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을 준비하라 (2010-01-C)

2010. 1. 16. 20:46Life/Christian

주의 길을 준비하라 (2010-01-C)

(마가복음 3:7-19) 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 원하는 자(13)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주변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중에는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가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예수께로 온 것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로 몰려왔다. 여러 소문들에 따르면 예수는 그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들은 예수께로 왔다. 그들에게 예수는 원하는 자였다.

많은 무리가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며 예수는 그들은 고친다. 그들의 병을 고치고, 그들에게 있는 귀신을 물러가게 하고, 그들의 앞에서 하늘의 도를 전한다. 그들은 예수의 권능을 보고, 그 권위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의 구원이요, 자신의 이기심의 충족이었다. 그 이기적 목적이 충족되는 한 예수는 그들에게 메시야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이 충족되지 못할 때 그들에게 예수는 성가신 걸림돌에 불과했다.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산에 오른 예수는 자신을 따라온 그 많은 무리 전체를 이끌지 않는다. 그 중에서 “원하는 자”를 부른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자됨은 전적으로 예수의 부름이 있을 때, 즉, 예수가 원하는 자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 함께 있게 I(14)

예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첫 번째로 예수와 함께 있는 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함께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승 예수가 가르치는 수업은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와 같은 어떤 것이 아니다. 16주 과정의 잘 짜여진 커리큘럼으로 각 수업의 목표와 성취도를 측정할 수 있는 종류의 강의가 아니었다. 강의를 마치고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평가하는 그런 강의가 아니었다. 스승 예수의 수업은 공동체의 삶에 전적으로 몸을 담그라고 말한다. 강의의 성취도를 염려함보다 그들은 매일 먹을 저녁식사와 식사 후 잠잘 곳을 고민하며 생활의 불편함을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예수가 가르치는 학교의 모습이었다.

21세기의 교회는 매우 탁월한 교양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절대로 서로의 약점은 건디리지 않으며 동시에 개인적인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고 서로에게 부담되지 않는 그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교제와 사랑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미덕은 함께 사는 공동체안의 사람들간에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전설속의 신화일 뿐이다.

함께 있음은 단지 공간적 점유만을 동시간대에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엔 개개인의 슬픔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와 함께하는 제자들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교양인인양 그렇게 가면속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의 유치함과 패역과 어리석음과 죄와 반역의 모습이 서서히 계속해서 드러나는 중에 살게 된다. 이것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 함께 있게 II(14)

이러한 함께함이 진행될 때에만 그들 중에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세우는 두 번째 함께함이 있게 된다. 두 번째 함께함은 합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서로의 치부가 드러나고 그래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정도의 상황속에서 각자의 힘은 합해지게 된다. 때로는 원해서, 때로는 원치 않으면서 합해지는 그 힘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 가운데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은 힘은 결국 또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 보내사(14)

함께 한 사람들은 다시 세상속으로 보냄을 받게 된다. 세상속으로 들어온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속에서 그려내기 시작한다. 한번도 그 나라의 모습을 엿보지 못한 사람들은 제자들이 그려내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통해 그 나라를 흠모하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제자는 그 나라를 경험해야만 하며, 그것을 그려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가 제자로서 원하는 사람은 그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속으로 보냄을 받는다. 보헤미아에 살던 모라비안들은 카톨릭의 박해가 심해지자 독일로 피신한다. 거기서 진젠도르프 백작의 성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복음을 기뻐하고, 그것을 지키며, 카톨릭의 핍박에 생명을 건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속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자하는 거룩한 열망에 휩싸이게 된다. 남아프리카, 청, 페르시아, 북극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갈 수 없는 곳은 없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재정적으로도 별 힘이 없는 무리들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을 팔아서까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였고, 모인 후 다시 세상속으로 보내졌다.

# 권능

(막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


권능은 주께서 제자들이 가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귀신까지도 내쫒는 권능을 가지기를 원하셨고, 그 권능을 주시려 하셨다. 오늘날 성령의 권능은 소수의 국한된 사람들에게만 특별하게 있는 어떤 은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제자들에게, 모여서 훈련받으며, 세상속으로 보냄을 받을 모든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제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을 무서운 존재, 대단한 존재로 두려워한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혜와 힘과 경험을 지닌 채 우리를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존재, 그래서 무서워 피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보다 더 허황된 개념의 귀신관을 가진다. 그들은 귀신을 두려워하기도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귀신들에 대해 명령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그리스도와 그 성령의 권능을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밖에 없다.

귀신을 내쫒는 권능, 그것은 제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것이며,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21세기의 귀신은 지난 이천년전의 전략과 전술을 여전히 사용할 정도로 미련하지 않다. 인간도 이십년전의 광고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데, 귀신들이 이천년전의 전략과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바보중의 상바보나 가능한 생각이다. 그들도 진화(?)한다.

귀신은 어디에서 가장 크게 활약하고 있을까? 종종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며 말도 안되는 시스템속에 너무도 겸손하게 시스템에 적응하고 있는 순진(?)한 젊은이들을 본다. 개그프로중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술푸며 한탄하는 소리가 왠지 씁쓸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귀신들이 더 이상 손쓰지 않아도 될 만큼 갈 때까지 간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세상의 평화를 지킨다며 중동에 전쟁을 일으키는 미련한 전쟁중독광에게 쓴소리대신 아부하는 소리를 듣게 하고, 남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믿고 한 나라의 대표를 결정한 수많은 이들의 어리석음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귀신이 더 이상 손쓰지 않아도 될 그런 사회를 허락한 것은 아닐까?

사회에 대해서 더 이상 귀신이 할 일은 없는 듯 하다. 이미 사회는 충분히 그들이 보기에 적당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귀신들은 이제 우리의 귀에 속삭인다. ‘하지마 너만 고생하고 너만 바보돼’ 그 소리가 너무도 그럴듯하기에 한국의 많은 교회는 조용히 입을 닥치고 그저 그렇게 그 흐름속에 하나가 되어간다.

21세기에 귀신을 내쫒는 권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내 귀에 속삭이는, 그 무기력에 동참하게 하는 소리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선을 선이라 말하지 못하고,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입이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먹이 공급관의 한 끝에 불과할 뿐이다. 성령의 권능은 옳은 것을 옳게 인정하는 힘과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소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