이 어려워지고 삶의 터전이 사라졌습니다.
옥수수, 사탕수수의 바이오 연료 사용 :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인 옥수수, 사탕수수 등의 가격이 올랐습니다.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은 좋다. 고기를 먹는 것도 좋다. 먹을 수 있는 것이니, 먹도록 허용된 것이니, 먹고 우리의 피와 살이되는 것이니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 단, 내가 먹는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고통을 받아서는 안된다.
정치적 목적의 무역 규제를 통해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식량값은 오르고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은 더욱 배고픔을 호소하게 되었다. 선진국들의 고급스런 스테이크와 먹고 버리는 고기때문에 후진국 사람들이 먹을 곡물들이 가축들의 사료가 되었다. 이렇게 가축들의 사료가 된 곡물들 때문에 곡물의 가격은 오르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고기가 아닌 곡물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이오 연료의 사용은 무공해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용되는 옥수수와 사탕수수는 돈이 많은 이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것들이겠지만 그것으로 먹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누군가 살기 위해 가져야만 하는 것을 누군가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기 위해 소모하는 무엇이 되어 버렸다.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류의 전체적 삶의 불균형을 가져온 것이다.
컴패션에서 한 아이를 위해 후원하는 금액은 지금까지 매월 4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아이에게 약간의 교육과 약간의 식사를 제공해 준다. 이전에는 일주일에 7끼의 밥을 지원해주었지만 지금은 고작 5끼니밖에 줄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기름기 흐르는 쌀밥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흙 냄새가 나고 때로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래서 눈으로 보아야만 이게 밥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그런 밥이다. 한국에서 여행간 여행자들은 함께 먹기 버거운 그런 것을 음식이라면 먹고 있다. 그래도 감사하게 말이다.
문제는 그들이 감사하게 먹는다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우리는 정말 나쁜놈이다. 그 밥은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아니 그 밥은 내 아이에게 먹일 수 있을까? 내 아이는 절대 그런 저질스럽 밥을 먹이지 않을 것이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것도 없어 못 먹는 아이들이 많으니 감사히 받아 먹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의 얼굴을 보며 정말 그 말을 본심으로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본다. 생각을 발로 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결국은 내 스스로 하나의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다가오는 듯 하다. 이번 기회에 채식주의자로의 변절(?)을 고민중이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고기 먹는 것을 근절하고 그로인해 약간의 육류시장의 공급이 하락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가축의 사료로 쓰이는 곡물의 일부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내가 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희생한 보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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