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2010-01-E)
2010. 1. 30. 17:35ㆍLife/Christian
(막5:35-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진 사람
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이티의 지진참사를 담은 다큐필름에서 어린 딸의 주검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하늘을 원망하는 그 여인의 목소리는 너무나 울어서 그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닥친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자신에게는 이 상황을 돌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 첫 번째 소리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예수를 만나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필사적인 간청을 하고 있는 회당장에게 사람들이 와서 한 말이다. 이제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있었다. 또 이미 죽었으니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예수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도 하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이들은 쉽게 그 한계에서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기는 지혜이기도 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다. 그것이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두가 안된다고 한다면 억지로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모든이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모든 진보는 이 비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버나드쇼의 말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 합리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특별한 대립의 걱정이 없는 적당한 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이 말의 앞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 이미 죽었으니 어쩌겠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않겠어. 슬프지만 그 슬픔을 위로하지만 역시 그 앞에서 사람들은 격식을 차린 예의를 중시하게 된다. 이미 죽은 딸은 어쩔수 없는 것이고, 그 때문에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지 말것을 사람들은 강요한다.
# 두 번째 소리 -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회당장에게 이미 죽은 딸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말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예수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한다. 합리적신 사람들의 말 앞에서 예수는 비합리적인 소리를 지른다. 합리적인 것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체를 앞에 두고 슬퍼서 잠시 눈물을 흘릴수는 있지만 그 앞에서 그 병을 고치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예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합리성을 심령의 두려움으로 설명한다. 그 두려움은 믿음을 거부케 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그렇게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기술을 습득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합리를 거부할 것을 말한다. 비합리적인 믿음, 그것은 이미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전에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일이다. 합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믿으라한다.
# 달리다굼
예수의 달리다굼은 단지 죽은 소녀를 살리는 한 가지 사건을 위해 존재하는 일회성 멘트가 아니다. 그의 달리다굼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앞에서 믿음을 가진 자의 부활을 보이는 약속의 성취였고, 이어질 재림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녀는 일어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놀랐다. 크게 놀랐다. 그들이 예수를 믿었을까?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본 건은 예수가 죽은 아이를 살린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본 건은 죽어있던 아이가 살아난 것이었다.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난 그 자리에는 예수를 비웃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와 제자들과만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장면을 볼수는 없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 오직 그 사건을 목격한 이들만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놀란 사람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그 사이에는 너무도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 자신을 P.R. 하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능력이었지만 그는 그 능력을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그 능력을 보였다면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두 파로 나뉜다. 하나는 예수의 전능하심과 그의 하나님되심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더 싫어하고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사기이며, 나아가서 귀신의 힘을 빌어서 하는 부두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경멸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하나님되심, 즉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보였다. 하지만 믿음이 없어 오히려 예수를 멸시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볼수 있도록 하셨다. 그들의 눈에는 죽었다고 착각했던 딸이 다시 일어난 것이고, 이전에 사망진단을 내렸던 의사가 돌팔이였다고 비춰졌을 것이다. 그들의 놀람과 혼란은 곧 진정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빠진 사람
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이티의 지진참사를 담은 다큐필름에서 어린 딸의 주검을 앞에 두고 통곡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하늘을 원망하는 그 여인의 목소리는 너무나 울어서 그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닥친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자신에게는 이 상황을 돌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 첫 번째 소리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예수를 만나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필사적인 간청을 하고 있는 회당장에게 사람들이 와서 한 말이다. 이제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있었다. 또 이미 죽었으니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예수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죽은 사람을 살릴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도 하다.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이들은 쉽게 그 한계에서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기는 지혜이기도 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다. 그것이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두가 안된다고 한다면 억지로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뿐만 아니라 모든이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모든 진보는 이 비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버나드쇼의 말이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 합리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특별한 대립의 걱정이 없는 적당한 선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이 말의 앞에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래 이미 죽었으니 어쩌겠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않겠어. 슬프지만 그 슬픔을 위로하지만 역시 그 앞에서 사람들은 격식을 차린 예의를 중시하게 된다. 이미 죽은 딸은 어쩔수 없는 것이고, 그 때문에 더 이상 예수를 귀찮게 하지 말것을 사람들은 강요한다.
# 두 번째 소리 -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회당장에게 이미 죽은 딸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을 말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예수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한다. 합리적신 사람들의 말 앞에서 예수는 비합리적인 소리를 지른다. 합리적인 것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체를 앞에 두고 슬퍼서 잠시 눈물을 흘릴수는 있지만 그 앞에서 그 병을 고치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예수는 믿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합리성을 심령의 두려움으로 설명한다. 그 두려움은 믿음을 거부케 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그렇게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기술을 습득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합리를 거부할 것을 말한다. 비합리적인 믿음, 그것은 이미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전에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일이다. 합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것을 믿으라한다.
# 달리다굼
예수의 달리다굼은 단지 죽은 소녀를 살리는 한 가지 사건을 위해 존재하는 일회성 멘트가 아니다. 그의 달리다굼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앞에서 믿음을 가진 자의 부활을 보이는 약속의 성취였고, 이어질 재림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녀는 일어났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놀랐다. 크게 놀랐다. 그들이 예수를 믿었을까?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야로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본 건은 예수가 죽은 아이를 살린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본 건은 죽어있던 아이가 살아난 것이었다.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난 그 자리에는 예수를 비웃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 아이의 부모와 제자들과만 함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예상할 수는 있지만 그 장면을 볼수는 없었다.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 오직 그 사건을 목격한 이들만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놀란 사람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그 사이에는 너무도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 자신을 P.R. 하는 아이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능력이었지만 그는 그 능력을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그 능력을 보였다면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동일한 사건을 보면서 두 파로 나뉜다. 하나는 예수의 전능하심과 그의 하나님되심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를 더 싫어하고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사기이며, 나아가서 귀신의 힘을 빌어서 하는 부두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경멸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하나님되심, 즉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보였다. 하지만 믿음이 없어 오히려 예수를 멸시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볼수 있도록 하셨다. 그들의 눈에는 죽었다고 착각했던 딸이 다시 일어난 것이고, 이전에 사망진단을 내렸던 의사가 돌팔이였다고 비춰졌을 것이다. 그들의 놀람과 혼란은 곧 진정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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